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세상에 이 크나큰 빈 상자(箱子) 속에 툭툭 채집(採集)되어야 했을까.’
기형도 시인의 미발표 시 <거리에서>의 한 구절이다. 요즘 내가 자주 곱씹는 구절인데 내 삶이 너무 무심하게 내던져진 거 같아서 그렇다. 일이 좀 고된 걸 너무 과장하는 걸까. 그런데 일이 힘든 건 괜찮은데 삶이 없어졌다고 느낄 때는 좀 견디기가 힘들다.
2년 전인 6월 지금 직장에 처음으로 출근했다. 경력직인데다 두 번째 직장이었지만 그때만 해도 약간의 열정이 있었는데. 요즘은 그저 소진될 뿐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연봉 협상을 하더라도 뭐랄까, 내 건강 내 시간 다 잃어가며 얻은 게 겨우 이정도인가 싶어서 허탈했다.
지금 직장에서 2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면서 무작정 힘들기만 한 건 아니었다. 나름 적성에 맞는 일을 하면서(아니었다면 버티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름 주변의 인정을 받았다. 문제는 일만 하는 인간이 돼버린 거다. 야근과 불규칙한 주말 근무가 이어지자 다른 곳으로 시야를 돌릴 겨를이 없었다.
얼마 전엔 비즈니스 미팅에서 취미가 뭐냐는 상대의 질문에 답이 궁해 ‘넷플릭스 보기’라고 답했다. 맞은 편 벽에 걸린 중식당의 메뉴판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2년 전의 나에게 취미가 뭐냐고 물어보면 운동과 공연 보기라고 답했을 거 같다. 문제는 야근이 잦아지니 운동을 이어서 할 수 없었고, 주말에도 때때로 업무를 봐야 할 때가 있어서 공연을 예매할 엄두가 안 났다.
한때는 스스로를 ‘취미인간’이라고 자부했었는데. 일을 다닐수록 무색무취한 인간이 되어가는 듯한 기분에 잠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취미 있는 직장인들이 많이 부럽다. 20대에는 그냥 취미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건줄 알았는데 지금은 그게 다 시간과 체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라는 걸 절감한다. 취미도 기획이고 일종의 능력이 아닌가 싶다.
최근엔 드라마를 정주행하기 시작했지만 정말 간절히 ‘내가 이 시간에 이거 아니면 안 돼’라는 마음은 아니었다. 일종의 보상심리에서 비롯된 구실 갖추기랄까. 물론, 유튜브를 보는 것도 좋고 넷플릭스를 보는 것도 다 좋지만. 하루의 남고 남는 시간에 겨우 보는 드라마 한편이 아니라 저녁 시간을 좀 향유하고 싶다.
그래도 아주 죽으란 법은 없는 것인지 최근엔 새로운 취미의 싹을 찾았다. 조금 민망하지만 ‘사진 찍기’다. 외근과 지방 출장이 잦은 탓에 하루에도 여러 곳을 휘젓고 다니는데, 그 와중에 본 생경한 풍경, 사람 사는 모습, 도시의 경관 등을 틈틈이 기록한다.
얼마 전엔 해외 출장을 다녀와야 했는데 가기 전에 누가 그랬다. 예쁜 사진 많이 찍고 오세요. 해외가 아니어도. 이제는 내 일상도 한 장의 예쁜 사진으로 남길 수 있으면 좋겠다.
파주
마감도비님의 에세이를 읽고 잠시 고민에 빠졌습니다. 나의 취미라 부를 만한 것은 무엇인가, 하고요. 저는 무언가를 배우기보다 감상하는 것에만 주로 취미를 가지는 편입니다. 그래서 가끔은 취미가 값비싼 추억팔이처럼 느껴질 때도 있어요. 하지만 자고로 취미란 건 즐거워야 하잖아요? 그래서 저는 취미 같은 것을 생산적으로 굴려야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습니다. 돈과 시간과 마음을 쏟는 행위 자체가 취미의 본질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당장 이 풀칠도 취미를 발판으로 삼아 시작한 프로젝트가 아니었던가요! 쓸모 없는 일도 실컷 즐기다 보면 뭐라도 되겠죠. 다만, 그러기 위해서 늘 건강 만큼은 잘 챙기시길… 노동이든 시간이든, 그 무엇으로부터 마감도비님이 자유로워지기를 기원합니다.
야망백수
취미를 붙잡고 있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요즘 매일 절절히 느끼고 있습니다. 피아노, 먼지가 쌓였고요. 자전거, 지하철역 앞에 일주일째 세워져있습니다. 가끔씩 이것저것 그려서 올리던 인스타 계정은 폐업 직전입니다.억지로 시간을 내서라도 할까 싶다가도, 애를 쓰는 건 어쩐지 취미답지 않다고 느껴져서 그냥 누워서 배나 긁습니다. ‘먹고 살기 바빠서'라는 말은 어찌나 근엄한지. 중대한 훼손도 이 말 앞에선 으레 일어나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또 하나 묘한 일은, 먹고 사는 데 집중할수록 많이 먹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책상 한켠에 탕비실에서 가져온 과자가 잔뜩이네요. 언제쯤 나를 먹여살리면서도 그걸 위해서만 살지 않는 법을 배우게 될까요. 이번 주에도 밥벌이 그 이상의 풀칠을 꿈꾸며 야근을 합니다. 법카로 저녁을 시켜 먹습니다. 아, 배부르다 !
아매오
취미를 묻는 말에 관성적으로 독서라는 답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이게 정말 내 취미가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히려 아예 떠오르지 않는 게 낫겠다. 그보다 더 찡하더라고요. 어느 웹툰에서 봤던 좀비가 떠올랐습니다. 생전의 마지막 기억에 의존해 같은 행동만 반복하는 좀비요. 그래서 사실 지금 이 코멘트를 쓰는 것도 약간 힘겹습니다. 별 생각 없이 ‘제 취미는 독서인데요’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려니 더 써지지 않았거든요. 이거야말로 즐거워야 해서 즐겁다고 여기는 억지 텐션이 아닐까. 진지하게 취미 탈환 작전을 펼칠 때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