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의 여름을 돌아보며
“화병 난 거 아니에요?” 옆자리 동료의 말이 아니었으면 하루 종일 가슴을 쿵 쿵 치고 있었음을 깨닫지도 못할 뻔했다. 화병 날 일이 뭐가 있겠냐며 둘러대고 짐을 싸서 나왔다. 이미 퇴근 시간을 한참 넘긴 다음이었다.
출근길의 지하철에선 그 좁은 틈바구니에서 뉴스레터도 보고, 책도 꺼내 한 토막씩 읽고, 업무용 메신저도 틈틈이 확인하는데 퇴근길엔 공간이 훨씬 쾌적한대도 아무것도 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또 한 손으로 가슴을 치고 있다.
무난한 하루였는데 왜 자꾸만 가슴을 치게 되지. 내가 나를 두들기는 소리가 지하철 소리 사이로 섞여든다. 쿵, 쿵 소리를 내며 지하철에 실려가는 나는 심장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해서 활동하는, 쿵 쿵 소리를 내는 심장…….
집에 돌아왔다. 이 집은 내 인생의 럭셔리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원룸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해 빚을 잔뜩 내서 투룸으로 이사를 온 데다가, 월급 날마다 가구를 하나씩 사서 채우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인테리어는 완전히 망했다. 어느 날엔 우드톤, 어느 날엔 모던, 어느 날엔 캠핑장. 기분 따라 충동적으로 산 가구들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개중 어떤 것들은 포장도 뜯지 않았다. 저 가구들을 구매했으니 곧 버리기도 해야겠지. 집의 계약은 1년 반쯤 남았다. 1년 반은 제법 긴 시간이라고 나를 달래보려 하지만 한편으론 날짜를 받아놓으면 이미 끝이 나버린 거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어차피 방을 뺄 집을 꾸미는 일은 헤어질 날을 정해놓은 연애처럼 서글프다.
안방으로 들어가는 길, 주방에 잠시 눈이 머문다. 아침에 회사에 가져가서 먹으려고 씻어놨다가 깜빡하고 챙기지 못한 복숭아가 그새 물러터져있다. 벌어진 껍질 사이로 녹은 캐러멜 같은 즙이 새어 나와있다. 이렇게 너무 익어버린 과일은 좀 징그럽다. 나는 아주 단단한 과일만을 먹고 싶다. 좀 시다고 하더라도 형체와 색을 흐트러짐 없이 유지하고 있는, 사람의 손이 찾아가지 않았다면 여전히 나무에 달려있을 풋과일만을 먹고 싶다.
침대에 드러누웠다. 침대와 창문을 일직선이다. 30미터쯤 떨어져 있는 앞 오피스텔의 호실마다 불이 들어와있다. 밤에 불이 켜진 창문은 대게 도시의 경관으로 받아들여지지만 경관 이전에 바이탈 사인이다. 저 조명 뒤에 역시 전기신호로 조직된 신경섬유와 근육과 장기들이 있다. 내 퇴근의 감각은 창 건너의 오피스텔에 전류가 도는 걸 보고서야 비로소 찾아온다.
그런데 뭐가 이렇게 답답하지. 왜 종일 가슴을 쳤지.
창 건너 오피스텔 불빛을 조명 삼아 이번엔 출근길의 풍경을 다시 펼쳐본다. 아침부터 뜨거운 태양. 북상하는 초거대 태풍을 알리는 재난문자. 몸을 부대끼고 서있어야 하는 덥고 짜증이 나 있는 사람들. 갑자기 터져 나오는 누군가의 날카로운 목소리. “제가 싸가지가 없어요? 제가요?” 삽시간에 퍼지는 공포와 안도. 그리고 다시 짜증. 환승역에 늘어서 있는 하얀 국화들. 또다시 흰 국화. 그래도 매일같이 출근. 아침마다 하는 회의. 매일같이 개선하고 실험하고 ‘그로스’해도 우하향하는 실적. 후배들의 눈물. 후배들은 고생했다는 말에 금방 눈물을 퍼올린다. 점심시간. 또다시 폭염. 무언가를 위해 서명을 부탁하는 사람들. 지나면서 보니 사람들이 서명을 부탁하는 건물 앞엔 최근에 안내문이 새로 붙었다. ‘이 건물엔 어린이집이 있습니다. 외부인의 출입을 금합니다.’ 점심시간이 끝나면 내부인들은 커피를 한 잔 사들고 다시 자리로 돌아간다. 그리고 다시 일. 이따금씩 재난문자. 이따금씩 누군가의 눈물. 쿵. 쿵. 쿵. 저녁 시키실 분.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찾아오는 밥때. 쿵. 쿵. 쿵.
