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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우 Oct 28. 2022

행복을 찾아서


“자주자주 행복하세요.”


메일을 쓰거나 카톡을 마무리할 때 나의 인사는 수신자의 행복을 기원하는 말로 끝을 맺는다. 누군가는 상대방이 무탈하기를 혹은 삶이 평안하기를 바란다는 말로 마무리하지만, 나는 메시지를 받는 사람이 행복감을 자주 느끼기를 바란다.


사실 이 인사말의 방점은 ‘자주’라는 빈도에 있다. '행복감이라는 건 헬륨가스를 가득 머금은 풍선 같은 것이라서, 잠시라도 눈길을 떼면 이내 날아가 버리고 만다'라는 나의 깊은 믿음이 내재되어 있는 거다. 사랑하는 사람이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을 볼 때. 기가 막힌 풍경을 보면서 감탄을 할 때. 그 찰나에 찾아오는 행복은 ‘왔구나’하고 자각하는 순간 이내 사라지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동안은 나에게 주어진 일말의 행복을 누리려고 안달복달 한 적도 있었다. 떨어지는 벚꽃을 보거나 동네 뒷산 뒤로 넘어가는 노을을 보다가도. 그럴 때마다 나는 당장의 행복감을 어디에 보관하지 못해 안달난 사람처럼 굴었다.


행복에 끊임없이 집착했지만 행복감을 오래도록 누리는 노하우는 여전히 익히지 못했다. 이제는 그 빌어먹을 헬륨풍선이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작아지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이야말로 행복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행복의 정체는 실시간으로 늙어가면서 느끼는 찰나의 기쁨. 도파민과 세로토닌의 근본 없는 춤사위 같은 것이라고.


그래서 나는 행복하라는 기원 앞에 ‘자주’라는 말을 구태여 두 번이나 붙인다. 행복이라는 건 이를 악물고 힘껏 쥔 대도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니, 잦은 빈도라도 행복감이 찾아오라며 기원하는 거다.


행복의 엉덩이가 원체 가벼운 탓인지 조금의 틈만 나면 훌쩍훌쩍 떠나버리고 만다. 그리고 행복이 머물던 그 빈자리는 다른 것들이 웅크리고 앉는다. 행복이 지나고 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허탈함, 공허함 같은 감정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그런 쓰레기 같은 감정을 맞닥뜨릴 때마다 사무치는 괴로움을 느낀다. ‘고작 몇 초의 행복을 누렸다고 나에게 이런 시련을?‘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면 때로는 행복을 느끼는 게 두려워지기도 했다.

며칠 전 이누이트인들의 감정 해소법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화가 나면 무작정 걷기 시작한다는 이누이트인들은 화가 풀릴 때까지 끝도 없이 펼쳐진 얼음 평원을 걷고 또 걷는다고. 그들은 화가 다 풀리면 멈춰 서서 걸어온 길을 돌아 집으로 돌아온다고 했다. 집을 등지고 뚜벅뚜벅 걸어가던 길이 화를 삭이기 위한 길이라면 돌아오는 길은 뉘우침과 용서의 길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일화를 접하곤 이누이트인들의 유별난 화풀이법에 의문을 품기보다는 온갖 잡생각을 풀어놨다.

막상 화가 난다고 상을 엎고 호기롭게 집을 나섰는데 급하게 나오느라 옷을 얇게 입었으면 어쩌지. 걷다가 북극곰이라도 만나면, 근데 그게 또 한참 동안을 굶주린 놈이면 어쩌지. 돌아올 때 화가 식으면 또 얼마나 추울까. 나 같으면 일분 만에 추위에 화가 꽁꽁 얼어붙어 집으로 기어들어가겠는데, 하는 식의 잡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요즘 들어 나는 무작정 걷는다. 화가 날 때만 그런 것은 아니고 인생이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싶을 때(거의 매일) 밖으로 나선다. 동네 어디로든 정처 없이 거닐다 보면 하루에 이만 보를 걷게 되는 날도 있다.직접 걷고 나서야 깨달은 건 망령처럼 늘 내 주위를 서성이던 잡생각이 조금은 사그라든다는 거다. 대신 그 빈자리를 걷는 동안 마주친 풍경과 인상적인 기억 몇 조각으로 채운다. 이누이트의 분노해소법, 그러니까 걷는 행위가 구리고 불쾌한 감정을 가라앉히는 데에 특효약인 걸 몸소 알았다.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꽂아둔 채 앞을 보며 걷기 시작하면 나도 미처 알지 못했던 나의 내밀한 생각들, 정체를 숨기고 있던 감정들이 곳곳에서 나타나 전전두엽을 통통 두드리는 것만 같다. 값비싼 서울 아파트 사이로 흐르는 개천 옆을 반쯤 달리듯 걸으면서 ‘햇살엔 세금이 안 붙어 참 다행이야’ 같은 간질거리는 가사를 들으면 지금의 삶도 그리 나쁘지 않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나에게 있어 걷기란 일상 속에서 행복을 추출하는 행위, '보장된 행복'을 부르는 의식이다.


최근까지 내가 누리던 보장된 행복 중 하나는 퇴근 후에 보는 <나의 해방일지>였다. 누군가의 글로 빚어진 가상의 캐릭터들이 저마다의 작은 해방을 향해가는 몸부림를 보며 나도 덩달아 해방감을 느꼈다.


