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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 Oct 17. 2015

말하고 춤추고 노래하는 영화

<재즈 싱어>를 종교 개혁에 필적할만한 사건으로 바라본 프랜시스 골드윈 여사의 말은 과장일지는 몰라도 유성 영화가 일대 파란을 몰고 온 것은 분명했습니다. 작은 영화사에 불과했던 워너브라더스가 일약 메이저급으로 급부상하자 MGM을 비롯한 할리우드 제작사들은 부랴부랴 녹음 시설을 갖춘 스튜디오 신축 계획을 내놓았지요. 그러나 영화사들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극장도 참여해야 했죠. 1920년대 후반 미국 전역에 산재한 14000여 개의 극장 중 유성 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설비를 갖춘 곳은 약 500개에 불과했으니까요. 당장 유성 영화를 제작한다고 해도 배급할 수 있는 영화관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무성 영화의 인기가 차츰 시들해지고 있었을 때 <재즈 싱어>가 모처럼 가져온 활기를 제작자나 극장주 모두 외면하기는 어려운 노릇이었습니다. 가뜩이나 손님이 줄어들던 무성 영화관이 이젠 텅텅 빌 지경이 되었으니까요.


무성과 유성이라는 두 가지 영화 형식을 두고 고민에 빠진 영화인 중 몇몇은 새로운 변화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고, 반면 찰리 채플린처럼 무성 영화에 대한 사랑을 쉬이 포기하지 못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유성 영화의 위력을 재빨리 눈치챈 아내와 달리 MGM사의 사장이었던 새뮤얼 골드윈Samuel Goldwyn은 다소 회의적인 입장이었죠. 그의 말을 빌면, '평화로운 침묵에 익숙해진 관객들에게 소리 나는 영화는 히스테리가 될 것'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MGM은 할리우드 영화사 중 가장 늦게 사운드 시스템을 채택합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얄궂은 반전이 일어납니다. 마지막으로 유성 영화에 뛰어든 MGM사가 가장 먼저 성공한 최초의 뮤지컬 영화를 선보였던 겁니다. 바로 <브로드웨이 멜로디 Broadway Melody>였지요.

 

<브로드웨이 멜로디> 포스터


유성 영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유명해진 표현이 두 개 있습니다. 사실 오래전부터 연예계에 떠돌던 말 입니다만 <재즈 싱어>의 자막으로 등장하는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Show must go on)' 그리고 '모두 다 말하고 춤추고 노래한다(All Talking, All Dancing, All Singing)'는 MGM 영화사의 홍보 카피였죠.  1929년에 개봉한 <브로드웨이 멜로디>의 헤드 카피입니다만, 이 시대를 풍미한 쇼 비즈니스와 뮤지컬 영화의 성격이 거기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브로드웨이 멜로디>는 말하고 춤추고 노래하는 영화였으니까요.


보드빌 스타인 한 남자와 그를 사랑하는 두 자매의 삼각관계를 그린 이 영화는 28일 만에 뚝딱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철저한 제작 시스템으로 공장처럼 (무성) 영화를 찍어냈던 MGM에게 이런 빠른 속도는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었지요. 무대 뒤에서 일어나는 해프닝을 그린 백스테이지 뮤지컬의 원형이랄 수 있는 <브로드웨이 멜로디>는 작품성까지 인정받아 뮤지컬에 유독 인색한 아카데미 영화제 작품상까지 거머쥡니다. 게다가 그동안 유성 영화의 외국 수출을 가로막았던 통역의 어려움을 자막으로 해결했지요. 덕분에 약 40만 달러의 예산으로 4백만 달러에 가까운 흥행 수익을 거둡니다. 


