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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 Oct 27. 2015

대공황기의 황금광들  

작곡가, 작사가, 출판업자가 주축이 된 미국 음악가 협회, 즉 ASCAP(American Society of Composers, Authors and Publishers)이 결성된 때는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4년입니다. 미국의 저작권법이 제정되고 약 5년쯤 지난 후였지요. 주로 브로드웨이에서 활동하던 작곡가들로 이뤄진 ASCAP은 1917년 호텔 레스토랑에서 악단이 연주하는 음악에 인세를 물리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수수료 징수에 나섭니다. 반주를 곁들여 무성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들이 다음 타깃이 되었고, 1920년대로 접어들면서 음악이 전파를 타기 시작하자 라디오 방송으로부터도 저작권이 있는 음악에 대한 사용료를 챙깁니다. 그리고 이제 새로이 등장한 유성 영화는 ASCAP에게 또 다른 노다지였지요. 영화에 아예 음악이 삽입되어 있었으니까요.


1914년 ASCAP의 창립 멤버 사진. 우측 끝에 작곡가 어빙 벌린이 보인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만, 유성 영화를 보러 갔던 1920년대의 관객들은 처음 듣는 낯선 멜로디보다 낯익은 노래를 더 선호했습니다. 그래서 제작사들은 관객을 유혹하기 위해 귀에 익은 과거의 노래들을 영화에 공공연하게 사용했지요. 단지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재즈 싱어>에 차이코프스키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가져다 썼던 것처럼요. 비슷한 시기 유성 영화의 사운드를 미학적인 실험으로 받아들인 프랑스나 독일과 달리 할리우드에서 음악은 새로운 영화를 프로모션하기 위해 꼭 필요한 수단으로 자리 잡습니다. 영화는 주제가를 가져야 했죠. 새로 작곡한 곡이 아닌 기존의 노래를 활용한 주제가라면 십중팔구 ASCAP에 저작권을 지불한 뒤에야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널리 알려진 곡일수록, 인기가 많은 곡일수록 가격이 비쌌죠. 1939년까지 ASCAP이 벌어들인 수입에서 3분의 2에 해당하는 금액을 할리우드로부터 거둬들였으니 대공황기의 미국 음악가 협회는 영화사가 먹여 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물론 몇몇 영화 제작사들은 발 빠르게 대처합니다. 바이타폰으로 유성 영화를 유행시킨 워너 브라더스는 1929년 뉴욕 출판업자로부터 몇 개월에 걸쳐 판권을 대거 사들였고, 대공황으로 휘청거리는 음반사를 인수하기도 했습니다. RKO 영화사를 차린 RCA 역시 1927년 두 개의 악보 출판사를 일찌감치 사들입니다. 다분히 전략적인 제스처였죠. 자사의 영화에 사용한 음악 저작권 비용을 아끼고, 다른 영화사가 사용한 노래에 권리를 행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RCA의 자회사인 NBC 방송국의 설립자 멀린 에일스워스 Meriln Aylesworth는 저작권을 확보하기 위해 영화와 방송사가 음악 사업에 나서는 상황을 당시 청문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음악 사업에 진입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며, (중략) 영화도 음악 전용 극장 대부분을 사들였습니다. (중략) 우리도 음악과 관계된 상황을 통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감정이 거의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사업 계획입니다.(마이클 채넌, 박기호 옮김, 『음악 녹음의 역사』, 동문선에서 재인용)


1910년대부터 악보 출판업의 중심지가 된 뉴욕 브로드웨이의 틴 팬 앨리(Tin Pan Alley)


<브로드웨이 멜로디>의 성공 이후 불어닥친 뮤지컬 영화 붐은 많은 노래를 영화에 삽입하면서 더욱 많은 저작권 비용을 지출하게 했습니다. 이 무렵 뮤지컬 영화는 무대에 올린 작품들과 큰 시간차를 두지 않고 얼마 뒤 스크린으로 옮기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죠. 그러나 영화사들은 뮤지컬을 영화로 제작하면서 때때로 원곡 대신 저작권료가 비교적 저렴한 곡으로 대체하거나 자신들이 저작권을 소유한 노래로 바꿔 사용하곤 했습니다. 이런 시도는 원작 뮤지컬에 매료된 사람들로 하여금 뮤지컬 영화에 흥미를 잃게 했고, 어떤 영화에 나왔던 노래가 다른 영화에  등장하는 경우도 잦아집니다. 결국 영화에서 음악의 이런 재활용과 과잉은 독이 되어 돌아옵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1929년에서 1930년 사이 약 200편이나 제작됐던 뮤지컬 영화는 1931년에서 1932년 사이 21편으로 곤두박질합니다. 관객들이 외면하기 시작한 것이죠.