일상의 틈에서 마주하게 되는 현수막과 눈물과 국화들은 분명 무언가의 이상 징후다. 내가 가슴을 쿵쿵 두들기는 것과 이 징후들은 분명히 연결되어 있다. 출입이 금지된 외부인의 농성과 내부인이 흘리는 눈물은 연결되어 있다. 사회의 온갖 파열음과 내리쬐는 폭염과 북상하는 초거대 태풍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나.
나 역시 매 순간 일어나는 이 모든 엉망진창에 분명히 연결되어 있다. 너무 복잡하게 엉켜있어서 정확히 어디에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연결되어 있다. 아. 한 10년만 어렸더라면 마음 놓고 욕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이미 너무 많이, 너무 열심히 살아왔다. 그러면서 점점 깊게 관여해왔고, 앞으로도 하루가 지날 때마다 더 깊게 엉키게 될 것이다.
매일매일 열심히 살면서 조금씩 모든 것을 망치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인식. 나는 이 숨 막힐만치 팽팽하게 조여오는 그물망 속에서 소리로나마 내 위치를 찾고 싶어서 가슴을 쿵 쿵 쿵 쳤는가 보다.
창 건너편의 오피스텔 빛이 내 방에 건너오듯이 내가 가슴을 쿵 쿵 쿵 치는 소리도 건너갈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지금 나는 불을 키지 않았으므로 창 건너편에서 보면 방 안에 없는 것과 진배없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조용히 가슴을 쿵. 쿵. 쿵. 쳐본다. 아무도 보지 않는, 존재하지 않는 방 안에선 나와 내가 낸 소리의 구분은 흐려진다. 이제 나는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진동이 되어 슬쩍 창밖으로 빠져나간다.
거리엔 퇴근 후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맥줏집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대학생들을 슬쩍 흘겨봤다가 겨우 아이를 재우고 불을 켠 채 잠드는 젊은 부부를 부러움 반, 존경 반으로 바라보다 어디론가 달아나고 싶어진다. 옆 골목의 시장으로 내달아 좌판을 정리하고 있는 과일가게 아저씨와 아직도 장사를 정리할 생각이 없는 두부가게 아저씨를 지나친다. 더 깊은 골목엔 포차가 있다. 불이 켜져 있는데도 어둑한 포차 앞, 미닫이문이 막 열리고 있다. 입구에 어지럽게 들여놓은 화분 때문에 가뜩이나 좁은 입구가 더 복잡하다. 그 틈새로 술에 취한 아저씨 둘이 쏟아지듯이 나온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아저씨 둘이 손을 꼭 잡고 어깨동무도 안은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자세로 비틀대고 있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노래도 언어도 아닌 어떤 넋두리를 뱉지도 삼키지도 못한 채로. 엉켜있는 두 어른은 꼭 잡은 손을 연신 쓰다듬으며 각자의 집에 돌아가지 않고 있다.
그 앞에 멈춘다. 무언가 묻고 싶다. 하지만 질문을 확정하지 못하겠다. 뭘 어떻게 했길래 세상이 이렇나요. 당신들도 잘 모르시겠지요. 우리는 앞으로 뭘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습니까. 당신들은 늙고 지쳤으면서도 어쩜 그렇게 애틋합니까.
그러다 비틀대는 둘과 그만 부딪힌다. 나는 재빨리 팔을 벌려 그들의 몸을 지탱한다. 안은 것도 밀어내는 것도 아닌 어정쩡하게 얽힌 자세. 뜨겁고 습한 취기가 훅 전해진다. 아이고. 미안해요 젊은 친구.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몰라서 그냥 멋쩍게 웃어버렸다. 퇴근 후의 시간, 열대야의 거리를 쏘다니다 손을 꼭 붙잡고 있는 다 큰 어른들과 부딪히는 바람에, 별 수 없이 웃는다.
세상을 더 낫게 만들지도 못할 나. 끝내 나를 구원하는 데에도 실패할 나. 구원은커녕 둘 모두를 매일매일 조금씩 망쳐가며 살아갈 게 거의 확실한 나지만 이렇게 웃는 동안엔 여태 알지 못했던 아름다움을 좀 더 배워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생각들을 밤새 잘 저축해두면 내일 일하려 갈 때도 분명 도움이 되겠지. 희망은 없을 수도 있지만 아름다움은 반드시 존재한다. 퇴근 후의 시간이라면.
풀칠 150호 퇴근 후의 시간(23.08.10) 전문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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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망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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