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과 일리아스와 새

방에는 하루를 마친 사물들이 놓여있다.

by strangecowcow

1

내가 나였는지를 잊게 만드는 피로. 수요일 밤. 불 꺼진 방에서 이불 속에 혼자 들어앉아 있을 때, 누구의 시선도 받고 있지 않을 때, 과연 나는 존재하는가. 침침한 눈으로 들어오는 핸드폰 스크린의 파란 불빛. 창문 밖으로 어렴풋이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 커버를 씌우지 않아서 거칠거칠한 매트리스의 질감. 이 모든 게 현실이 아닐 수도 있겠단 생각을, 더 정확히는 현실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 생각하지 않는다. 이리저리 산책하던 생각은 그만 잠에 걸려 넘어진 걸까? 피로는 현실의 외곽선을 흐리게 만든다. 세상을 논리적이지 않게 만든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 갈라진 길 양쪽에 두 개의 숲이 있다. 한 쪽 숲은 내가 가고 싶다고 생각한 숲이다. 새들이 시를 쓰고 꽃이 술을 마시는 곳. 다른 한쪽의 숲은 보통의 숲이다. 이 숲은 재료가 된다. 종이의 재료, 의자의 재료, 휴지의 재료-. 이쪽 숲에선 재밌는 일이 일어나진 않지만, 무언가가 만들어지고, 사람들은 그 덕에 먹고 산다. 두 숲 아래엔 두 개의 호수. 반사할 달이 없으면 호수는 문을 닫는다. 호수 아래로는 바람 부는 산맥이 있고 그 아래엔 또 다른 호수. 마찬가지로 문이 닫혀있다. 어디로도 향하지 않는 물이 그 안에서 썩어들어가고 있다.


잠결인데도 내 입 냄새가 지독하다는 것을 알겠다. 하루 종일 너무 많은 말을 하고 많은 음식을 먹었다.



2

많은 말들. 오늘 나와 말을 주고받은 사람들의 리스트는 아래와 같다.


기자 1. 그녀는 사회 초년생이다.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이 첫 직장이다. 그녀는 붙임성이 좋다. 그녀는 불편한 질문을 한다.


홍보 대행사의 직원 1. 그녀는 베테랑이다. 그녀는 말이 아주 빠르다. 그녀는 남의 말을 끊고 고이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 그녀는 기자 1에 대해서 내게 조심하라고 말한다. 기자들은 다 능구렁이라며. 그녀는 말이 아주 많다. 나와 논의해야 할 일이 아주 많다고 한다.


동료들 1,2,3…. 그들은 내게 무언가를 원한다. 피드백을 원하고, 인정을 원하고, 면책을 원하고, 커피를 사주길 원하고, 때로는 자기에게 신경 쓰지 않기를 원한다. 그들이 원하는 말을 내가 해 줄 수 있는 행운은 흔치 않다. 말을 많이 해야 하는 날엔 더더욱 흔치 않다. 이 모든 사람들게 던진 말뭉치들은 모두 같은 소제목을 갖고 있다.


<제 책임 범위 내에서>.


그리고 마지막 문장도 통일.


<이렇게 하는 게 제 일입니다.>



3

드디어 애인이 돌아왔다. 우리는 꽤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나는 애인의 겉옷이 바닥에 스르륵 내려앉는 소릴 듣는다. 애인의 손을, 체온을 느낀다. 차갑다. 차가운 손가락이 산맥을, 호수를, 숲을 건드린다. 그 애가 내게 말을 건다. 늦게 들어온 사람이 먼저 퇴근해 있던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건 우리의 전통이다.


-자고 있었어?

-응? 응. 아니.


애인은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말한다. 애인의 이야기엔 내 이야기와 비슷한 등장인물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은 다르다. 애인은 얘기의 마침표를 늘 눈물로 찍는다.


-괜찮아. 별일 아니야.

-정말 이래도. 돈 물어줘야 하는 일 아니면 큰일 아니야.

-응, 정말.


