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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 Oct 08. 2015

엄마, 이것 좀 들어봐요

녹음 기술의 발전이 유성 영화의 탄생과 곧바로 이어진 것은 아닙니다. 넘어야 할 또 하나의 산이 있었지요. 무성 영화가 내러티브를 갖고, 섬세한 감정을 지니고, 액션이 복잡해지면서 이전에는 눈치채지 못했던 것을 느끼게 된 겁니다. 그동안 영화에 곁들인 음악이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요. 그것은 선곡의 문제라기보다 음악이 영화에 흐르는 타이밍에 관한 문제에 가깝습니다.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선율이 인물의 감정선까지는 아니더라도 배우의 동작과 어느 정도 일치해야 부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거죠. 에디슨이 어느 소프라노가 노래하는 장면을 촬영해 뉴 키네토폰으로 선보인 1913년. 뉴욕 타임스에는 눈길을 끄는 기사가 하나 실립니다.


그날의 진정한 센세이션은 영사 기사의 의도치 않은 실수에서 비롯됐다. 그는 축음기에서 나오는 소리보다 약 10초 내지 12초 먼저 영사기를 돌렸는데, 결과는 놀라웠다. 사회자가 등장해 위엄스러운 동작과 함께 입술을 움직였고 정중하게 인사를 한 다음 자리에 앉았다. 그 후에야 그의 말소리가 객석에 울렸다. 소프라노와 그녀가 부를 곡에 대한 소개였을 것이다. 화면에 등장한 가수가 입을 크게 벌려 노래할 때도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노래를 마친 그녀가 정중하게 인사한 뒤 퇴장했을 때 관객들은 웃음보를 터뜨렸다. 고음의 절정부로 치닫는 노랫말이 소프라노가 사라진 뒤에서야 울려 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Rene Clair,『The Art of Sound』, Oxford University Press에서 재인용 및 번역)


약 100년 전 해프닝이지만, 이 실수는 지금도 충분히 웃음을 터트립니다. 요즘 사운드에 관한 개그를 많이 보여주는 개그콘서트의 [베테랑]이라는 코너는 소리에 상황을 맞추는 코믹한 아이러니를 보여주지요. 관객에게는 즐거운 소동이었겠지만 그 옛날 극장주와 영사 기사에게는 피를 말리는 실수였을 겁니다. 축음기 대신 음악을 직접 반주하는 음악가들도 다르지 않았지요. 러닝 타임 내내 라이브로 음악을 연주해야 했던 음악가들은 영사기의 속도를 따라가느라 애를 먹었고, 갑자기 장면이라도 바뀔라치면 지휘자는 그 장면에 어울리는 음악이 지시된 악보를 찾아 허둥대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녹음 기술자와 별개로 발명가들은 연주자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각종 장치들을 고안합니다. 예를 들면 1923년 샤를 들라코뮌이 '영화 악보대(Cinepupitre)'라고 이름 붙인 기계나, 아예 스크린에 투영된 영상 하단에 지휘자만 알아볼 수 있는 표시로 제때 음악을 연주하도록 제안하는 라울 그리모앵 상송의 아이디어까지 무수한 장치가 나왔죠. 독일의 칼 로버트 블룸 Carl Robert Blum이 발명한 리드모놈(Rythmonome)도 그런 기계 중 하나일 겁니다.   


칼 로버트 블럼의 뮤직 크로노미터(Musik-Chronometer)


블룸의 리드모놈은 영상과 오케스트라의 연주 속도를 똑같이 맞추기 위한 일종의 메트로놈과 비슷합니다. 음악을 녹음한 것이 아니라 음악이 영화에서 어떻게 전개되는지 그 악보를 필름 형태로 보여주는 것이죠.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이 장비를 통해 영사기에서 나오는 이미지에 따라 작동되는 도표를 보고 연주곡의 속도를 조절할 수 있었습니다. 10년 남짓한 기간 동안 몇몇 유럽 국가에서만 사용되었기에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만, 무성 영화 시절부터 영화음악을 작곡한 프랑스 작곡가 다리우스 미요 Darious Milhaud에게 이 리드모놈은 퍽 인상적인 기계였나 봅니다. 그의 자서전 『음악 없는 노트 Notes Without Music』에 미요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필름이 돌아가는 것과 동시에 음악이 적힌 릴이 같은 크기의 막대기 두 개 사이에서 회전했다. 이 릴은 아주 근소한 시간차를 두고 영화보다 조금 늦게 시작됐는데, 영화를 상영하는 동안 스크린에 투영되는 장면은 지휘자의 시야에 들어오는 사각형 틀 안에 놓인 부분이 된다. 이런 방식으로 지휘자는 연주 속도를 필름에 정확하게 일치시킬 수 있었다. 