이 시기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뮤지컬 영화로 <키스 미 어게인 Kiss Me Again>을 꼽을 수 있을 겁니다. 원래 1926년에 제작된 무성 영화 <마드무아젤 모디스트>를 리메이크한 작품이었지요. 1930년 말에 개봉했지만 뮤지컬 영화를 향한 곱지 않은 대중의 시선을 의식한 워너 브라더스는 영화를 급히 회수합니다. 몇 달 뒤 뮤지컬 영화에 대한 싸늘한 반응이 잠잠해지면 다시 개봉할 생각이었습니다만, 시간이 지나도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고 결국 영화사는 마지못해 1931년 재개봉시킵니다. 그것도 몇 장면을 잘라 짧게 편집한 버전으로요. 물론 이렇게 재개봉한 영화가 흥행할 턱이 없었죠. 미국 동부의 브로드웨이에서 서부 할리우드로 찾아왔던 음악가와 배우들은 하나 둘 돌아가는 짐을 꾸렸고, 막 타오르기 시작한 뮤지컬 영화의 붐도 사그라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뮤지컬 영화 이전에 브로드웨이 뮤지컬은 유성 영화가 탄생하면서 기세에 눌리기 시작했지만, 그 나름대로 매력을 가졌고 드라마로서 완결성이나 음악과의 조화도 뛰어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뮤지컬의 전신이랄 수 있는 버라이어티는 유성 영화가 도래하는 순간부터 음으로 양으로 영향을 미쳤지요. 예를 들면 <재즈 싱어>의 앨 졸슨이 흑인 분장을 하고 노래를 했던 건, 백인이 흑인 분장을 하고 비열하게 흑인을 희화화했던 민스트럴(Minstrel) 쇼의 흔적이었고, <브로드웨이 멜로디>는 제목 그대로 브로드웨이 보드빌 무대 뒤의 이야기였습니다. 게다가 <재즈 싱어>보다 일주일 늦게 무대에 올려진 북 뮤지컬 [쇼 보트 Show Boat]는 영화사에서 <재즈 싱어>가 차지하는 것만큼 브로드웨이 뮤지컬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으로 꼽힙니다. 그동안 브로드웨이에서 상연 했던 버라이어티가 말장난과 눈요깃감이 전부인 짧은 쇼들을 한데 모아놓은 것이었다면, 베스트셀러를 토대로 제작한 [쇼 보트]는 이야기가 있었고, 그 이야기와 완벽하게 어우러진 멋진 음악이 있었지요. 그러니 이미 상당 수준에 도달한 뮤지컬을 영화로 옮기면서 저작권 비용을 아끼기 위해 원작보다 못한 음악으로 오리지널리티를 훼손하고 원작의 매력을 떨어트린 뮤지컬 영화는 사랑받기 어려웠던 겁니다. 


1927년 지그필드 극장에 오른 뮤지컬 [쇼 보트]의 무대 사진


뤼미에르 형제는 공포스러울 정도로 어두운 극장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활동 사진에 피아노 반주를 곁들였고, 영화의 분위기를 한층 더 고조시키기 위해 카미유 생상은 최초의 영화음악을 작곡했으며, 주세페 베체는 장면마다 어울리는 음악을 미리 선곡한 카탈로그를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이미지와 사운드를 동기화한 <재즈 싱어>가 관객을 전율시켰고, 말하고 춤추고 노래하는 <브로드웨이 멜로디>가 침묵의 영화에 마법을 걸기까지 30여 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음악으로 영화에 생기와 활기를 불어넣기 위한 노력이었지요.