손끝에 눈물을 묻혀서 애인의 손에 동그라미를 그리는 동안 애인의 이야기가 끝난다. 애인은 자기 이야기를 마치면 언제나 조금은 쾌활해지고, 내게 질문들을 던진다. 아니, 사실 질문이 아니다. 애인은 새다. 내가 늘 가고 싶었던 숲을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지저귄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어?

-오늘도 출근하다 다람쥐 봤어?

-커피는 몇 잔 마셨어?

-크레파스는 왜 정리를 안 했어?


그러다 마침내, 진짜로, 답을 요구하는 질문을 던진다.

-이건 무슨 책이야? 무슨 얘기가 들어있어?


이제는 내가 이 질문을 받아서 애인을 즐겁게 해 주어야 한다.



4

다시 꿈에 빠져들지 않게 조심하며 말을 고른다.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 시몬 베유 지음. 시몬 베유는 실제로 살았던 사람의 이름이다. 그녀는 우리 비슷한 또래다. 그녀는 일찍 죽었으므로, 우리는 곧 그녀의 나이를 추월해 갈 것이다. 그녀는 허리가 굽었다고 한다. 우리도 사무실에 오래 앉아있느라 약간 허리가 굽었다. 그녀는 아주 강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노동에 대해 얘기하는데 그친 게 아니라, 정말로 노동자가 되어 공장에서 일했다고. 1년, 2년 정도? 일한 경력으로 치면 우리가 훨씬 길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잠을 뿌리칠 만큼 흥미로운 것은 아니다. 애인은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시몬 베유라는 낯선 여자에 관해서 우리 침대에서 길게 이야기하기엔 적당하지 않다. 차라리 일리아스 얘기를 해볼까.


일리아스는 우리 둘 다 잘 안다. 그리스 로마 신화 만화책을 읽으면서 자랐기 때문이다. 몸매가 좋은 신들이 등장하는-좀 야한 그림이 있는 페이지는 너덜너덜해진-시대의 히트작. 덕분에 우린 아킬레우스, 헥토르, 헬레나, 파리스 같은 이들과 안면을 트게 됐다. 우리는 또 브래드 피트가 아킬레우스 역할을 한 영화도 꽤 재밌게 봤었다. 그래, 일리아스 얘기를 해주자.


-그리스 로마 신화 알지. 트로이 전쟁. 악성코드 같은 목마.

-응.

-그 얘기 해설서야.

-재밌어?


재미라. 아니다. 재미는 없다.

하지만 책에는 만화책엔 실리지 않은, 처음 보는 장면도 실려있다.


-어렸을 때 아킬레우스한테 노예로 잡혀서 팔린 사람이 나와.

-헉

-10년 넘게 고생하다가, 몸값의 3배를 주고 풀려나서 겨우겨우 트로이로 돌아왔나 봐.

-와, 잘 됐네.

-근데 트로이로 돌아온 지 12일 만에 전쟁이 터진 거야. 그래서 다시 싸우러 나왔고, 아킬레우스한테 또 잡혔어.

-어떡해...

-그래서 그 사람은 아킬레우스한테 빌었어. 나를 불쌍히 여기세요. 나를 존중하세요. 엄마 얘기까지 하면서 빌어. 내 어머니가 나를 단명하게 낳았나 보군요. 그랬더니 아킬레우스가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

-브래드 피트가 뭐라고 했는데?

-"너도 또한 죽어라, 친구. 왜 그다지도 한탄하는가?"

-헐... 그래서 죽어?

-응, 죽어.


시몬 베유는 일리아스를 '힘의 시'로 해석했다. 힘이 작동할 때, 그 힘에 관계된 사람들은 사물이 된다. 극단적으로 작동한 힘은 사람을 문자 그대로 사물-시체-로 만들어 버린다. 일리아스는 힘이 작동할 때 사람이 어떻게 사물이 되는가를 계속해서 보여주는 드라마다. 누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었습니다. 또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었습니다. 전쟁은 힘의 제국의 심장부다. 전쟁은 아직도, 지금도다.


