닌자의 서

by strangecowcow

1

초록 괴물이 죽었다.

중학교 때 피시방을 같이 다니던

힘도 쎄고, 아는 형도 많고, 잘 노는 그런 애였다.


초록괴물이랑 친한 친구들은 난리가 났다.

낮에는 엎드려서 자고, 밤에는 뭘 하는지 잘 모르겠는-한 성깔 하는 애들.


그 애들과 그 애들의 담임은

초록괴물의 장례식 참석 건에 관하여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다.

누군가 교무실에서 쓰레기통을 던졌다.

내 친구 죽었다고 씨발놈들아.


그날 점심 나는 담임에게 말했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서 오늘 저녁에 입시 설명회를 합니다.

4시에 마치면 KTX 타고 다녀오고 싶어요.

담임은 그러라고 했다.

이런 이유라면 얼마든지.


양아치 똥통 학교의

서울대반 남자애는

그날 처음으로 보충 야자를 째고

혼자 서울로 간다.

검표도 안 하는 기차에 앉아

너무나 스무스하게


서울엔 도대체

뭐가 있길래?


그놈의 입시 설명회엔 가지 않았다.

대신 어떤 다리 밑에 가서

저 끝에서 밀려오는 강물,

서울을 노려보며

풀리지 않는 궁금증들을

입안에서 굴린다.


왜 어떤 허락은 쉽고

어떤 허락은 어려운가

왜 나는

걔들과도 친하고

선생과도 친한가

왜 키가 일찍 자랐지

왜 공부가 쉽지

아, 시시하다


초록괴물은 왼손 팔씨름을 잘했고,

담배는 에쎄를 폈었고,

피파 온라인 팀은 바이에른 뮌헨이었으며,

여자애들한테는 인기가 별로 없었다.



2

첫 번째 도망 다음 십 년.


초록 괴물 덕분에

서울이 시시하단 것을 일찍 배운 덕분인지

아니면 그냥 어떤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인지

나는 꽤 잘 지냈다.


진짜로 내가 잘 지냈는지 어쨌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고,

미디어 기준으로 보면 나쁘지 않다는 의미다.


한번은

사회 초년생이 입기엔 좀 비싼 정장을 입고

신분증 목걸이를 딱 차고

여의도의 큰 건물에서 하는 행사에 갔다.


대기실 한 쪽 구석에는

올백머리로 머리를 묶고

몸에 딱 달라붙는 스커트를 입은

또래 여자애들이 도시락을 까먹고 있었고

그 방 끝에서 나는

나는 뭐 중요한 일이라도 하는 양 노트북을 펼쳐두고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이 행사의 목적은

아주 중요한 사람이

혁신기업의 혁신 제품을

친히 둘러보는 것을

사진으로 남기기 위함.


이 여자애들은 그 중요한 사람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미소를 짓는 것을

커리어로 삼기 위해서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한 마디 말도 없이 한솥도시락을 먹고 있다.


예정보다 15분 늦게 도착한

중요한 사람은

내 가슴까지 밖에 안 오는 키에

정수리는 거의 다 벗겨졌으며

뱃살 때문에 마이를 풀어놔야 하는

아저씨였다.


그를 보는 순간

나는 내게 커피를 사다 준 담당자를 불러서

저기 죄송한데

우리는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인가요.

대답이 어렵다고요.

당신이 담당자가 아니라 대답이 어렵다면

박근혜든 문재인이든

상관없으니

대답을 좀 해주쇼-하고

민원을 넣고 싶어졌지만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그날 조퇴를 했다.

허락을 구할 사람이 딱히 눈에 안 보여서,

그냥 슬쩍 빠져나와서

핸드폰을 꺼두고

서울을 좀 걸어 다녔다.


별일 안 생겼다.

일이란 게 다 그렇다.


3

제발 삐지지 마.

니 커리어에 대한 걱정은 나한테 얘기하지 마.

연간 매출 목표도 나한테 묻지 마.

그걸 알면 내가 니 밑에서 일하겠니.

제발 섭섭해하지 마.

나한테 잘 보인다고 해서

지각한 게 지각하지 않은 게 되는 건 아니야.

시간이 흐르는 걸 뭐 어쩌라고.

나 더 자고 싶어.

아. 이랬더니 삐지시겠다?

좋아. 이게 내가 원하는 삶인지를 생각해 봐야겠는 걸


내가 긴 시간 동안

도망을 전문적으로 수련해온

전문 닌자란 사실을

다들 간과하고 있다.


내가 당신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도망의 재능을 썩히고 있다는 걸

누군가 한 명쯤은 알아줬으면 좋겠다만,

관두자.

차라리 로또 당첨되는 게

더 쉽겠다.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공들여 고른 책을 읽고 있는 내게

애인이 말하길


이봐,

또 책으로 도망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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