대공황의 시대에 뮤지컬 영화에 닥친 갑작스러운 불황은 엎친데 덮친 격이었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몇몇 눈 밝은 이들에게 왜 음악이 영화에 필요한 지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한국 영화에 관객이 줄어들 때마다 '한국 영화의 위기'를 조명하는 각종 칼럼과 기사가 어김없이 등장하듯 이 무렵 신문들도 할리우드 영화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걱정하는 기사들을 쏟아냅니다. 그중 무성 영화 시절부터 감독이자 RKO 영화사의 작곡가로도 활동했던 빅터 셰르징거 Victor Schertzinger의 회한 섞인 다짐을 다룬 기사가 눈에 띕니다.


음악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했기에 초창기부터 이어져 내려온 우리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영화의 음악은 소설을 영화로 각색하고, 세 개의 세트로 이뤄진 연극 무대를 한 대의 카메라로 담아내는 것 만큼 논리적이어야 했다. 새로운 음악은 영화 만큼 확실해야 할뿐더러 영화의 뛰어난 줄거리와 같은 품질이 되어야 한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1931년 5월 10일 자 기사에서 인용 및 번역)


루벤 마물리안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뮤지컬 영화를 바라봤던 영화 제작자들은 대공황이라는 불황기에 더 빠르고 많은 황금을 얻기 위해 거위의 배를 갈랐습니다. 부적절한 음악의 사용과 지겨울 정도로 반복되는 노래로요. 그리고 이것은 영화의 플롯에 맞는 곡을 사용해야 한다는 늦은 자각으로 이어집니다. 

브로드웨이와 할리우드 양쪽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던 루벤 마물리안 Rouben Mamoulian은 이런 사실을 이미 실천했던 감독이었죠. <브로드웨이 멜로디>와 같은 해 선보인 그의 <박수갈채 Applause>는 보드빌보다 다소 수위가 높은 선정적인 쇼였던 벌레스크(Burlesque) 무대 뒤편을 그립니다. 벌레스크 스타였던 키티와 어머니가 이런 무대에 선다는 것을 미처 몰랐던 딸 사이의 안타까운 모정이 이야기의 중심이었지요. 쇼 무대가 배경이니 만큼 다채로운 음악이 심심치 않게 등장합니다만, 이 영화에서 음악은 전면에 나선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박수갈채>에서 오히려 음악보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예사롭지 않은 비주얼입니다. 바닥에서 떨어질 줄 몰랐던 카메라를 자유자재로 움직여 촬영했던 마물리안은 지금도 어떻게 찍었을까 궁금하게 만드는 몇몇 장면을 선보입니다. 바닥에서 천장을 바라보거나, 반대로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카메라의 앵글은 독특했고, 인물을 따라 긴 복도를 좇아가는 장면은 바닥에 카메라 트랙이 깔리지 않았음에도 제법 유려해 보입니다. 1920년대 뉴욕의 마천루를 훑는 근사한 조감숏은 물론 그림자로 주인공의 위축된 심리를 그린 드라마틱한 연출이나 사선으로 장면을 전환하는 희한한 와이퍼 편집도 눈여겨 볼 만 합니다. 이 장면들 아래 깔린 음악은 조용히 거들 뿐이지요. 동시대 만든 영화들이 주제가를 팔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던 것에 비해 이 영화는 음반에 담아낼만한 곡이 거의 없어 보입니다.