나도 또한 어느 정도는 사물이다. 아침에는 지하철에 실려가는 '리소스'이며, 낮에는 기계와 경쟁하는 기계가 되고, 저녁엔 매트리스의 기능을 수행한다. 애인은 이제 내게 몸을 바싹 붙인다. 애인의 다리가 내 몸 위에 놓인다. 나는 전쟁이 터지고, 폭탄에 학교가 무너지는 힘의 제국에 산다. 그 제국의 영토 어딘가에는 크레파스가 널브러진 방이 있고, 그 방에는 하루를 마친 사물들이 놓여있다.


-그런데, 그 사람 이름이 뭐야?

-응?

-그 죽은 사람. 이름.

-모르겠네. 이름이 분명 나왔었는데. 기억이 안 나.


프랑스의 사상가 시몬 베유. 아킬레스건이 약했던 아킬레우스. 아킬레우스가 사랑했던 파트로클레스. 아킬레우스가 시체로 만든 다음 전차에 매달고 다녔던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 자기 아들을 죽인 살인자의 손에, 시체를 돌려받기 위해 입을 맞춘 트로이의 군주 프리아모스. 헬레네와 바람난 파리스. 전쟁의 원인이 된 파리스. 헬레네의 남편이었던 위대한 전사 메넬라오스는 파리스를 죽이려고 했고, 헥토르는 파리스를 위해 메넬라오스를 죽였다. 오만한 왕 아가멤논. 꾀가 많은 오딧세우스. 이들의 이름은 이렇게 선명한데, 우리가 오늘 얘기한 그 사람의 이름은 왜 떠오르지가 않을까?


-너무해. 이름도 기억 안 해주고.

-그러게. 미안해.

-양치하고 자.



5

거울에는 양치를 하고 있는 사람이 비친다. 숱이 많은 눈썹이 보인다. 두 개의 숲 아래엔 두 개의 눈. 수정체 너머로 상상을 담당하는 뇌와 연산을 담당하는 뇌가 작동하고 있다. 코로는 공기를 들이마시고, 입속에선 칫솔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원래의 형체를 짐작하기 어려워진 찌꺼기들을 발라내고 있다. 그는 물로 입을 헹궈낸다. 세면대에 흩뿌려지는 고기의 파편들.


애인은 그새 잠들어 있다. 이불 속에 파묻힌 새를 깨우지 않도록 조심조심 침대에 앉는다. “나를 불쌍히 여기세요. 나를 존중하세요.” 여전히 아킬레우스에게 목숨을 애원했던 이의 이름은 아직도 떠오르지 않는다. 책은 바로 저기 있다. 전등을 켜고 책을 펼치면 그 이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새를 깨우게 될 텐데. 책을 탁상에 올려두며 속삭인다.


-정말 미안하지만, 피차 비슷한 처지끼리 이러면 안 된다는 것 알지만, 하루만 더 망각의 지옥에 머물러 줘요.


빛이 새어들어오지 않도록 방문을 닫고, 매트리스의 빈 공간에 몸을 맞추고, 애인이 내어준 몸의 면에 내 몸을 가져다 대며 잠의 신이 찾아오길 기다린다.


사물보다는 동물에 더 가까워도 괜찮은 이 시간, 아직 힘의 제국이 징수하지 않은 시간을 끌어안고 도처에 깔린 어둠을 바라본다. 어느 날 갑자기 죽어버리면 어떡하지. 그럼 안 되는데. 나의 새는 슬픈 꿈을 꾸는 것 같다. 씻지도 못하고 잠든 애인에게 몸을 조금 더 바싹 붙이고, 체온이 대신 전해주길 바라며 밤인사를 남긴다.


-잘 자. 내일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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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 시몬 베유 저/이종영 역


퇴근과 출근 사이에 놓여있는, 직장인이 아니어도 되는 시간.


겨우 돌아온 방에서 혼란한 세상을 바라볼 때

풀칠러님은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오늘의 이야기는 밤의 단상들을 이어붙여서 지어보았습니다.

읽는 마음을 내어주셔서 고맙습니다.


source : https://fullchill.stibee.com/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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