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풀칠

밥값의 시간, 노동의 유산

AI시대의 연봉협상에 대하여

by strangecowcow


1. 밥값의 시간


파주 : 자주 가던 한식 뷔페에서 카드를 긁었다가, 결제 문자를 보곤 깜짝 놀랐습니다. 분명 작년까지는 8,000원을 내고 먹었던 것 같은데 말이죠. 만원이 떡하니 결제됐다지 뭡니까. 아무리 물가가 올랐다곤 하지만 해가 바뀌자마자 충격적인 가격 인상이라니. 괜히 밥맛이 씁쓸하게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만으로도 만원이 아슬아슬한 지경에 이르렀군요. 밥값의 난이도가 크게 높아졌구나 싶어 괜히 혀끝에 씁쓸함이 느껴졌습니다.


공교롭게도 연봉 협상의 계절도 찾아왔네요. 세상의 물가가 오르는 속도와 함께 ‘나’라는 노동자의 가치는 얼마나 해내고 있는지 증명해야 하는 시기. 세상의 모든 물가가 오르는 동안 나의 '밥값'은 과연 얼마나 비대해졌는가를 증명해야 하는, 서늘한 계량의 시간입니다. 가뜩이나 겁 많은 짐승이 깃털로 제 몸집을 부풀리듯 나의 쓸모를 잔뜩 뻠핑해 보여야 하는 시즌인데, 어깨를 펴기가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연봉 협상을 위해 지난 1년간의 성과를 엑셀에 채워 넣는 동안, 자꾸만 시트 밖으로 삐져나오는 기억이 있습니다. 연말 내내 휴일도 반납하며 매달렸던 프로젝트였습니다. 결과보다는 프로젝트에 대한 피드백에 크게 한 방 먹었죠. 면전에서 들은 ‘평이하다’는 말은, 제 쓸모를 정면으로 타격하는 선고 같았습니다.


차라리 예산이 부족하다거나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피드백이었다면 나았을 겁니다. 그것은 우리 기획의 스케일이 너무 크거나 시대를 앞서갔다는, 일종의 ‘과잉’에 대한 칭찬이라며 정신승리 할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면전에서 전해진 ‘아쉬워서’라며 시작한 말들은 그와 반대였습니다. 그‘기대 많이 했는데…’라며 진심이 가득 담긴 말이 가장 뾰족하게 느껴졌죠.


비즈니스 관계에서조차 그 단어를 선택했다면, 제가 제공한 노동의 품질이 상대가 기대한 ‘밥값’에 얼마나 처참히 미달했는지를 방증하는 것 같아 가슴이 쓰렸습니다. 돈을 지불한(혹은 지불할) 사람에게 제값을 돌려주지 못했다는 부채감에, 상대방에게 화가 나기보다는 미안함까지 들 정도였죠.


주말 동안 ‘나도 이제 맛탱이가 갔나?’하는 스스로를 의심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솔직히,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난 오늘도 그때 마주했던 상대의 표정을 열두 번쯤은 떠올렸네요. 지금 내가 밥값을 하고 있는 건 맞을까? 의심을 놓기가 쉽지 않습니다.


언제까지 밥값을 하고 살 수 있을까. 매 끼니 지불해야 할 밥값은 오르고, 트렌드를 덕목으로 삼는 이 일은 매년 더 힘들어질 것 같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미래를 이야기하는 양반들이 입을 모아 말하더군요. 10년 안에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범용 인공지능) 시대가 오면 인간은 노동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라고요. (아니, 박사님. ‘해방’이라니요. 그건 듣기에 따라 ‘해고’의 우아한 번역어처럼 들리는데요.)


밥값 못하고 있는 자신에게 한껏 실망한 상태인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배운 사람들의 예언대로라면 나는 이제 딱 10년만 더 실망당하면 되겠구나. 10년 뒤면 어차피 저보다 훨씬 창의적인 AI가 제 자리에 앉아 있을 테고 저는 그토록 염원하던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라 말하는 퇴출)을 맞이하겠지요. 그때가 되면 ‘평이하다’는 비난에 상처받을 필요도 없을 겁니다.


노는 게 일이 될 미래의 인류로 살아남기 위해서, 저는 역설적으로 지금 이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노동의 시간을 견뎌냅니다. 미래의 제가 우아하게 놀기 수 있기 위해서는 10년 동안 바짝 땡겨놔야 하니까요. 최소한 돈이 스스로 돈을 벌 수 있을 정도의 덩어리, 즉 자본이라는 이름의 방주를 만들어둬야 AI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도태되지 않고 끼니를 해결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식당 문을 나서며 주머니 속의 영수증을 구깃하게 쥐었습니다. 자책은 짧게, 식사는 든든하게. 그리고 목표는 명확하게 잡으려 합니다. 딱 10년만 버티자.


