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 시달린 어머니는 아버지의 월급날이 오면 모처럼 표정이 밝아지셨고, 나는 기회를 틈타 어머니에게 슬쩍 용돈을 요청했다.
“엄마, 나 이천 원만”
어머니는 아들이 돈을 어디에다 쓸 줄 알기 때문에 다른 말씀 없이 지갑을 여셨다. 나는 이튿날 학교 앞 문방구에 가서 ‘소년중앙’이라는 어린이 잡지를 샀다. 한 달에 한 번 발행되는 그 잡지에는 청소년들이 알아야 할 과학, 사회, 문학 등 다양한 지식이 망라(網羅)되어 있었는데 사실 나는 그런 건 관심이 별로 없었다. 나의 관심은 그 책에 딸린 별책부록 만화책이었다. 별책부록의 만화를 읽고 또 읽고를 반복하다가 더 읽을 게 없어지면 비로소 본(本) 책을 읽었다. 도서관에 가지 않으면 책을 구경하기 힘든 시절이라 그것들을 읽는 일이 어린 시절 마른 영혼을 적시는 몇 안 되는 기회였다. 가족들에게 아버지의 월급은 마른논에 시원하게 내리는 소나기였고, 나는 그 소나기를 맞으며 유소년 시절을 보냈다. 나는 매달 28일, 아버지 월급날을 기다렸다.
기다림은 결핍이 있을 때 나타난다. 아버지의 월급날을 기다리고,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고, 비를 기다리고, 눈을 기다리는 것은 내 몸과 마음 어딘가에 결핍이 있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결핍 상태는 다 가진 이들이 느낄 수 없는 기다림과 희망의 맛이 있다. 추운 겨울 오래도록 강태공들이 갯바위에 앉아 낚시를 드리울 수 있는 것은 현재의 결핍 상태와 언젠가는 대물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만들어 낸 마법이다.
기다림, 수천(水天) 수(需)
주역에서 ‘기다림’은 수천(水天) 수(需) 괘에 담겨 있다. ‘수(需)’라는 글자는 본래 비를 홀딱 맞아 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사람을 나타낸 글자이다. 비를 맞은 사람은 누구였을까? 아마도 긴 가뭄을 해소해 달라고 기도하는 왕이나 제사장이 아니었을까 싶다. 가뭄은 물의 결핍 상태이다. 농경 사회에서 가뭄이 들면 그 책임은 리더의 것이었다. 하늘을 대신해 백성을 다스린다는 지배층의 논리가 긴 가뭄으로 인해 거짓으로 드러날 수 있게 때문에 왕은 천문과 지리 등 자연현상에 예민했다. 그래서 가뭄이 들 때면 왕이나 제사장은 높이 단을 쌓아 농사지을 비를 내려달라고 정성스럽게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다행히 기다리던 비가 내리면 왕은 정통성을 인정받고 지배자의 길을 계속 갈 수 있었다. 왕은 비가 내리면 옷이 흠뻑 젖더라도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제단 아래로 내려올 수 있었다.
금문에 나타난 需(출처: hanziyuan.net)
간절히 기다린 비가 내리자 대지가 촉촉이 생기를 얻고, 마른논 갈라지듯 구겨진 농부들의 주름살도 이내 펴진다. 아직 곡물이 다 자라지는 않았으나 농부들에게는 농사를 지어 자식들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희망이 열린 셈이니 이 비는 ‘식량의 원형’이나 다름이 없다. 이러한 이유로 수(需)라는 글자에는 ‘기다림’, ‘비가 그침’,‘음식’, ‘필요함’, ‘결핍’, ‘구함’ 등의 뜻이 담겨 있다.
<주역전의>에서는 수(需) 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괘의 대의(大意)는 '기다린다'는 뜻인데 <서괘전(序卦傳)>에서는 필요한 것 중에 큰 것을 취하였다. 건건(乾健, 하괘)의 성질은 위로 나아가는 것인데 마침내 감험(坎險, 하괘)의 아래에 처하여 험(險)이 가로막고 있으므로 기다린 뒤에 나아가는 것이다.”
