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의 노을
대학 친구들과 한강을 보러갔다. 오랜만에 모이니 언제 이렇게 시간이 많이 흘렀나 싶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만큼 각자 다른 속도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게 느껴져 생경했다. 제일 먼저 서른을 돌파한 친구는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 다음으로 서른을 돌파한 친구는 공무원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며 퇴사를 꿈꾸고 있었다. 학교 다닐 때 제일 공부하기 싫어했던 친구는 대학원에 진학했는가하면 엠티에서 알콜 쓰레기에 지옥의 요리사로 악명을 떨쳤던 친구는 술집을 차렸다. 배우가 되겠다며 자퇴한 친구는 설거지로 연명하고 있었고 다른 꿈 없이 세계일주가 꿈이었던 나는 아직도 카페에서 알바를 하고 있었다. 한 때 같은 교실에서 같은 내용을 배웠다는게 믿겨지지 않을만큼 다른 길을 걷고 있는게 이상했고 이렇게나 다른 길을 걷고 있는데 한데 모여 같은 노을을 보고 있다는 게 또 이상했다.
먹고사는 근황을 나누고 나선 연애 근황을 나눌 차례였다. 우리는 다들 연애 앞에 진심이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들이었다. 여기엔 이별을 이유로 기말고사를 거부한 사람도 있었고 변심한 애인과 얼굴 보고 끝내겠단 이유 하나만으로 브라질로 여행을 간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들 달라져있었다. 연애를 대수롭지 않은 걸로 여기는 걸로 조금이나마 어른이 된 티를 내기로 다들 작정이라도 한 듯이 연애담을 말하는 얼굴은 조금씩 구겨져있었다. 그냥 만나지. 만날 사람이 없다. 소개 좀. 난 이제 서른까진 연애 안하려고. 동물도 배고프면 짝짓기를 안하는 법이라더라. 서른이 넘은 친구는 다음 연애가 왠지 마지막일 것 같아서 시작하고 싶지 않다고 하고 긴 연애를 얼마전에 끝낸 친구는 연애는 꼭 부의 연금술 같다고 했다. 반짝이던 사랑은 반드시 바래지는데, 바래진 감정을 다시 사랑으로 바꾸는 건 어떻게 해도 안되더라며. 가장 불순물이 많은 금속인 납을 가장 순수한 금으로 바꾸겠다는 미친 아이디어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었냐며. 너희도 전 남자친구를 좇는답시고 학점을 조지고 태평양을 건너기도 해봤지만 결국엔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지 않았냐며, 연금술에 성공한 사람은 한명도 없으므로 우리는 이제는 정신을 차리고 그냥 밥벌이에 집중해야한다고, 연금술보다 건실한 행복을 찾아내야만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해가 지는 동안 잠수교를 걸어서 건너며 우리 모두가 동의한 결론은 결국엔 연애는 어렵다였다. 20대 초반처럼 누군가와 진행 중인 연애가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연애라는 그 일을 어떻게 다뤄야할지 전혀 모르게된 것 같다는 느낌의 그런 어려움이었다.
잠수교를 걸어서 건너고 나니 다리가 아파 택시를 타기로 했다. 건대입구까지 택시를 타고 갔다가, 6명이 앉을 자리가 있는 술집이 건대입구엔 없어서 화양동으로 갔다. 화양동의 한 국밥집에서 국밥을 말아먹는데 친구 하나가 이런 말을 한다. 여기가 화양동인데, 너희 화양연화가 무슨 뜻인지 아냐고. 인생에서 한번있는 그런 꽃같은 시기를 화양연화라고 한댄다. 가장 빛나는 시기를 함께 보낸 친구들과 오랜만에 다시 모여, 서로 다른 길에서 헤메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연애는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건대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화양동에서 국밥을 먹고 있으려니까 마치 서로가 서로의 화양연화가 지났다는 걸 보증하는 증인이 된 것 같았다. 우리는 모두 화양연화를 지나왔다. 인생에서 한 번 있는 그런 꽃 같은 시기를. 그러나 나는 다시 한번 맞이하고 싶다. 그럼 이전의 화양연화는 더 이상 화양연화가 아니게 되겠지만, 그것을 감수하고서라도 한번만 더 느껴보고 싶다. 나는 어제 화양동에서 국밥을 같이 먹었던 친구들 모두가 각자 자기 나름의 언어로 '한번만 더'를 외치며 국물을 삼켰으리라고 확신한다.(20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