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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우 Dec 14. 2021

어느 무직 1년 차의 소회

 퇴사할 땐 하고 싶은게 참 많았다. 매일 만화도 그리고, 내 브랜드도 런칭하고, 글도 꾸준히 써서 그걸로 먹고 사는 멋진 디지털 노마드가 되려 했었다. 1년 뒤, 하려 했던 것들을 조금씩은 다 건드려보긴 한 것 같긴 한데 결과는 영 신통찮다. 나는 과연 성장했나. 성장했다고 말하려면 이전엔 몰랐던 것, 할 수 없었던 것을 이제는 할 수 있어야 할 텐데 나는 되려 이전만 못 한 것 같은 느낌이 자주 든다. 멈춰있진 않은 것 같은데 그렇다고 멀리 온 것 같지도 않고. 출정과 퇴각을 번갈아가며 어지러운 발자국만 남긴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아직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잘 모르겠다.

 

 얻은 게 아주 없진 않다. 이런 저런 툴들을 조금 더 잘 만지게 되었다. 몇십 개의 SNS 게시물이 남았다. 두세 개의 프로젝트가 남았다. <풀칠>도 남았다. 하지만 이것들을 뜯어먹고 살 수 있을까. 내가 이룬 것들은 어쩌면 부지런한 직장인이 연차를 붙인 주말 서너 번으로 이룰 수 있던 게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은 언제나 나를 깊은 불안에 빠트린다. 내가 애지중지하는 것들이 남들에겐 그저 사이드 프로젝트나 부업이란 이름으로 열정을 증명하고 돈을 벌어내는 바람직한 취미활동에 불과하다는 생각. 내 생각에 이건 진지해질수록 무능해지는 게임이다. 가볍게 시도하라는 조언을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걸 보면 아주 틀린 생각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자꾸만 진지해지고만 싶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생산성은 조금 떨어지더라도 쉽게 떠오르는 진부한 이야기는 미뤄두고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이야기를 만들어 보고 싶다.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완전히 새로운 이야길 만들어내고 싶기도 하다. 부끄러움 없이 나 자신을 창작자로 소개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이것저것 하고 싶은 거 다 해보려구요”에서 “창작자가 되어 보려구요”라고 간단하게 말할 수 있게 된 것이 어쩌면 1년 동안의 유일한 성과인지도 모르겠다. 돈을 많이 벌겠다고 이야기하는 건 전혀 창피하지 않은데, 내 맘에 드는 삶의 방식을 설명하는 건 왜 이렇게 머쓱하고 부끄러운지 모르겠다.

 

 물론 나를 먹여살릴 돈을 벌어야하므로 일을 하고 있긴 하다. 내 일을 하고 싶어서 회사를 때려쳐도, 당장 돈 벌기엔 역시 남의 일을 하는 것이 가장 편리하니까. ‘시켜만 주시면 무엇이든!’을 외치며 잡식성 프리랜서로 많이 일하고 적게 벌고 있다. 남들은 퇴사하고 잘도 ‘월천’을 찍는다던데...나는 딱 굶어죽지 않을만큼만 번다.

 

 통장잔고가 유난히 성에 안 차는 날엔 ‘나는 이렇게 월 천만원을 벌었다’는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기도 했다. 부지런히 스스로를 포장해서 실제보다 더 대단해 보일 수만 있다면 경제적 자유에 다가갈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어쩌면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를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능력치인지도 모른다. 나도 몇몇 방법은 직접 찍어 먹어보기도 했다. 해시태그(#퍼스널브랜딩)도 열심히 달고, 유튜브(흑역사로 남을)도 해봤다. 해보고 나서야 알았다. 난 나를 밑천으로 쓰는 걸 그닥 재미있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하고 싶은 일을 크게 이야기하는 것보단 조용히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걸 더 선호한다는 것을. 이걸 깨달은 것도 나름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얼핏 보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여전히 먹고 살기 힘들다고 생각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른다. 눈에 확 띄는 성취도 없다. 하지만 아직 관두고 싶진 않다. 준비도 없이 1년 만에 새로운 삶을 꾸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게 오만이라고, 자기합리화를 시전할 여유도 약간은 남아있다. 무엇보다도 위안이 되는 것은 언제 겪어도 겪었을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매일이 불안하긴 하지만 후회가 남진 않는다. 계속 이렇게 후회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결국엔 지난 모든 선택을 옳은 것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 믿는다.(20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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