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교사 주역을 만나다

07 지수(地水) 사(師) 괘: 무리를 모으고 받아들인다.

by 땅 작가

10여 년 전 강원대학교 지리교육과에서 운영하는 교사 대상 연수에 참여한 적이 있다. 접경지역 일대의 평화적 가치를 알리고자 만들어진 이 프로그램에는 DMZ 인근의 소양강 댐, 박수근 미술관, 양구 백자 박물관 등 강원도의 명소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중 하이라이트는 양구 해안 분지였다.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에 위치한 이 지역은 소위 민통선 지역으로서 일반인들의 접근을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족 여행을 준비하며 코스로 삼기에는 부담스러운 곳이었다. 워낙 아름답기도 하고, 학술적으로도 의미가 있어 교과서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 곳을 언제나 갈 수 있을까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강원대학교 지리교육과의 도움으로 운 좋게 발을 들일 수 있었다.

답사 당일 강원대학교 사범대학 앞마당에 모인 40여 명의 지리교사들이 카메라를 들쳐 매고 '해안 분지' 행 버스에 올랐다. 이름 모를 하천 몇 개를 지나고, 험산준령의 좁은 길을 굽이굽이 오르다가 드디어 해안 분지를 둘러싼 능선에 도착했다. 전망대에 올라 내려다보니 철조망 너머로는 북한의 마을이 보였고, 남쪽으로는 아름답게 펼쳐진 농경지가 보였다. 분지를 둘러싼 능선에서 내려오는 가느다란 여러 개의 물줄기들은 어지럽게 흐르다가 분지의 중앙부의 낮은 곳에서 만나 동쪽 능선을 허물고 분지를 빠져나가 소양강으로 향한다.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분지 전경(사진 출처:강원평화지역국가지질공원)

해안분지의 수계와 동-서 단면출처 : 강원평화지역국가지질공원


돼지가 평안을 준 마을, 해안 분지

'해안 분지'가 위치한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의 '해안'은 돼지와 관련이 있다. 아주 옛날 이 분지에는 주민들이 밖에 나가지 못할 정도로 뱀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곳곳에 습지와 수풀이 우거져 있으니 뱀이 살기에는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을 것이다. 예외는 있겠지만 뱀이라는 동물은 보통 낮고 축축한 곳을 서식지로 삼는다. 음습한 곳에서 개구리나 쥐와 같은 작은 동물을 사냥하며, 스르르 미끄러져 조용히 목표물에 접근한 뒤 갑자기 습격하니 그 모양이 여간 음흉하지 않다. 팔다리가 없어 항상 배를 땅에 의지하여 살기에 높고 건조한 곳에 사는 것과는 태생적으로 거리가 먼 존재이다. 뱀은 겁이 많아 평소에는 사람을 피해 다니지만 위협을 느끼면 대상을 가리지 않고 날카로운 이빨로 공격을 하는 성향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뱀을 두려워한다. 그런데 마을의 인구가 증가하면서 주민들은 경지를 늘려야 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하천 주변의 땅을 개간하려고 했지만 뱀이 너무 많았다. 경지를 늘리지 못하면 굶어 죽을 판이고, 경지를 늘리자니 뱀에 물려 죽을 판이었다. 이 문제로 인해 마을 사람들이 고민하고 있을 때 당시 최고의 지식인인 '스님'이 나타나 해결책을 제시했다고 한다. 스님은 돼지가 뱀을 잘 먹으니 집집마다 돼지를 키우라고 조언을 했다. 돼지는 뱀의 천적이니 묘안이 아닐 수 없었다. 스님 말대로 마을에 돼지를 키우자 돼지는 뱀을 닥치는 대로 먹어 씨를 말렸고, 그 후 마을 사람들은 경지를 개간하여 풍요롭게 살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곳의 지명이 '돼지로 인해 평안해진 마을'이라는 뜻의 '해안(亥安)'이 된 것이다. 마을의 곳곳에는 전설과 관련한 돼지 조형물이 보인다.

해안면에는 돼지를 상징하는 조형물들이 보인다.(좌: 해안면 돼지 석상, 우:해안면 복지회관), 사진 출처: http://blog.daum.net/nam-sh0302/15711)


그러나 평화롭지 않았던 '해안 분지'

그러나 이 지역의 역사는 전설처럼 '평안함'과는 다르게 펼쳐졌다. 한국 전쟁 시기 양구 해안분지 일대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일명 '가칠봉 전투', '펀치볼 전투' 등이 치러졌다.

1951년 6월 경 휴전 회담이 제안되었으나 진전이 없자 미군 19 군단장이 양구 해안면 북방 능선인 가칠봉 일대에 5사단을 투입하여 고지를 점령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지형적으로 가칠봉은 해안분지의 북서쪽 분지를 둘러싸고 있고, 그 외곽에는 높은 산들이 솟아 있어 남과 북의 요충지였다. 유엔군과 국군이 공격하자 북한군은 27사단과 12사단을 투입하여 반격에 나셨고, 고지 주인이 여섯 번이나 바뀌는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다. 이 전투로 남측은 해안 분지 북쪽 가칠봉 및 주위에 연결된 고지를 완전히 점령할 수 있었다. 한국군은 양구군 해안 분지 일대를 완전히 차지하여 북서쪽의 주요 고지를 확보했다.

