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득이하게 자리를 비워야 했던 순간에 관하여
그 일을 듣자마자, 나는 업무용 메신저를 켰다. 이럴 정신이 남아있단 게 역겹다고 느끼며.
개인 사정으로 2주간 자리를 비우게 되었습니다. 바쁜 시기에 장기간 자리를 비우게 되어 면목 없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개인 사정, 면목, 배려 같은 단어들을 일견 뭉툭하지만 업무용 메신저에 올려두면 굉장히 무시무시해 보인다. 불행의 그림자를 어른거려 질문을 차단하고 말미를 얻어내기. 이건 영혼을 혹사시키는 노동이다. 회사를 다니다 보면 겪게 되는 일이기에 노동이고, 능숙하게 해낼수록 환멸을 느끼게 된다는 점에서 영혼의 혹사다.
회사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이건 윤리보단 TPO의 문제다. 회사는 개인사로 심려를 끼쳐도 좋은 그런 공간이 아니라는 게 현대의 내규다. 회사. 환하고, 열정적이고, 성장을 위한 공간. 그런 공간에 불행을 흩뿌리는 건 실수고, 실수가 쌓이면 신용을 잃는다. 얻어낸 말미 동안 불행을 토해내지 않고 소화시켜야만 한다. 택시 안에서 ‘개인 사정으로…’로 시작되는 문자들을 전송하느라 바빴다.
응급실은 참 이상한 장소다. 개인사를 겪는 사람들과, 그네들의 개인사가 곧 일인 직장인들이 한데 모여 밤도 없이 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곳이다. 내밀한 개인사를 털어놓기엔 너무 환하고, 시끄럽고, 부산스럽지만 그럼에도 털어 놓아야 하는 곳. 그렇게 털어놓은 개인사는 살균처리된 의학용어로 번역되어 돌아오는 곳. 제 몸의 통제력을 상실한 사람들이 누워있고, 개인사를 번역해 차트에 기록하는 사람들로 분주한 여기에, 불행의 당사자가 아니면서도 사랑을 연유로 초대당한 이들은 어떤 TPO를 따라야 하나.
불쑥 어떤 손이 휴지를 뭉텅이로 건넨다. 내가 지금 울고 있나? 누가 휴지를 건네 준 거지? 이런 곳에서? 아까 전에 택시에서 불행을 흘리진 않겠노라며 다짐했던 게 무색해진다. 낯선 손이 건네준 휴지에 얼굴을 묻는다. 숫자로 번역되지 않는 개인사를 쏟아낸다.
시간은 모든 것을 뭉툭하게 만든다. 그게 속절없음에 대한 보상이라도 되는 양. 제아무리 뾰족한 불행도 시간을 쐬면 깎여나가고 만다. 그렇게 일단 개인사로 얼버무린 불행은, 회사로 돌아갈 때쯤이면 정말로 그저 개인사가 된다.
내일은 다시 출근하기로 한 날이다. 내 몫의 일을 해내느라 고생했을 팀원들에게 문자를 보낸다. 배려해 주신 덕분에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정말로 '충분한 시간' 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그렇게 쓴다. 시간에 ‘충분’이라는 형용사가 붙는 게 애당초 가당키나 한가. 시간이라는 발명품은 애초에 ‘충분’을 염두에 두고 디자인되지 않았다. 야속해 할 일도 아니다.
아직도 밤은 한참 남아서 뭘 할까 하다가 청소를 하기로 한다. 방을 그리 오래 비운 것도 아닌데 돌보지 않은 티가 난다. 바닥이나 좀 쓸 요량이었는데 아예 온 방을 뒤집어엎었다. 마대자루를 벌려두고 주제넘게 갖고 있던 물건들을 내버린다. 한 시절이 끝나면 그 시절의 나를 구성하던 물건들도 더는 못쓰게 되는 법이니까. 아마 내일 회사에 가면 스몰토크로 방을 치웠다는 이야길 하게 될 것 같다.
물건을 내버린 덕에 공간이 생겼다. 방 안에 생긴 공터에 요가 매트를 펴고 눕는다. 몸에 익은 대로 사지를 움직인다. 오래 청소를 해두지 않아 발이 시커메진다. 마지막 동작은 사바 아사나, 송장 자세다. 드러누워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인다. 사각사각사각. 배수로 어디쯤에 벌레가 기어 다니나 보다. 웅웅웅웅. 어느 칸에선가 빨래를 돌리나 보다. 타박타박. 배달원이 계단을 오르나 보다. 귀에 다녀간 모든 생명들을 붙잡고 묻고 싶다. 다들 어떤 개인사로 먹고 자고 빨래하고 일하며 지내느냐고.
핸드폰이 반짝거리는 기척에 눈을 뜬다. 회사 사람들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에 답장이 왔다. 하나같이 따뜻한 위로와 격정과 환대의 말들이다.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어떤 종류의 우정을 생각한다. 개인사를 투척하진 않지만 뉘앙스는 전달해야만 하는, 유관한 사이에서 발생하는 우정을.
이 우정은 밤을 채우진 못하겠지만 낮을 지탱하기엔 충분할 것이다.
일어나서 방을 한 바퀴 둘러본다. 볕도 잘 들지 않는 방이지만 식물들은 죽지 않고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