루벤 마물리안이 뮤지컬 영화를 처음으로 선보인 것은 1932년입니다. 양복 재단사와 귀족 아가씨의 사랑을 그린 <러브 미 투나잇 Love Me Tonight>이지요. 다소 동화 같은 구석이 있긴 합니다만, 마물리안의 유니크한 촬영 기법과 브로드웨이 뮤지컬계의 걸출한 콤비였던 작곡가 리처드 로저스 Richard Rodgers, 작사가 로렌즈 하트 Lorenz Hart의 만남은 뮤지컬 영화에 대한 대중의 얼어붙은 마음도 스르르 녹여냅니다. 아침을 시작하는 파리지앵의 생활 소음을 리듬으로 빚어낸 오프닝 시퀀스(장 주네의 <델리카트슨 사람들>은 분명 이 영화의 영향을 받았을 겁니다)와 함께 감미로운 멜로디가 일품인 'Isn't It Romantic?'은 지금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멋진 재즈 넘버로 꼽히지요. 뮤지컬을 단순히 뮤지컬 영화로 옮기기보다 소설이나 연극을 원작으로 아예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려 했던 마물리안은 뮤지컬을 음악이 있는 드라마로 접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영화 프로듀서로 활동했던 휴 포딘 Hugh Fordin과 나눈 인터뷰에서 그가 밝힌 이야기를 들어보면, 뮤지컬 영화에 대한 마물리안의 이런 관점은 더 명확해집니다. 


연극을 뮤지컬로 옮길 때 음악과 노래 그리고 춤추는 장면을 넣기 위해 드라마를 과감하게 잘라내는 것은 불가피해 보인다. 그것은 좋은 드라마를 가진 원작을 망치지 않고 뮤지컬로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와 같다. 이야기의 주제는 손상될 것이고, 인물의 고유한 캐릭터는 볼품 없어질 테니까. 이야기와 크게 관련 없는 춤과 노래, 판에 박힌 코미디 같은 것들이 그동안 뮤지컬의 오랜 표준처럼 돼버렸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만들고 싶은 종류의 뮤지컬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음악극'이라는 새로운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줄거리는 대사와 노래, 춤과 음악을 매개로 표현되지만, 이 각각의 요소들은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Hugh Fordin, 『M-G-M's Greatest Musicals』, Da Capo Press에서 인용 및 번역)


버스비 버클리

마물리안이 뮤지컬 영화의 중심에 이야기를 놓았다면, 비슷한 시기 안무가와 감독으로 활동한 버스비 버클리 Busby Berkley는 무대 공연으로는 불가능할 비주얼과 규모로 브로드웨이를 압도합니다. 안무가로 영화에 처음 이름을 올린 뮤지컬 코미디 <우피 Whoopee>부터 무용수를 기용해 만화경 같은 무늬를 만들어냈던 버클리는 1933년 <그렇다고 그녀는 말해야 했다 She Had To Say Yes>로 영화 감독으로 데뷔합니다. 뮤지컬과는 전혀 관련 없을뿐더러 대공황 시대에 성적 수치심을 감내해야 했던 직업 여성의 고뇌를 그린 몹시 어두운 영화였습니다. 실업과 비정규직을 걱정하는 시대에 <카트> 같은 영화에 관객이 별로 들지 않았던 것처럼 리얼리즘에 가까운 버클리의 이 영화 역시 인기를 끌지 못했습니다. 우울한 현실을 반영하는 불편한 영화의 씁쓸한 운명이었겠지요.


그러나 대공황의 시대를 다시 배경으로 같은 해 선보인 <42번가 42nd Street>는 전혀 달랐습니다. 버스비 버클리는 다시 안무가로 돌아가 크레딧에 이름을 올립니다만, 전매특허 같은 그의 안무와 연출은 이 영화의 흥행에 한몫 톡톡히 했지요. 전반부가 쇼를 무대에 올리기 전까지 감독과 배우들의 애환을 다룬 음악 영화에 가까워 보인다면, 대미를 장식하는 영화 속의 쇼 [프리티 레이디]는 전형적인 코미디 뮤지컬 쇼로 보입니다. 강렬하고  관능적인 데다가 무척 흥겹죠. 음악과 관련해 한 가지 흥미로운 대목은 과거에 발표된 유명한 곡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연출자의 입을 빌어 내비치는 장면입니다.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배우들을 지켜보던 감독은 리허설을 중지시키고 매니저에게 이렇게 말하지요.


- 잠깐, 이 노래는 빼야겠소. 형편없어!

- 이 곡이 마음에 안 드세요?

- 마음에 들고말고. 1905년부터 쭉 이 곡을 좋아했소. 그런데 이게 리메이크인 줄 아시오?

- 관객들이 좋아할 텐데요.

- 바로 그것을 걱정하는 거요.


