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풀칠

신용을 신용조회하기

신용에 관하여

by strangecowcow

1

회사를 다니면서 배운 게 하나 있다면, 세상사의 거의 모든 것은 신용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지각을 하면 신용이 깎인다. 반대로 일찍 출근해서 책을 읽고 있으면 신용이 쌓인다. 실수를 하면 신용이 깎인다. 일을 잘 해내면 신용이 쌓인다.


신용이 쌓이면 일 하기에 여러모로 편리하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메시지보단 메신저다. 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개소리가 될 수도 있고 솔루션이 될 수도 있다. 커리어, 나아가 인생의 난이도는 신용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가 나서서 점수를 매기고 있는 건 아니지만, 신용은 결국엔 내 행동의 결과물이다. 나의 모든 행동이 알게 모르게 쌓여서 결국엔 내 인생의 난이도를 결정짓는다고 생각하면 영 께름칙하지만, 유사 이래 인간이 서로를 평가하지 않았던 적이 단 1초라도 있던가. 물이 고이면 호수가 생기듯 사람이 모이는 곳엔 신용이 생겨나는 법. 수증기가 구름이 되고 구름은 다시 비가 되는 물의 순환 시스템으로 세상이 돌아가듯 인간사는 신용으로 굴러간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신용, 신용, 신용.


2

물론 나도 한때는 신용 까짓 게 다 뭐냐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의 난 회사에 다니면 젊음이 끝장나는 것처럼 유난을 떨며 로빈슨 크루소를 롤모델로, 자립을 좌우명으로, 목표를 행복으로 잡고 야망을 밑천 삼아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젊음을 끝장내는 건 고용 여부가 아니라 시간이었고, 자립을 가능케하는 건 시간이 아니라 돈이었다.


몇 번의 퇴사와 이직을 거치고 삼십 줄에 접어들기 일보 직전인 지금은 자립이 곧 자유가 아니란 것도, 자유가 곧 행복이 아니란 것도 안다. 적당히 만족하며 회사를 다니는 법도 배웠다. 가끔씩 뭔가를 놓쳤다는 감각도 들지만 그런 감각쯤이야 사람으로 꽉 찬 지하철이나 늦은 밤 택시 안에서라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감정 아닌가. 실체도 없는 노스탤지어에 휘둘리기엔 월말마다 통장에 꽂히는 숫자가 주는 효용이 훨씬 더 생생하다

이제 나에게 중요한 건 신용이다. 요즘 내 관심은 어떻게 하면 지금 이 자리에서 신용을 잘 챙겨서 조금 더 사람구실-차도 끌고, 좀 더 살만한 방으로 이사도 하고-을 해내느냐, 그것뿐이다.


계속 신용 얘길 해서 말인데, 마침 지난달엔 신용카드도 하나 만들었다. 신용카드를 배송받자마자 곧장 한 달 월급보다 비싼 노트북을 사러 갔다. 품에 그 근사한 박스를 꼭 안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생각했다. 할부란 얼마나 위대한 발명품인가. 버는 돈보다 쓰는 돈이 많을 수 있다니, 이거야말로 현대판 오병이어의 기적 아닌가. 아직도 자립을 쫓고 있었다면 꿈도 꾸지 못했을 호사다.


새 노트북 덕분에 나는 부채도 자산이란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신용은 나를 실제의 나보다 더 대단한 무언가로 만들어준다. 신용 덕분에 내 업무 능력보다 과대평가받기도 하고, 신용 덕분에 남의 손을 빌려 혼자서는 해낼 수 없는 일을 해내기도 한다. 비싼 노트북도 사고 택시도 타고 종종 호캉스도 간다. 수입보다 지출이 커졌으니 일은 계속 하는데 실제론 더 가난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깐은 들었지만 카드값을 성실히 갚기만 하면 신용점수도 오르니 이 또한 결국엔 좋은 일일 것이다.



