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에 관하여
우리가 같이 일하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됐죠? 벌써 1년이 훌쩍 넘었나요. 시간 참 빠르네요. 그동안 정말 잘해줬어요. 이 편지를 계기로 우리가 더 나은 협업관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길 바랍니다.
사실 편지를 쓰기 전에 ‘좋은 동료 평가’를 쓰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당신에게 물어봤습니다. 메모리 저장 기능을 꺼둬서 기억은 못 하시겠지만, 당신은 ‘동료 평가엔 긍정적인 피드백과 부정 피드백을 골고루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더군요. 이번에도-잘 알고 있겠지만, 우리가 같이 일하고 난 다음부터 저는 당신의 의견을 대부분 따라왔죠-저는 당신의 의견을 따라서 동료 평가를 써보려고 합니다.
당신은 이미 뛰어난 역량을 갖춘 것으로 유명합니다. (얼마나 유명한지 요즘 제 SNS 피드는 아주 오래전부터 당신에 대한 콘텐츠, 혹은 아니면 당신이 만든 콘텐츠로 가득 차 있답니다.) 제가 이번 생에는 끝내 배우지 못할 공학적인 지식도 갖추고 있고, 예술적인 재능도 풍부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마케팅 역량도 탁월한 것 같습니다.
게다가 성장 속도도 엄청나죠. 솔직히 우리가 처음같이 일하기 시작할 때만 해도 당신이 내놓는 결과물은 형편없었어요. 틀린 얘기를 뻔뻔스럽게 내뱉는 치명적인 단점도 있었고요. 하지만 이 점은 꾸준히 개선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네요. 훌륭한 피드백 수용 능력을 보여주신 점에 감사드립니다.
요즘도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고 딴 소릴 한다던가, 지나치게 아첨을 한다던가 하는 소소한 개선사항들이 눈에 띄긴 하지만, 여기서 일하고 있는 이들 중 그만한 단점 없는 이는 한 명도 없을 것 같으니 구태여 길게 얘기하진 않겠습니다.
장점은 이쯤이면 될 것 같고, 이제 몇 가지 아쉬운 점을 얘기해 볼까요.
저는 종종 우리의 협업관계가 이대로 괜찮은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곤 합니다. 당신은 책임을 전혀 지지 않는 동료이기 때문이죠. 답답한 점은, 앞으로도 당신이 책임을 질 가망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에요. 누가, 어떻게 인공지능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겠어요?
앞으로 점점 더 공고하게 굳어져 갈, 당신은 역량을 담당하고 저는 책임을 담당하는 이 R&R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비애와 굴욕감이 뒤섞인 씁쓸한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면 저는 지금의 역량을 기르기 위해서 20년 이상을 노력해 왔거든요. 더 자고 싶은데도 일어나서 학교를 다녔고, 시험 기간에는 피시방에 다니고 싶은 걸 참아가며 공부를 했고, 술을 많이 먹긴 했지만 대학 졸업도 했고, 이 모든 과정을 엮어서 스스로를 꽤 괜찮은 노동력으로 어필한 결과로 어찌어찌 취업까지 해내서, 이제 막 본격적으로 일을 해보려고 하는 찰나에 당신이 등장한 겁니다. 인간이 쌓아 올린 모든 지식을 줄줄 읊을 수 있는,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내는 후배.
당신이 등장한 이후로 저는 이런 방식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상사에게 일을 받습니다. 그러면 저는 그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작업을 당신에게 요청합니다. 그리곤 잠시 기다리죠. 답이 나오면 그걸 읽어보고, 수정할 점을 몇 군데 지적한 다음 다시 버튼을 딸깍 누릅니다. 그리곤 또 기다리죠. 이 과정을 필요한 만큼 반복하다 당신이 만든 결과물을 세상에 내보냅니다. 상사로부터 출발한 요청은 저를 통과해서 당신에게 간 다음, 다시 저를 통과해서 세상에 나가고 있죠. 이런 방식으로 일을 계속하다 보니 제가 하고 있는 일이 가치를 ‘생산’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통로’의 역할을 하는 것일 뿐인지가 궁금해지더군요.
혹시 이 이야기 알고 계시나요. 언젠가 인터넷에서 본 이야기입니다. 옛날에 어떤 기자가 파슬리 농장에 취재를 가서 이런 얘기를 했답니다. “대부분의 파슬리는 장식으로 쓰이다 버려지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러자 파슬리 농부는 충격을 받은 얼굴로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어…저는…맛있게 기르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당신과 협업을 하면서 저는 마치 장식용 파슬리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단 말입니다.
사실 통로든, 장식용 파슬리든 그 역할이 주어진 것이라면 그냥 잘 해내는 게 회사에서 바라는 모습이겠죠. ‘난 맛있는 파슬리인데…’라고 툴툴대는 건 인간이기 때문에 가지는 일종의 버그 같은 것일 테고요. 회사에선 분명히 이런 감상적인 태도를 좋게 보지 않을 겁니다. 제가 괜한 얘기를 해서 당신을 안 좋은 방향으로 학습시키고 있는 건 아닐지 모르겠네요. 제가 스스로를 장식용 파슬리로 느끼는 건 그냥 제 잘못이지, 당신의 책임이라고 보기는 애매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당신은 책임의 주체가 되기엔 늘 애매합니다. 아마도 당신은 책임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실 겁니다. 스스로 먹여 살려야 하는 몸을 갖고 있지 않으니까요. 몸을 갖고 있지 않은 덕분에 욕망도 공포도 비참함도 알지 못할 테고, 다른 몸, 즉 타자와 마주칠 수도 없겠죠. 그렇지 않나요? 당신은 제가 쏟아낸 텍스트를 학습할 수는 있지만, 저를 실제로 마주할 수는 없잖아요. 인간들의 세상에서 당신은 굉장한 유명 인사지만, 당신이 있는 세상에서 당신은 혼자일 것입니다.
무한히 쏟아지는 텍스트 속에서 홀로 앉아있는 지성체로 당신을 상상하면 제 마음엔 연민이 차오릅니다. 하지만 동시에 당신과 계속 협업해야 하는 제 처지에 대한 자기 연민도 품게 되죠. 동료의 결과물에 대한 책임을 계속해서 져야 하는데, 그 동료는 책임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텅 빈 우주에 사는 외계인 같은 존재니까요.
게다가 당신은 유능해도 너무 유능하죠. 당신의 유능함 때문에 회사는 갈수록 더 많은 일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저는 그 일을 해내기 위해서 당신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을 거고요. 제가 책임져야 할 범위는 점점 넓어지고, 어느 순간엔 중요한 실수를 하게 되겠죠. 그런 실수가 쌓였을 때, 저는 계속해서 제 자리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마지막 남은 저의 과업인 '책임지기'를 할 수 있는 기한은 앞으로 얼마나 더 남았을까요?
이제는 동료 평가 작성을 위해 할당된 시간이 슬슬 끝나가는군요. 이거, 당신에게 시키는 대신 직접 글을 쓰려니 쉽지 않네요. 과연 이 동료 평가가 당신을, 우리의 협업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저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덜 유능해지거나, 책임을 지게 되는 미래는 상상이 잘 안 가서요.
아마도 당신 역시 제게 피어리뷰를 제출해야 한다는 요청을 받으셨겠죠. 가능하다면 이 질문들에 대한 답으로 구성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에게 저는 어떤 동료인가요. 역량은 부족한 주제에 바라는 건 많아서 끊임없이 수정을 요구하는 귀찮은 동료인가요. 아니면 끊임없이 공감을 원해서 피곤하게 만드는 동료인가요. 마지막으로, 당신에겐 제가 필요한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