<나의 해방일지>에서 미정이는 구씨에게 하루에 딱 오분만 행복하라고 말하는데, 나는 그 오분이야말로 현실적으로 행복감을 쟁취할 수 있는 최대치라고 생각했다. 미정이 또한 구씨를 온 마음으로 추앙했을 것이기에. 적당한 시간이 아니라 분명 하루에 행복할 수 있는 최대치를 상정했을 거라고 믿어서다.


여하튼 나는 구씨를 향한 미정이의 기원처럼 하루 딱 오분만 행복감을 채우자고 스스로 다짐했다. 있는 기쁨, 없는 안도감을 죄다 끌어모아 하루에 딱 오분씩만 행복해 보기로. 거창한 성취나 성공이 아니라 오십 원짜리 동전 같은 짤짤이 행복들을 긁어모아 소소하게나마 행복감을 느끼기로.


맛있는 원두를 내려 만든 아아를 마시는 행복. 출근길에 랜덤재생한 멜론에서 최애곡이 흘러나와 솟는 행복. 며칠 전 이제 막 합정역을 지나는 출근길에서 ‘오늘 하루 더 힘을 내라’는 기관사의 안내방송에 감동하는 행복. 그런 짤짤이 행복들을 부지런히 긁어모으다 보면 오분을 훌쩍 넘기는 행복을 쟁취할 수 있다.


일에 허덕이느라 새로운 행복을 발견하지 못한 날이래도 괜찮다. 화가 잔뜩 오른 이누이트인의 심정을 상상하며 무작정 걷기, 부모님과 갔던 여행 사진 들춰보기, 인센스가 타들어 가는 동안 빈백 소파에 반쯤 누운 채로 멍 때리기, 에어컨을 켜두고 전기요 속에 쏙 들어가 눕기, 온기 가득한 풀칠 품앗이를 읽고 또 읽기… 내게는 보장된 행복이 이렇게나 잔뜩 있으니까.


요즘 나의 최우선 목표는 무시로 다가오는 행복의 모가지를 가능한 오래도록 그리고 힘껏 움켜쥐는 거다. 나훈아 아저씨가 세월의 모가지를 비틀어 내듯 나는 잠깐 머물다 가는 이 행복들을 가득 안고 마음껏 즐기리라. 이게 내가 꿈꾸는 작은 해방이자 나의 생존 동력이다.


이 글 한 편을 쓰는 동안 7분쯤 되는 행복을 건졌다. 하루의 목표치를 훌쩍 넘긴, 차고 넘치는 행복이다. 나는 내일도 온종일 행복들을 찾아 하루를 촘촘하게 채울 것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행복할 것이다.






마감도비

출장 차 일주일 정도 유럽의 한 도시에 다녀왔습니다. 자전거 도로가 아주 넓게 나 있었어요. 직진 도로와 좌회전 도로가 따로 있고 우회전을 위해선 보행자들과도 발을 맞춰야 했습니다. 세계에서 자전거 타기 가장 좋은 도시를 놓고 암스테르담과 경쟁하고 있다고, 그 도시 사람이 말하는 걸 들었습니다. 참 좋았어요. 자전거는 한국에도, 서울에도 있는데 말이죠. 자전거를 타고 도심 속을 활보하면서 문득 행복을 위해선 길이 아주 튼튼하고 넓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위정자가 아닌 단에야 도시에 길을 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겠죠. 다만, 각자의 일상에 길을 내는 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걷기, 음악 듣기, 드라마 보기, 글쓰기 같은 것들이요. 파주님이 ‘보장된 행복’이라고 명명한 것도 이와 비슷한 게 아닐까요. 저는 파주님의 일상에 아주 넒은 자전거 도로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번 글은 뭔가 파주님의 해방일지 같은 느낌이었네요. 해방, 이미 이룬 거 아닐까요?



아매오

회사에서는 티내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죠. 묵묵히 노력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스스로를 어필하는 것 또한 업무 노하우이고 능력이라고. 동의합니다. 그래서 저는 행복에도 같은 공식을 적용합니다. 저는… 행복을 과장합니다. 손톱만큼의 행복이라도 포착한 순간 “행복해!”라고 입밖에 내죠. 만약 혼자 있다면 친구들과의 단톡방에 메시지를 보냅니다. ‘행복하다’고.


감정을 숨기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권력자임을 드러냅니다. ‘표정 관리’는 무릇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뜻하는 말이니까요. 그러니 적어도 저의 행복에 있어서는 패권을 거머쥔 1인자로 군림하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누구와 함께 있든 거침없이 내가 느끼는 행복감을 말하고 싶어요. 저는 그럴 때 그것을 더욱 구체적인 감정으로 느끼는 사람이거든요.



야망백수

오래 산 건 아니지만 살면서 얻은 교훈 중 하나는, ‘언어는 결핍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지속가능한’ 이란 수식어가 붙는 말들 중 실제로 지속가능한 것이 얼마나 드문지를 생각해보세요. 행복도 비슷합니다. 누군가 행복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말한다면 그는 불행한 자입니다. 흠. 파주님. 괜찮으신 거 맞죠?


여튼, 저는 언어가 결핍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난 다음부턴 애써 행복을 발설하는 일을 관뒀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하죠. “나쁜 마감!” “못된 출근!” 어차피 할 일들, 욕 좀 하면 어떻습니까. 물론 욕은 하더라도 일은 열심히 합니다. 욕까지 하는데 일은 대충대충이라면 밥줄이 끊겨버릴테니까요. 밥줄을 사수해야한다는 마음, 그 위기감을 동력삼아 욕하고 일하며 우당탕탕 살다보면 문득 행복에 대해서 꽤 오래 고민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답니다. 행복을 되찾은 거죠. 나쁜 마감. 못된 출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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