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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 Sep 18. 2015

무성영화의 무성에 대하여

아직 말하는 법을 몰랐기에 무성(無聲)의 영화로 불렸던 무성 영화. 이 무성 영화에 대해 우리가 지나치기 쉬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처음 무성 영화와 만난 관객들이 철저한 침묵 속에서 영화를 봤을 것이라는 생각이지요. 그러나 일반인을 대상으로 최초의 영화 상영이 열렸던 프랑스 파리의 풍경은 사뭇 달랐습니다. 


1895년 12월 28일. 프랑스 혁명 후 100년 간 정치와 사회의 격동기를 거쳐 마침내 도래한 아름다운 시절, 벨 에포크. 예술과 기술이 같은 속도로 찬란한 꽃을 피우던 파리는 세계 박람회를 앞둔 유럽 최고의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오페라 광장과 상점가들이 즐비해 당시 파리에서도 번화가로 손꼽혔던 카푸신 거리에 자리 잡은 그랑 카페는 이미 반세기 동안 문화와 사교계의 장으로  사랑받는 곳이었죠. 하지만 이 카페는 지나간 50년 보다 앞으로 다가올 100년 동안 더욱 유명세를 치르게 됩니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한 중년 신사가 이 카페 지하에 위치한 인디언 살롱을 둘러봤기 때문이었죠. 사나이의 이름은 모리스 클레망. 앙트완 뤼미에르가 경영하는 사진 공장에서 기사로 근무했던 그는 사장의 두 아들이 계획한 기상천외한 공연을 위해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던 겁니다. 흥행을 장담할 수 없었기에 클레망은 수익률에 따라 지하 살롱의 임대료를 계산하길 원했지만, 까다로운 카페 주인은 하루 30프랑의 고정 임대료를 고집하며 막판까지 버텼죠. 


뤼미에르 형제


마침내 공연 당일. 오귀스트 뤼미에르와 루이 뤼미에르 형제가 제작한 10편의 상영작을 소개하는 포스터가 나붙고, 지하 살롱에는 영사기가 설치됐습니다. 1프랑을 주고 자리를 잡은 서른세 명의 관객들은 1분 남짓한 활동사진들을 보면서 입을 다물지 못했고, 살롱 구석에 마련해놓은 피아노 앞에 앉아있던 피아니스트는 쉴 새 없이 건반을 눌러댔습니다. 영사기가 돌아가는 소리를 감추기 위해, 은막에서 물을 뿌리는 정원사의 익살에 터지는 웃음과 객석을 향해 달려오는 열차에 놀란 관객들의 비명을 감추기 위해서였죠. 그리고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지만, 어쩌면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임시 극장으로 변모한 카페 지하의 어둠에 익숙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발랄한 선율은 '움직이는 사진'을 즐길 수 있도록 분위기를 한껏 띄웠던 것입니다. 보석 상자를 열었을 때 자동적으로 흘러나오는 팅글거리는 멜로디에 한결 마음이 평온해지거나 살짝 즐거워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미 1930년대에 영화음악에 관한 이론서를 발표한 커트 런던 같은 학자는 무성 영화에서 음악이 결코 예술적인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객석과 영사실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협소한 공간에서 요란스레 돌아가는 영사기의 소음을 중화시키기 위해 음악을 사용했다고 본 것이죠. 하지만 뤼미에르 형제는 오직 그 이유만으로 음악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직접 돌리는 초기 영사기는 기계식에 비해 거의 소음이 나지 않았으니까요. 문제는 따로 있었습니다.


마르쉘랭 아졸레가 제작한 세계 최초의 영화 포스터 <물을 주는 정원사>


관람료를 받고 그랑 카페에서 영화를 상영하기 9개월 전인 1895년 3월. 형제는 200여 명의 청중 앞에서 활동사진의 시연회를 가집니다. 상영이 목적이 아니라 새로운 사진 기술을 선보이는 일종의 박람회였지요. 그러나 다른 회사에서 출품한 컬러 사진 기술보다 뤼미에르 형제가 내놓은 움직이는 흑백 사진에 사람들의 이목이 더욱 집중됩니다. 사람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본 두 사람은 돈을 받고 이것을 하나의 볼거리로 활용하자는 아이디어를 내죠. 그러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무 소리 없이 움직이는 화면이 그들의 눈에는 마치 어둠 속에서 유령이 아른거리는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보였던 겁니다. 이 당시 스크린으로 활용된 흰 천은 요즘처럼 결이 곱거나 반반한 것이 아니었고, 영사기의 불빛을 통해 투영되는 영상은 지금 영화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희미했습니다. 상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장소가 칠흑처럼 어두워야 했지요. 사람들이 공포를 느낄 정도로요. 그들의 생각대로라면 활동사진은 즐기기 위한 쇼가 될 테니 당시 모든 공연 예술에 활용됐던 음악이 반주로 사용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해결책이었습니다. 작곡가 한스 아이슬러가 말했듯 무의식적인 두려움을 달래 주는 마법에 빗댄 음악처럼 말이죠.