<브로드웨이 멜로디>는 다른 유성 영화들처럼 보드빌 무대를 스크린으로 옮겨놓은 듯한 정적인 화면이 별로 없었습니다. 마이크의 성능이 아직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요. 그래서 말하고 노래하는 것은 가능했어도, 춤까지 추는 역동적인 영화는 한동안 기대하기 어려웠지요. 적어도 이 영화가 나오기 직전까지는 말입니다. 비슷한 시기 다른 뮤지컬 영화의 촬영 현장을 지켜본 작곡가 루이스 레비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유성 영화 개척기 동안 어디 한 군데도 고장 나지 않고 동시에 작동되어야 할 카메라나 녹음 기기들은 예외였다. 노래 한 곡을 녹음하려면 24시간 일해야 했으며, 각종 장비들이 갖춰진 스튜디오를 모조리 때려 부수고 싶은 충동과 싸워야 했다. (중략) 발성 영화 초창기의 스크린 스타들은 바닥에 분필로 칠한 카메라와 마이크 한계 표시선을 눈여겨 보면서 그들의 동작과 노래를 기억해야 했다. 배우가 느끼는 이런 신경질적인 긴장감은 몇몇 뮤지컬 스타에게도 영향을 끼쳤음이 틀림없다.(로저 맨빌, 존 헌틀리,『영화음악의 기법』, 영화진흥공사에서 재인용) 


애초 <재즈 싱어>처럼 무성과 유성 영화를 뒤섞으려 했던 <브로드웨이 멜로디>를 MGM이 완전한 유성 영화로 제작하기로 마음을 바꾼 것은 그들이 채택한 무비톤(Movietone) 덕분이었습니다. 영화를 촬영할 때도 카메라를 썼지만, 소리를 녹음할 때도 카메라를 썼던 겁니다. 네 대의 카메라를 동시에 돌려 촬영했기에 여분의 이미지와 사운드를 확보할 수 있었고 편집이 가능했던 거죠. 게다가 최초 촬영 시 음악을 미리 녹음해놓은 덕분에 재촬영이 필요할 경우 오케스트라를 다시 부르지 않아도 된다는 이점은 동기화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었고, 음악 연주에 추가로 들어가는 제작비 절감 효과까지 있었습니다. 쉽게 말해 녹음해 놓은 음악을 틀어놓고 입만 벙긋거리면서 춤을 추는 장면을 다시 촬영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역동적인 뮤지컬 영화도 가능했던 거죠. 요즘엔 촬영을 끝내고 후반 작업 단계에서 영화에 음악을 입히는 것이 일반적입니다만, 이런 '선 녹음 후 촬영'은 몇몇 현대 영화음악을 이해하는 데도 작은 실마리를 줍니다. 페데리코 펠리니와 니노 로타, 세르지오 레오네와 엔니오 모리꼬네처럼 먼저 음악을 작곡하고 영화를 촬영하는 방식으로 정교하게 발전했으니까요.   

 

나치오 허브 브라운(좌)과 아서 프리드(우)


<브로드웨이 멜로디>는 감독과 배우에게도 영광이었지만, 가장 큰 수확은 장차 MGM의 보물이 될 작사가 아서 프리드Arthur Freed와 작곡가 나치오 허브 브라운Nacio Herb Brown 콤비의 첫 작품이라는 점입니다. 아서 프리드가 이끄는 음악가 그룹은 <오즈의 마법사>, <파리의 미국인>, <사랑은 비를 타고>를 차례로 탄생시키면서 MGM을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의 제왕으로 군림하게 했지요. 특히 허브 브라운은 비슷한 시기에 나온 유성 영화의 주제가나 반주곡들이 단순한 배경음악으로 전락한 무성 영화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이들 콤비에게 음악을 맡긴 해리 버몬트Harry Beaumont 감독의 영향이 얼마간 작용했을 것입니다. <브로드웨이 멜로디> 이외의 작품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해리 버몬트는 워너 브라더스가 33년에 선보일 뮤지컬 영화 <황금광들 The Gold Diggers>을 이미 10년 전 무성 영화로 제작한 감독입니다. 무성 영화 시대의 감독임에도 음악적인 감각을 가졌지요. <브로드웨이 멜로디> 시사회 후 언론과 가진 허브 브라운의 짧은 인터뷰를 그대로 옮기면, 버몬트 감독은 뮤지컬 영화의 성공 비결이 음악에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해리 버몬트는 우리에게 주제곡을 원하지 않았다. 그가 원했던 것은 대사의 힘을 뛰어 너머 이야기와 액션을 담는 노래들이었다. 감독은 영화에 음악이 있어야 한다는 단순한 생각 때문에 그저 노래를 영화에 맞추지 않았다.