비를 기다리는 국가들
예나 지금이나 농업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지역은 하늘에서 비가 제때 내리지 않으면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다. 광대한 평야와 넓은 초지가 있다고 한들 물을 마음대로 댈 수 없는 땅은 농업의 측면에서는 빛 좋은 개살구요, 그림의 떡이다. 이러한 지역은 오로지 하늘에서 내리는 강수에 의존해 농업을 하기 때문에 불확실성이 매우 크다. 그 때문에 농업 기술이 발달하고 농업에 투자를 할 여력이 있는 부유한 국가들은 관개 시설을 정비하여 농업의 강수 의존도를 줄이며 안정적인 농업 생산 체계를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세계 식량기구(FAO)는 관개 시설이 갖춰진 토지 비율을 국가별로 정리하고 있는데, 아래 지도를 보면 관개 시설이 갖춰진 국가들과 그렇지 못할 국가들을 비교해 볼 수 있다.이 지도에서 관개된 토지 비율이 낮은 나라들은 대개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브라질처럼 강수량이 많아 굳이 관개 시설이 필요 없는 유형, 둘째, 오스트레일리아처럼 국토 대부분이 농경에 부적합한 지역이어서 농지 비율이 낮은 유형, 셋째 아프리카 국가들처럼 가난하여 농업 시설에 투자하지 못한 유형이다.
이 세 유형 중 문제가 되는 것은 아프리카 국가들과 같은 세 번째 유형이다. 아프리카의 면적은 3천만 제곱 킬로미터(30,370,000km²)로 남한 면적의 약 300배에 해당하는 엄청나게 넓은 대륙이다. 넓은 토지 면적에도 불구하고 만성적인 내전으로 인한 불안정한 정치 상황과 그에 따른 재정 부족으로 농업 시설에 적극적으로 투자하지 못하였고 그 결과 이 지역의 많은 국가들은 강수량의 변화에 매우 취약한 농업 구조를 갖게 되었다. 오로지 강수에 의존해 농사를 짓는 토지 비율이 높기 때문에 지구온난화, 엘리뇨와 같은 기후 변화로 강수량이 줄어들게 되면 이들 국가들은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의 사하라 이남에 위치한 사헬지대와 아프리카 남부의 나미브 사막 주변의 초원지대에서는 주민들이 사막화와 강수량의 감소로 식량 생산량이 감소하자 현재 주거지를 떠나고 있다. 사헬 지대의 주민들은 원래 사헬의 북부에서는 유목, 남부에서는 농경 생활을 하였는데 이 지역에 가뭄이 30여 년 간 지속되자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기후 난민이 되어 떠돌고 있다. 적도 남쪽의 나미브 사막 주변의 초원지대에도 강수량이 줄면서 농경지가 축소되어 난민이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 아래 지도는 유엔 사막화 방지 협약(UNCCD, United Nations Convention to Combat Desertification)에서 배포한 자료인데, 빗금 친 지역은 사막화 현상으로 위험에 처한 지역을 표시하였다. 사막화 이외에도 강수량의 증감, 빙하의 융해, 화산의 폭발, 사이클론과 같은 열대성 폭풍 등 다양한 기후변화가 인간의 생존에 위협이 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만약 이 지역에 관개 수로가 정비되어 있다면 강수 부족으로 인한 자연재해는 어느 정도 개선될 수 있다. 그러나 계속되는 내전으로 인해 농업 투자보다 전쟁무기를 구입하는 현재 상황에서 이 지역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보기는 어렵다.하늘에서 비라도 흠뻑 내려 소박한 희망이 되어 주면 좋으련만 가뭄은 길고 평화는 너무 멀다.
환경 자연재해들(출처: UNCCD)
기후변화로 고통을 겪고 있는 주민(출처:유엔난민기구 홈페이지)
언제까지 기다릴 것인가?
아프리카의 결핍은 상상 이상으로 심각하다. 비가 충분히 와서 모든 문제가 한 방에 해결되는 일을 상상하는 것은 순진한 꿈이다. 결핍은 희망과 기다림이라고 했건만, 끝이 보이지 않는 결핍도 정말로 희망이고 기다림일까.
“가뭄 때문에 먹을 것이 없어지면서, 무장 세력이 제 농장까지 공격해
그나마 있던 음식과 작물을 약탈해갔어요. 우리는 배고픔과 싸워야
할 뿐 아니라, 이제 폭력과도 싸워야 하는 상황이 되었어요.”
- 에티오피아로 피난 온 소말리아 농부 -
기후 변화로 인한 강수량 감소와 서구의 식민 잔재로 발생한 많은 문제들은 서로 맞물려 지역 주민들을 삶의 터전에서 몰아내고 있다.
주역에 "큰 강을 건넘이 이롭다"라고 하였다. 아프리카 주민에게 큰 강은 가난과 내전이며, 세계인들에게 큰 강은 급속한 기후변화이다. 최근 한반도 여름 기온은 매년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으며, 미국 서부에서는 몇 달째 산불을 끄지 못해 곤욕을 치르고 있다. 아프리카의 취약지역의 문제라고만 생각했던 기후변화의 그림자가 이제 우리 코앞으로 다가왔다. 인류의 숙제로 던져진 큰 강을 우리는 어떻게 건널 것인가? 큰 강을 앞에 두고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안주하며 기다린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