싸구려 업라이트 피아노로 연주되는 단조로운 멜로디에 지나지 않았지만, 1석 3조의 효과를 주는 음악은 영화의 발명과 동시에 단짝이 됩니다. 영화가 처음으로 상영되는 역사적인 순간부터 그 곁을 음악이 지켰던 것이지요. 그러나 같은 활동사진이라도 음악은 상영되는 장소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이를 테면 피아노 반주로 그랑 카페에서 상영됐던 뤼미에르 형제의 활동사진이 이듬해 2월 영국 공과대학 부설 성당에서 공개되었을 때는 건반 세 개가 고장 난 리드 오르간 연주가, 또 같은 해 4월 런던 엠파이어 극장에서 상영되었을 때는 관현악단의 반주로 바뀌었습니다. 또한 미국으로 건너간 활동사진이 뉴욕의 코스터 앤 비알 뮤직홀에서 상영되었을 때는 헝가리 밴드가 그 반주를 맡았지요. 심지어 음악이 없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러시아 소설가인 막심 고리키는 1896년 니즈니 노보고러드의 시장에서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를 처음 본 소감을 이렇게 남겼습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고 숨을 쉰다. 그리고 은막의 가장자리에 다다라서는 누구도 모르는 곳으로 홀연히 사라져버린다. 어색할 정도로 조용하다. 마차 바퀴나 발걸음 혹은 누군가가 내는 말 소리를 빼놓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흘러나오는 어떤 소리도, 악단의 음악도 없다. 잿빛 낙엽처럼 바싹 마른 나뭇잎이 바람결에 동요하듯 회색 실루엣이 흔들린다. 생명의 다양한 빛깔을 잃어버린 그 형벌 같은 침묵에 사람들이 불평을 쏟아놓는다.


조르주 멜리에스


그 시대 사람들은 똑같은 활동사진을 봤지만, 똑같은 음악을 들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영화는 상영 시 어떤 음악을 곁들여 연주하느냐에 대한(요즘으로 치면 선곡에 대한) 고민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감독이자 제작자로서 이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했던 건 조르주 멜리에스였습니다. 마술사로 활약했던 멜리에스는 뤼미에르 형제가 내놓은 경천동지 할 신기술에 탄복하면서, 한편으로는 그것이 새로운 스펙터클을 선사해줄 수 있는 마술 쇼로 활용될 수 있음을 직감했죠. 마술사로서 그의 직업 의식이 발동했던 겁니다. 


1902년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공상 과학영화였을 <달나라 여행 La Voyage Dans La Lune>을 완성시킨 후 멜리에스는 장면마다 어울리는 음악을 생각해야 했고, 푼돈을 주고 수백 미터나 되는 줄을 서서 다큐멘터리나 다름없는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를 구경했던 관객들과 달리, 이미 온갖 문화적 향락을 누리던 상류층을 위해 음악 선곡에 있어서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습니다. 무서운 장면에서는 어두운 단조의 멜로디가 어울렸고, 위기에서 벗어난 주인공의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 행진곡풍의 쾌활한 선율도 필요했지요. 하나의 곡이 아니라 서로 다른 분위기에 어울리는 두 곡 이상의 반주를 곁들여야 했습니다. 


<달나라 여행(La Voyage Dans La Lune)>, 1902


이 대목에서 어쩌면 영화음악의 역사는 언젠가 다시 씌어지게 될 지도 모릅니다. 오랫동안 최초의 영화음악으로 꼽혔던 카미유 생상스의 스코어보다 5년 먼저 <달나라 여행>의 스코어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악보의 일부가 불과 몇 년 전에서야 발견됐기 때문이죠. 음악을 작곡한 사람은 에즈라 리드(Ezra Read). 국적과 직업 그리고 생몰연도 이외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영국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입니다. 그런데 그의 음악이 왜 알려지지 않았을까요? 그 사정을 들여다보면 이렇습니다.


뤼미에르 형제로부터 카메라 판매를 거절당한 멜리에스가 마술 공연 차 영국으로 건너갔을 무렵, 운 좋게 한 영국인으로부터 카메라를 사들일 수 있었습니다. 이 당시 에즈라 리드와 친분을 쌓았던 멜리에스는 어렵사리 손에 넣은 카메라로 앞으로 제작할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음악가에게 귀띔해주었고, 그 이야기에 매료된 리드는 멜리에스의 영화를 위한 음악 작곡을 자처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8페이지 분량의 피아노 악보가 현재 영국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고, 이 악보를 발견한 역사학자 마틴 마크스는 『달나라 여행: 유쾌하게 묘사한 판타지아(A Trip To The Moon: Comic Descriptive Fantasia)』라는 타이틀과 함께 1903년 4월 2일 자로 찍힌 도서관 장서인을 확인했습니다. 새로운 음악이 작곡되면 그 악보를 출판하는 것이 관례였던 것과 달리 멜리에스는 자신의 필름이나 카탈로그를 어느 누구에게도 판매하려 하지 않았고, 대신 원하는 사람에게 무료로 악보를 나눠주었다고 전해집니다. 출판되지 않은 에즈라 리드의 영화음악이 공식적인 기록과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을 것으로 짐작되는 이유죠.


에즈라 리드의 피아노 악보: A Trip To The Moon, 1903


조르주 멜리에스의 <달나라 여행>이 상영될 무렵 이제 영화는 1분 남짓한 영상이 아니라 러닝 타임이 14분에 이르렀고, 그저 일상의 평범한 순간들을 포착한 것이 아니라 소설을 극화시킨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가까워졌습니다. 그와 동시에 영화의 흥행을 담당하는 극장주와 흥행술사들은 스펙터클 한 장면에 한 대의 피아노를 이용해 연주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점차 깨닫기 시작합니다. 음악의 선곡과 함께 그 규모에 대해서도 고심할 필요를 느끼게 된 거죠. 그러나 영화 상영에 오케스트라를 동원하는 것은 영국 왕실에서 열린 상영회가 아니라면 좀처럼 엄두를 내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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