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회에 관하여
일단은 친구가 있어야 합니다. 고양이, 폭신한 이불, 배달음식과 유튜브, 내 입안의 혀처럼 구는 간신 모드의 챗GPT 같은 존재들을 제치고, ‘그럼에도 인간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해 줄 만큼 유능한 친구가 필요하죠.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인간이 많은 영역에서 경쟁력을 잃고 있는 시대니까요.
게다가 친구는 서로가 서로에게 '되어주는' 것입니다. 그건 저도 타인의 기대에 맞춰 어느 정도의 유능함을 보여줘야 한다는 의미죠. 난 고양이보다 더 귀여울 수 있나? 유튜브보다 더 재밌을 수 있나? 이불보다 더 따뜻할 수 있나? 하나같이 자신 없는 질문들이네요.
이쯤 되면 친구라는 관계는 애초에 확률로 설명이 어려운 '연금술적'인 상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양이나 유튜브에 비해 대단한 특장점이 있는 것도 아닌 인간들이, 같은 시간에 풍덩 뛰어들면 우정이라고 부르는 희귀한 현상이 생겨난다더라 하는 오래된 소문 하나 믿고 약속을 잡아보는 거죠.
약속만 잡는다고 해서 다는 아닙니다. 송년회에 나가기 위해선 배짱도 필요합니다. 남 앞에 나를 드러낼 배짱. 그러려면 스스로를 꽤 괜찮은 사람으로 여기고 있어야 하는데 이것 또한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살아온 시간이 쌓일수록, 그에 비례해서 나와 불화하게 될 확률도 높아지니까요.
나잇살이 붙은 지금의 내 모습이 내 기억 속 나에 비해 너무 볼품없을 수도 있고, 오래전에 스스로를 실망시킨 어떤 사건 때문에 나를 아직 용서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죠. 혹은 가슴속 깊이 원하는 무언가를 이런저런 이유로 외면하느라 스스로에게 질린 상태일 수도 있고요. 이 모든 문제를 말끔하게 해결하는 건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것만큼이나 우리 우주에서는 불가능한 일일 겁니다.
사전을 들춰보니 배짱의 이렇네요. ‘조금도 굽히지 아니하고 버티어 나가는 성품이나 태도’. 시간을 돌리는 것이 불가능한 우주에서, 시간에 비례해서 쌓이는 문제를 끌어안고 사는 우리가, 시간을 보냈음을 기념하기 위해서 모인다는 건 정말로 배짱이 두둑하다고 할만하지 않나요.
기어이 송년회에 나가는 마음에게 입이 있다면, 아마 이렇게 말하고 있을 겁니다. 뭐 어쩌라고. 시간은 또 흘렀고, 나는 여전히 내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뭐 어쩌라고.
친구도 있고 배짱도 있다면, 이제 마지막 조건 하나만 더 있으면 됩니다. 여유. 당연한 얘기죠. 약속을 잡으려면 일에 휘둘리지 않는 시간도 있어야 할 테고, 돈도 있어야 하니깐요. 하지만 제 생각엔 여유의 구성 요소엔 경제적인 부분으로 환원되지 않는, 무언가가 포함되어 있는 것 같아요. 시간의 레이어를 구분 짓는 기술이라고나 할까요?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요. 12월을 단순히 달력의 맨 뒷장으로 보는 대신, 과거를 추억하고 더 나은 미래를 기원하는 구실로 삼겠다는 마음. 차갑고 무심하게 흘러가는 일상과 구분되는 '특별한 날'을 직접 만들어 내는 의미 부여. 이런 기술들 덕분에 연말은 춥고 어둑한 계절의 일부가 아니라 반짝이면서도 포근한 풍경으로 기억에 남는 건지도 모릅니다.
여기까지 쓰다 보니 송년회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군요. 친구라는 기적도 있어야 하고, 꼴 보기 싫은 나를 잠시 외면할 배짱도 필요하고, 시간을 능숙하게 다루는 기술까지 동원해야 하니까요.
인생의 초반부에는 송년회라는 게 이렇게까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고민하시는 분이 혹시 있을까 싶어 이런 얘기도 덧붙여 봅니다.
어쩌면 그냥 우리 우주가 원래 이렇게 생겨먹은 건지도 몰라요. 빅뱅 이전엔 온 우주가 작은 한 점에 옹기종기 모여있었다고 하잖아요. 그땐 별들도 서로 가깝게 지냈을 겁니다. 그러다 펑. 불가사의한 어떤 힘에 의해 시공간이 팽창했고, 자기 자리를 찾으며 몇십억 년을 떠돌다 보니 별들은 서로 시간대가 서로 시간대가 맞지 않는 별빛으로만 소통하게 된 거죠.
지금 혹시 우주의 방해를 뚫고 이 희박한 발생조건을 모두 맞춰 송년회를 앞두고 계신가요. 그건 정말 대단한 일인데요.
이제 곧 한 해 동안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거나, 상처를 주고받았더라도 여전히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 이들을 만나시겠군요. 업무 미팅과는 다르게 나를 소진시키는 게 아니라 회복시키는, 자리가 파했을 때 후련함이 아니라 아쉬움을 품게 만드는 친구들을.
어쩌면 같이 만든 시간 한 조각을 삶에 책갈피 삼아 꽂아두고, 나중에 다시 들쳐보잔 약속을 하게 될 수도 있겠고요.
아무쪼록 즐겁게 보내시길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