그렇습니다. 약 1년 사이에 기존의 노래를 재활용하는 것보다 새로운 곡을 만드는 분위기가 영화계에 형성된 겁니다. 평단과 관객을 동시에  사로잡는 데 성공한 <42번가>는 1933년 최고의 수익을 낸 영화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MGM의 그늘에 가려 뮤지컬 영화로 별 재미를 못 봤던 워너 브라더스는 곧바로 <1933년의 황금광들 Gold Diggers Of 1933>에 버스비 버클리를 다시 투입하죠. <브로드웨이 멜로디>를 만들었던 해리 버몬트의 무성 영화를 1929년 <브로드웨이의 황금광들 Gold Diggers Of Broadway>로 이미 한차례 리메이크했던 워너 브라더스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으로 사람들이 경제와 미래에 막연한 기대감을 품자 다시 뮤지컬 영화에 공을 들이기 시작한 겁니다. 새로운 노래와 음악 그리고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안무로요. <1933년의 황금광들>의 성공에 힘입어 워너 브라더스는 1938년 <파리의 황금광들 Gold Diggers In Paris>까지 이 시리즈를 세 편이나 더 제작했습니다. 그리고 버스비 버클리는 이 시리즈에 모두 참여해 놀라운 장면을 연출했지요.



버스비 버클리는 무용수 개개인의 재능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대신 매스 게임처럼 다수의 댄서들이 어울려 만들어내는 기하학적인 패턴에 더 집중했지요. 평론가들은 1차 세계 대전에 장교로 참전했던 버클리가 병사들의 사열을 보면서 이런 절도 있는 동작과 안무에 영감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루벤 마물리안과 마찬가지로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독특한 조감숏과 스타일리시한 편집은 버클리의 안무에 날개를 달아주었고, 작곡을 맡은 해리 워렌 Harry Warren과 작사를 맡은 알 더빈 Al Dubin 콤비의 리드미컬한 음악은 순수한 판타지의 세계로 백스테이지 뮤지컬을 인도했습니다. 그리그 그 판타지의 세계는 신기루 같은 모호한 허상이 아니라 인간의 육체를 빌어 구체적이고 생생한 이미지로 다가왔지요. 80년대부터 이미지와 사운드의 관계를 탐색한 프랑스 작곡가 미셸 시옹 Michel Chion은 버스비 버클리의 뮤지컬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 경탄합니다.


교항곡, 발레, 오페라가 영화에 앞서 이룩한 것과 비교해 영화는 이 분야에 어떤 기여를 했는가? 전 세계를, 전세계의 육체를, 세상 모든 사람들의 혈관을 이런 움직임, 근본적인 리듬에 종속시킬 수 있는 육체적이고 구체적인 리얼리티를 작동해 보여줬다는 것이다. 버클리의 영화는 바그너 같은 작곡가들이 꿈꿔왔던 가능성, 즉 리얼리티를 리듬 위에서 온전히 구축할 수 있는 능력을 이전에 한 번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에서 보여준다.(질 무엘릭 지음, 박지회 옮김, 『영화음악』, 이화여자대학출판부에서 재인용)


<브로드웨이 멜로디>로 본격적인 유성 영화의 시대에 돌입한 1929년에서 1933년까지 할리우드 영화에서 음악은 기술적으로, 기법적으로 크고 빠른 변화를 겪습니다. 대사와 음향과 음악을 각각 분리해 녹음하는 다중 트랙과 믹싱이 이 무렵  영화 사운드의 새로운 기술로 도입되지요. 또한 미국의 검열 제도인 헤이스 코드(Hays Code)가 시행되기 직전까지 할리우드 영화의 장르는 뮤지컬에서 갱스터, 성인, 코미디, 범죄, 공포, 애니메이션까지 다양하고 풍부해집니다. 노래를 위한 음악이 아니라 흔히 배경음악이라고 부르는 스코어의 중요성이 이제 서서히 대두되기 시작했죠. 할리우드 영화음악의 황금기로 일컫는 골든 에이지가 비로소 시작된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할리우드의 고전 영화음악 스타일을 완성한 작곡가들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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