이후에도 미군 10 군단장이 1951년 8월 중순 해안분지 북측 고지 군에 작전통제선을 설정한 다음 각 사단에게 공격을 명령하여 국군 해병 제1 연대, 미군 제7해병연대가 투입되었고, 북한 인민군, 중공군이 투입되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해안 분지를 '펀치볼(과일 담는 그릇)'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한국전쟁 때 종군기자들이 이 지역을 그렇게 부르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고지전>은 해안분지 일대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를 담아내고 있다.

영화 <고지전>의 한 장면


물줄기가 모이는 분지는 장수의 상

그렇다면 해안 분지는 주역 64괘 중 어떤 괘로 설명할 수 있을까에 속할까? 아마도 ‘지수(地水) 사(師)’괘와 여러 가지로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 먼저 이 괘는 위가 땅을, 아래는 물로 구성되어 있어 분지의 사면을 따라 어지럽게 흘러내리는 하천의 모양과 닮아 있다. 또한, 5개의 음효와 1개의 양효로 구성되어 있는 괘의 구성이 음을 상징하는 여러 마리의 뱀과 그 천적인 돼지를 연상케도 하고, 자연환경의 위협으로 혼돈에 빠진 주민들(음)이 도력 높은 스님(양)을 따르는 모습을 연상케도 한다.

<주역전의>에서 사(師) 괘에 대해 "괘 됨이 곤(땅)이 위에 있고 감(물)이 아래에 있으니, 두 체로 말하면 땅 가운데 물이 있으니 여럿이 모이는 상이 되고, 두 괘의 뜻으로 말하면 안은 험하고 밖은 순하여 험한 도이면서 순함으로써 하니 군대를 행하는 의이고, 효(爻)로 말하면 한 양(陽)이 여러 음(陽)의 주장이 되었으니 여러 사람을 통솔하는 상이다. 비(比)괘는 한 양으로 여러 음의 주장이 되어 위에 있으니 군주의 상(象)이고, 사(師) 괘는 한 양으로 여러 음의 주장이 되어 아래에 있으니 장수(將帥)의 상(象)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땅 가운데 물이 있음은 물이 땅 가운데 모인 것이니, 무리가 모이는 상이 된다. 그러므로 사(師)라 한 것이다. 군자는 땅 가운데 물이 있는 상을 보고서 백성들을 용납하여 보호하고 무리들을 모은다."라고 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해안분지에 대한 전설과 한국 전쟁 때 국군, 유엔군, 중국군, 북한군이 싸운 격전지이며 지금도 남과 북의 군대가 모여 있는 모양은 지수 사(師) 괘의 한 예라고 볼 수 있다.



분지는 삶의 터전, 사람을 담는 그릇

분지는 커다란 그릇이다. 그 그릇에 하늘도 담고, 땅도 담고, 인간의 삶도 담았다. 분지(盆地)라는 말은 '그릇 모양의 땅'을 의미하는데, 해안 분지만큼 그 개념에 충실한 분지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분지는 지질구조의 차이, 하천에 의한 차별침식(差別, differential erosion) 등에 의하여 형성될 수 있는데, 해안 분지의 경우 하천 침식에 강한 변성암 계통의 암석과 상대적으로 침식에 약한 화강함 계통의 암석이 차별적으로 침식되었다. 오랜 하천의 침식 과정에서 변성암체들은 산지가 되고, 약한 암석은 분지의 오목한 부분이 되는데, 해안 분지는 그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침식 분지의 형성과정(출처:한국지리 교과서(천재교육))


우리나라에는 해안 분지 말고도 수많은 분지들이 있다. 춘천, 수원, 충주, 남원, 대구 등의 도시들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분지 지역이다. 분지는 주변의 산지가 겨울철 차가운 바람을 막고 땔감을 공급해주는 이점이 있었다. 또한, 산지로부터 흘러드는 물이 풍부해 취락이 입지 하거나 농사를 짓기에도 유리했다. 하천 주변의 물 빠짐이 나쁜 습지는 논농사를 짓기에 유리했고, 산과 평지가 연결된 경사면에서는 밭농사가 유리했다. 내륙의 분지 지역은 일교차가 커서 과일이 단단하고 당도가 높으니, 충주, 영주 등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과일 산지들은 분지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다양한 이로운 점이 있어 예로부터 작은 분지에는 마을이 형성되었고, 규모가 큰 분지에는 도시가 들어섰다.

해안분지가 분지로서의 풍요로움을 누리고 그 이름처럼 평화로운 마을이 되었으면 좋겠지만 아직도 남과 북의 군인들이 총부리를 겨누고 있고, 시시 때때로 남과 북의 정세가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불안하여 해안분지에 평화가 언제 올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주역에서 "군자는 무리들을 모으고 용납한다"라고 했다. 남과 북이 상대를 위협하고 적대시하는 관계에서 벗어나 서로를 받아들여 하나가 될 수 있는 주역의 지혜를 모아봤으면 하는 소망을 기원해본다.

이전 06화지리교사 주역을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