1890년대부터 미국 전반에 일어난 산업화 붐은 1927년에 최고조에 달했고 그해 <재즈 싱어>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브로드웨이 멜로디>에 이어 뮤지컬 영화들이 속속 선보였던 1929년 가을 무렵 대공황의 먹구름이 미국을 덮칩니다. 당시 미국 노동자 중 4분의 1 가량이 하루 아침에 실업자로 전락했고 주식의 가치는 폭락했으며 물건은 팔리지 않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주일에 6천만에서 7천만 명의 관객이 영화를 보기 위해 꾸준히 극장을 찾았습니다. 1941년까지 10년이 넘도록 대공황이 짙은 그늘을 드리웠는데도요. 많은 학자들이 이 미스터리한 불황 속 할리우드의 호황을 규명하기 위해 연구했습니다. 그중 역사 학자 딕슨 벡터 Dixon Wector는 자신의 저서 『대공황의 시대 The Age of the Great Depression 1929-1941』에 이렇게 기술합니다. 


이 시대 영화의 내용은 현실 도피에 맞춰져 있었다.
그 대부분은 삶에 피곤하고 지친 사람들이 사치와 멜로드라마, 치정 그리고 감정으로 가득 찬 결코 오지 않을 환상의 땅을 찾으려는 욕망을 반영한 것이었다.


앞서 영화음악 작곡가의 출현에서 1차 세계대전 중 비약적으로 발전한 미국의 영화 산업을 잠시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피곤하고 배고픈 삶의 위안을 무성 영화에서 찾으려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요. 비록 <브로드웨이 멜로디>는 산업 발전과 경제 호황 속에 탄생했습니다만, 곧 뮤지컬 영화는 대공황이라는 시름을 달래주는 위안과 동경의 대상으로 바뀐 겁니다. 그리고 뮤지컬 영화의 이런 역할은 2차 세계대전 때도 다르지 않습니다. 뮤지컬 영화의 스튜디오 제작 시스템은 1949년 야외 촬영을 처음 시도한 <온 더 타운 On The Town>이 나올 때까지 화사하게 치장된 세트 바깥으로 한 발짝도 나간 적이 없었죠. 현실의 소음을 차단하고 좋은 사운드를 얻기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만, 뮤지컬 영화의 스튜디오는 환상과 꿈의 세계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컸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대공황은 산업화된 영화를 한층 더 상업화시킵니다. 영화를 소비하는 관객의 취향이 무엇보다 중요해졌기 때문이었죠. 인도 서민들의 삶과 동떨어진 호사스럽고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를 춤과 노래에 곁들인 마살라 영화처럼 이 시대 뮤지컬 영화는 사람들의 대리욕구를 만족시켰던 것입니다. 