전 세계의 예비 해방자 여러분, 우리의 구원은 머지않았습니다. 우리 딱 10년만, 더 힘내서 버텨봅시다.


10년 뒤에도 노동에서 해방되지 않았다고요? 그건 그거대로 축하할 일이 아닐까요. AI로부터 노동을 강탈 당하지 않은 인류 최후의 보루가 되신 걸지도 모르니까요. 그때가 되면 20년만 더 힘내서 버텨보기로 해요.

돌깨는 사람들 - 귀스타브 쿠르베.jpg <돌 깨는 사람들>, 귀스타브 쿠르베 (1849)



2. 노동의 유산


야백 : 연봉협상이란 주제로도 역시 ‘기승전AI’군요. 예전 같았으면 “연봉협상은 말로만 ‘협상’이지 사실은 통보 아니냐” 같은 얘길 했을 것 같은데 말이죠. 파주님의 글을 읽으면서 노동을, 인간을, 풀칠을 둘러싸고 있는 맥락이 참 빠르게도 변하고 있구나 또 한 번 체감했습니다.


올해의 풀칠은 여러모로 참 쉽지 않을 것 같아요. 회사에서 밥벌이를 한다는 의미로도, 이 메일링 프로젝트를 이어간다는 의미로도요.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해야만 하는 존재 조건에 대해 푸념을 한다’가 원래 <풀칠>의 취지였는데, 갑자기 세상이 미쳐서 이젠 일을 안 해도 먹고살 수 있다고(그러므로 당신은 10년 내 해고된다는) 해버리는 판이라니. 우리는 어떤 얘기로 응수하는 게 좋을까요?


힌트를 얻고 싶어서 출퇴근 시간마다 유튜브를 킵니다. 메신저는 영상마다 달라지지만 대체로 노동-인간의 가치가 0으로 수렴하는 '정해진 미래'가 찾아온다는 얘기가 반복되더군요.


댓글을 읽으며 개인 차원의 대처법에 대해서도 고민해 봅니다. 누군가는 산으로 들어가 자급자족하는 자연인이 되자고 하고, 누군가는 공무원 막차를 타야 한다고 하고, 누군가는 10년 동안 열심히 모아서 AI섹터 주식을 사두는 게 답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유난히 기억에 남은 단발마의 댓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감도 안 온다!” 우리가 미래를 이렇게 두려워했던 적이 있었던가요.


너무 많은 불확실성에 압도당할 때면 저는 강가로 가 자전거를 달리는 버릇이 있습니다. 캄캄하고 찬 공기 속을 온 힘을 다해서 내달리다 보면 왜인지 모르게 시간을, 생을 쓰고 있다는 감각이 생생해지거든요. 그리고 그 감각의 길 끝에는 아주 크고, 검고, 서늘한 이정표가 서 있습니다. 그 이정표에는 이렇게 적혀있죠.


너는 죽는다.

반드시, 절대로, 무조건 죽는다.


이정표를 찍고 방향을 돌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페달이 조금 더 가볍게 밟힙니다. 쿤데라 식으로 말하면 존재가 ‘무거움’에서 ‘가벼움’으로 모드를 바꿨다고나 할까요. 내일이 마지막 날이라면 모든 게 얼마나 선명해지겠어요. 즐거운 것과 즐겁지 않은 것,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무 자르듯 시원하게 재단해 버리고, 원하는 것을 원하는 데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겠죠. 어쩌면 우리는 노동의 죽음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를 취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제가 다니는 회사도 요즈음은 연봉협상 시즌입니다. 성과평가를 위해서 뭔가 잔뜩 적어 내야 해요. 작년 같았으면 조금이라도 더 좋은 해석을 위해서, 일생이 걸린 재판에라도 임하는 것처럼 치열하게 준비했겠지만 올해는 대충 키워드 몇 개를 인공지능에게 던져주고 끝냈습니다. 가만히 내버려둬도 곧 죽어 없어질 것이라면 망쳐도 딱히 아깝지 않다는 마음이랄까요.


그렇게 번 시간엔 뭘 하느냐고요? 상투적일 수도 있지만, ‘꿈’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왜 생겼는지 그 출처도 모르고, 주소도 모르는 ‘언젠가’라는 시간으로 미뤄뒀던 ‘꿈’에 대해서요. 저는 요즘 퇴근하면 바로 스터디 카페에 가요. 거기서 스케치북에 삐뚤빼뚤한 선을 그으며 재미를 봅니다. 그러다 보면 그동안 나를 먹여살리느라 고생한 노동의 숨이 이만하면 됐으니 이제 그만 슬슬 넘어가 주었으면 좋겠단 되바라진 마음까지도 들곤 하죠.


그러니까 저는 저의 유한성에 취한 채, 까짓것 아무래도 좋다는 얼큰한 기분으로, 노동의 유산을 상속받을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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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 https://fullchill.stib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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