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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우 Nov 28. 2023

성장의 단상

스타트업에서 수집한 성장에 대한 짧은 이야기들

지금 나는 성장을 이념으로 삼는 집단에 속해있다. 스타트업. 이곳에서 대부분의 질문과 답은 성장이란 단어와 연결되어 있다. 우리 회사는 잘 성장하고 있나요. 저는 잘 성장하고 있나요. 우리가 더 성장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빨리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문제는 성장이 정체된 것입니다. 성장, 성장, 성장.


오늘은 그동안 모은 성장에 대한 말을 한번 풀어보려 한다. 어쩌면 이 수집품들은 성장을 말할 때 우리가 상상하는 개념이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탐색하는 데 도움을 주는 매개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성장이란 단어의 중력이 영향을 미치는 일상의 풍경화이거나.


<스타트업은 성장이다. 성장을 못하는 스타트업은 스타트업이 아니다. 중소기업이다.>

이직 첫날 들은 말이다. 스타트업이란 말이 좀 막연하게 느껴졌는데, 명쾌한 설명에 고개가 끄덕거려졌다. 말하는 이의 확신에 찬 어투로 보건대, 사전적 정의라고 불러도 무방할 성싶었다. 검색창에 스타트업의 정의를 쳐봤다. 추천스니펫엔 다음과 같은 문구가 걸려있었다. <벤처기업협회에서는 스타트업을 '개인 또는 소수의 창업인이 위험성은 크지만 성공할 경우 높은 기대수익이 예상되는 신기술과 아이디어를 독자적인 기반 위에서 사업화하려는 신생 중소기업’으로 정의하고 있다.> 두 설명 사이에 미묘한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쾌활한 공유 오피스의 분위기가 싫지 않았으므로.



<제가 잘 성장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성장에 대한 고민, 답이 있을까요?>

스타트업은 성장. 성장은 곧 스타트업. 스타트업에 다니는 직원들은 자연스레 지금 잘 성장하고 있는지 걱정할 수밖에 없다. 나도 예외는 아니라 틈만 나면 선배들을 붙잡고 비슷한 질문을 하곤 했다. 들었던 대답 중 가장 인상 깊었던 대답은 이렇다. “산을 오른다고 생각해 보자고. 잘 올라가고 있는지 자꾸자꾸 뒤돌아보면서 올라가는 사람보다, 그냥 묵묵히 땅만 보고 걷는 사람이 훨씬 더 빨리 정상에 도착한다.” 그날 이후로 나는 정상에 무엇이 있는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직원들이 일하고 싶은 회사를 만드는 비결 : 성장>

다른 회사 다니는 사람들과 회사 문화에 대해 이야기했던 적이 있다. 다른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 물었다. “같이 오랜 시간 붙어있다 보면 팀 내에 문제가 생기기도 하는데, 그쪽 회사는 분위기가 참 좋아 보여요. 팀 문화를 개선하는 팁이 있나요?” 자리에 같이 있던 선배가 답했다. “성장입니다. 성장하는 동안엔 어깨를 부딪혀도 웃고 지나가고, 성장하지 못하면 옷깃만 스쳐도 싸움이 나는 게 당연합니다. 성장이 약이고 답입니다.” “햐! 역시! 곳간에서 인심이 나는 거군요!” 다른 회사 직원은 탄복했다. 당시에 난 회사를 다니면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가치는 동료와의 우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우정과 매출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었다는 걸 그 대화로 깨달았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고 씁쓸할 것도 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 생각이 머리에 남긴 남았던 것 같다. 얼마 뒤, 친한 동료들과 프로젝트 회의를 마치고 일어서다 이런 말을 슬쩍 농담처럼 던져본 걸 보면 말이다. “우리 이러려고 만나요?”



<경제가 성장한다는 것은, 공짜였던 것에 돈을 지불하게 됨을 의미한다.>

어느 웨비나에서 들은 말이다. 연사는 생수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예전엔 물이 공짜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가 생수라는 ‘프로덕트’를 사 먹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의 본질은 물을 찾아서 ‘생수’로 만드는 것입니다.” 스타트업 씬에서 성장만큼은 아니지만 꽤 자주 들리는 말은 ‘시장을 개척한다’이다. 내가 아는 모든 스타트업 사람들이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그들 덕분에 새로운 시장의 기회는 발견될 것이고, 세상의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오프라인이 온라인으로 확장되고, 둘 사이에 플랫폼이라는 공간이 생겨난 덕분에 이제 우리는 숨 쉬듯이 돈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아마 이 개척이 끝나는 날엔 숨 쉬는 것마저 공짜가 아니리라.


그런데 요즘은 경기가 안 좋다. 물가가 많이 오른 것은 한스럽지만, 점심시간에 농땡이 칠 공원이나 오후의 햇살, 퇴근시간의 노을 같은 것들이 ‘프로덕트’가 되는 시간이 조금 늦춰졌으니 일장일단이 있다고 봐야 하는 걸까.



<성장 좋아하는 애인은 지밖에 몰라요.>

어느 날엔 친한 동료가 눈이 퉁퉁 부어서 출근했다. 애인과 헤어졌단다. 그는 ‘스타트업 피플’답게 지난 연애를 회고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같이 성장할 수 있겠다 싶어서 끌렸는데, 만날수록 지밖에 모르더라고요.” 어떻게 위로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옛날에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빌 게이츠 아시죠. IT업계의 구루. 빌 게이츠도 얼마 전에 이혼했잖아요. 이유가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을 것 같아서’라던데요. 잘 헤어지신 겁니다.” “그렇죠? 이제 저도 제 성장에만 더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성장하며 사랑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자, 여기까지가 내가 스타트업에서 모은 성장에 대한 이야기이다. 내가 잘 성장했는지를 회고해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무익한 말잔치나 벌이고 있으니 참 내 앞날이 걱정이다. 내일은 건강검진을 가기로 해서 하루 쉬어간다. 아, 잊고 있었던 성장에 대한 말이 하나 더 떠오른다. <영원히 성장하는 건 암세포밖에 없다.> 내 안에 무시무시한 무언가가 성장하고 있진 않겠지. 그럴 가능성도 없진 않다.


이미 한참 전에 다 자라버린, 작년부터 살이 붙고 털이 부쩍 빨리 자라기 시작한, 건강검진을 하루 앞둔 30대 남성인 나는 더 성장할 수 있을까. 오랜만에 야식을 거른탓에 간만에 또렷한 정신으로, 삼가 성장에 대해 생각한다.


풀칠 137호(23.05.18)전문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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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망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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