음반 조형물 앞에서 <브로드웨이 멜로디>를 자축하는 배우들과 번스윅 오케스트라의 기념 사진


불황에 허덕이는 대공황과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던 할리우드의 호황은 우연찮게도 시기가 거의 겹칩니다. 1930년 1월 주식 시장의 주가가 곤두박질쳤는데도, 같은 시기 할리우드에는 오히려 3만 명의 새로운 일자리가 만들어집니다. 무성 영화 시절 2억 달러에 달했던 투자비는 1930년 5억 달러로 두 배 넘게 치솟았죠. 새로운 일자리와 늘어난 투자비에는 음악가들이 차지하는 몫도 상당했습니다. 거의 모든 영화 제작사들이 전속 오케스트라를 소유하고 있었으니까요. 세트를 만드는 목수와 벽돌공, 미장이처럼 작곡가와 편곡가, 지휘자가 하나의 팀을 이뤄 오직 영화에 필요한 음악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만큼 수요가 있었지요. 1929년에서 1930년 사이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천 여편의 장편 유성 영화 중 약 200편이 뮤지컬이었고, 1929년 미국에서 유행한 노래의 90퍼센트 이상이 영화에 나오는 음악이었을 정도로 영화음악은 이 시대의 문화 상품으로 자리 잡습니다. 애초 영화의 경쟁 상대로 여겨졌던 라디오와 음반 산업도 뮤지컬 영화의 흥행을 도왔지요. 바이타폰으로 <재즈 싱어>를 선보였던 워너브라더스의 앨버트 워너Albert Warner는 뮤지컬 영화가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기도 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완벽하게 다듬어진 라디오의 음악 프로그램이
미국 전 지역의 활동 사진 후원자를 위해 새로운 시대를 열어줄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사 중 영화와 라디오 그리고 음반 산업의 시너지 효과를 가장 잘 활용한 제작사는 1928년에서야 영화계에 뛰어든 RKO일 것입니다. 워너브라더스사의 바이타폰, 폭스사의 무비톤으로 웨스턴 일렉트릭이 유성 영화의 사운드 시스템을 장악하고 있던 1927년, 에디슨의 제너럴 일렉트릭은 옵티컬 필름에 사운드를 녹음하는 새로운 방식을 개발해 실험을 마칩니다. 그 무렵 유성 영화 시장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라디오 코퍼레이션 오브 아메리카, 즉 RCA는 저예산 무성 영화 제작사인 필름 북킹 오피스(FBO) 그리고 영화에 밀리기 시작한 보드빌 극장 체인점들을 영화관으로 바꾸고 싶어 했던 케이스 알비 오퓸과 의기 투합해 RKO라는 영화사를 차립니다. 그리고 제너럴 일렉트릭의 사운드 시스템을 도입해 RCA 포토폰(RCA Photophone)으로 유성 영화를 제작했지요. 이 회사의 진가는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저 로저스 콤비로 뮤지컬 영화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30년대 중후반 빛을 발합니다만, 1929년에 개봉한 <싱커페이션 Syncopation>으로 이미 짭짤한 수익을 챙깁니다. 특히 RCA 포토폰으로 녹음한 영화의 사운드를 고스란히 라디오로 방송하면서 이 뮤지컬 영화는 흥행에도 성공하지요.


RKO 영화사의 로고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 아직 뮤지컬 영화의 황금기라 하기엔 이릅니다만, 이 무렵부터 영화사들은 흥행하는 영화만큼 흥행하는 음악에 대해 어느 때보다 관심을 가집니다. 물론 흥행을 위해 뮤지컬 영화에 좋은 곡을 쓰고 싶은 마음도 있었겠지만, 사실 그보다는 악보와 레코드 판매를 통해 영화에 사용한 노래들의 저작권 비용을 마련하고 또 부수적인 수입을 챙기기 위해서 였지요. 게다가 바이타폰이나 무비톤에게 영화 제작사들이 내야 할 동기화 기술 사용권은 징벌이나 다름없이 무척 비쌌습니다. 영화의 음악으로 가장 큰 수익을 내기 위해 음악 저작권을 지불해야 할 노래는 최소한으로 줄이고, 영화사가 직접 만든 노래는 최대한 널리 보급해 악보나 음반 형태로 판매해야 했죠. 그리고 대중의 귀를 사로잡으려면 음악이 자주 노출될 필요가 있다는 것도 깨닫습니다. 한때 거리를 뒤덮는 노랫소리로 길보드 차트를 좌지우지했던 리어카처럼, 혹은 동네 전파사 앞에 놓여있던 스피커처럼 라디오를 통해 새로운 음악들이 대중에게 더 자주, 더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합니다. 비록 할리우드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지만 세계는 대공황에 시달렸고, 혹시라도 그들에게 닥칠 불행한 미래에 대비하기 위해 영화와 방송, 음반 산업은 달콤한 밀월 관계를 선택합니다. 그리고 이런 관계는 한 세기에 가까워지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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