3

오늘은 팀에 신입이 한 명 들어왔다. 일도 일찍 끝났겠다, 환영회 명목으로 팀원들이랑 다 같이 맥주를 먹으러 갔다. 신입은 내 앞에 앉았다. 그는 여기가 첫 번째 직장이다. 어색함을 피하려고 되는 대로 아무 말이나 내뱉다가 새로 산 노트북 얘길 했다. 노트북 얘길 하다가 신용카드 얘기도 했다. 멋없는 소린 걸 잘 알지만 조금씩 신용카드 실적을 채워두면 도움이 된다는, 이전에 누군가에게 들었던 얘길 그대로 했다. 또 무슨 얘길 했더라, 아 면접 볼 때 무슨 얘길 했냐고도 물었다. 신입은 다른 건 잘 기억나지 않는데 마지막 꿈을 물어보는 질문 하나만큼은 기억에 남았단다. 허튼소리만 잔뜩 한 것 같은데 붙어서 신기하단다.


“뭐라고 했는데요”


“일단은 제 할 일 잘 하고, 회사를 성공시키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하긴 했는데, 제 마지막 꿈은 어디 무인도 같은데 가서 책 쓰는 거라고 했어요.”


“책이요?”


“네. 제가 문창과 나왔거든요. 마케팅도 이것저것 글 쓸일 있으니까 통하긴 하겠지만, 결국 마지막에 저를 구원할 건 제가 쓸 이야기라고 믿는다, 뭐 그런 얘기였는데 붙어서 신기해요”


신입이 뺨을 붉히며 말했다. 나는 어느 열대의 해변 그늘가에 누워 공책에 뭔가를 끄적이는 신입의 모습을 상상하다 왠지 그 꿈은 반드시 이뤄질 것 같단 생각을 했다. 신입도 자신의 마지막 해변을 상상하고 있는지 눈이 반짝인다. 어찌나 눈이 반짝거리는 지 이미 꿈을 이룬 사람처럼 보인다. 아직 첫 월급도 받기 전인, 심지어 회사 사람들에게 제대로 자기소개도 하기 전인, 신용이라곤 하나도 없는 신입인데도 나는 그가 나보다 훨씬 부자라고 느꼈다.


자리는 곧 파했고, 계산은 내가 했다. 월말이라 통장에 잔고가 없었기 때문이다. 신용카드로 긁고 이참에 현금을 좀 받아둘 생각이었다. 계좌를 찍기가 무섭게 다들 돈을 부친다. 신입도 금방 돈을 보내줬다. 택시 안에서 바지런히 버튼을 눌러대며 수금을 하다가, 문득 다들 어떤 믿음을 얼마만큼 쌓아두고 지내고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나는, 통장 잔고라고는 그네들이 보내준 게 전부인 나는 지금 어떤 믿음을 갖고 있나.

내겐 오직 신용 뿐이다. 카드값 내는 날이 오면 통장을 탈탈 털어가는 신용. 결국엔 남의 평가인 신용. 여기에 나의 구원을 걸어도 괜찮은 걸까. 술에 취했고 멀미도 나지만 이 문제를 좀 생각해 봐야겠다 싶었다. 통장에 잔고를 조금이나마 채운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이런 생각을 한단 말인가.


택시는 벌써 한강을 건너고 있다. 차창 너머로 섬이 보인다. 서울 한복판에도 사람이 살지 않는 부동산이 있긴 있네. 나도 섬을 가질 수 있을까.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는 어떤 그림을 기억해내려 애쓰는 동안 택시는 금세 강을 다 건넜다. 택시는 머지않아 나를 내일로 데려다놓을 것이다. 그 전에 어떻게든 신용과 연관 없는 믿음 하나만큼은 꼭 찾아내고 말겠다 다짐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택시에서 내리면 신용카드 캐시백 앱 푸쉬가 오겠지만, 적어도 그전까진 신용에 대한 신용조회를 해볼 수 있을 것이다.(2022.12.)

신용.jp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타성 유람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