지금 관점으로 보자면 참 사소한 기술로 보입니다만, 장치를 고안한 발명가에게나, 그 장치를 사용했던 음악가에게나 이런 눈물 겨운 노력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모두 동기화(同期化, Synchronization)  때문이었습니다. 스마트폰이  일상생활에 통용되면서 동기화는 설명하기 한층 수월해졌습니다. 전기공학이나 통신에서 사용되는 용어지만, 영화의 사운드를 설명할 때도 자주 활용됐기 때문이지요. 바로 영상과 소리를 일치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테면 탁자에서 떨어진 컵이 깨지고 한참 뒤에 소리가 나는 것이 아니라 화면에서 컵이 깨지는 순간 날카로운 파열음이 나는 것,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손의 움직임과 멜로디의 진행이 다르지 않게 들리는 것, 혹은 입모양이 '오'로 보일 때 귀에 들리는 소리도 '아'가 아닌 '오'로 들리는 것이 이미지와 사운드를 동기화한 결과입니다.


포노 시네마 테아트르의 포스터. 좌측에는 영사기, 하단에는 축음기가 보인다

사운드의 녹음 기술이 크게 발전하지 못했던 100여 년 전 이 동기화는 무척 이뤄내기 어려운 기술이었지요. 소리 자체를 녹음하기도 어려웠습니다만, 소리가 담긴 디스크와 이미지가 담긴 영사기가 돌아가는 속도를 맞춘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힘들게 맞춘다고 하더라도 영사기의 톱니바퀴가 고장 난다거나 축음기의 바늘이 튀는 실수가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래서 소리가 난다는 초기 유성 영화들은 상영 도중 소리와 영상이 자주 어긋나는 바람에 에디슨의 활동 사진처럼 즐거운 소동을 일으키곤 했습니다. 하지만 기술적인 결함에도 <재즈 싱어>보다 앞서 만들어진 유성 영화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대중에게 미공개된 딕슨의 실험 유성 영화를 논외로 한다면, 최초의 유성 영화 중 하나로 꼽히는 <햄릿의 결투 Le Duel d'Hamlet>는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선을 보입니다. 뤼미에르 형제의 활동 사진이 상영된 지 불과 5년이 지난 시점이었죠. 당시 프랑스 연극계에서 꽤 유명한 여배우였던 사라 베르나르가 남장을 하고 햄릿으로 출연해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 한 장면을 연기합니다. 이 2분 남짓한 단편 영화를 만든 포노 시네마 테아트르(Phono-Cinema-Theatre)는 배우의 목소리를 따로 녹음해 영사기가 돌아가는 동안 원통형 축음기로 재생하는 방식을 채택해 영화를 상영했습니다. 당시 축음기는 아직 미완성에 가까웠기에 커다란 홀에 관객을 가득 채우고 영화를 상영할 수 없었고, 완벽하게 동기화된 기술도 보여주진 못했지만, 무성 영화 밖에 없었던 시절 영상에 소리를 입혔다는 점에서 기술적으로 무성 영화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1903년에 나온 유성 영화도 있습니다. 레옹 고몽 Leon Gaumant은 자신의 크로노포노그래프와 스피커 시스템을 결합해 특허를 받은 크로노그래프(Chronograph)를 만들었죠. 그가 베를린에서 선보인 단편 영화는 롤러 형식의 음반과 영사기를 전기적으로 연결해 한층 더 동기화에 성공한 기술을 선보입니다. 게다가 고몽은 1910년까지 이 기술을 계속 발전시켜 4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에서 영상과 소리를 무리 없이 재현해낼 수 있게 되죠. 프랑스가 1차 세계 대전에 휘말리는 바람에 그의 영화 산업은 위기를 맞기도 했습니다만, 그는 이 노하우를 바탕으로 가장 오래된 프랑스 영화 제작사인 고몽 영화사를 일궈냈지요.


앞서 영화음악가, 찰리 채플린 편에서 잠시 언급했던 프랑스의 녹음 기술자 외젠 오귀스탱 로스트 Eugene Augustin Lauste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스물세 살의 나이에 이미 53개나 되는 특허를 보유했던 그는 1886년 미국으로 건너와 에디슨 연구소에서 6년 동안 몸담습니다. 그리고 에디슨을 떠난 로스트는 1904년 최초로 필름에 소리를 녹음하는 아이디어를 고안해냈고, 1907년 영국에서 그 특허권을  인정받습니다. 그가 받은 특허권의 제목은 이렇습니다. '사람이나 사물의 활동 및 움직임을 그들이 발생하는 소리와 동시에 기록하고 재생하는 기술(Process for recording and reproducing simultaneously the movements or motions of persons or  motions of persons or objects and the sounds produced by them)' 그가 채플린에게 보낸 편지는 허풍이 아니었던 겁니다.


리 드 포레스트와 그가 발명한 포노필름이 장착된 카메라


로스트 이후 필름에 소리를 직접 녹음하는 기술은 급물살을 탑니다. 영사기와 축음기를 따로 돌릴 필요가 없으니 이미지와 사운드의 동기화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었죠. 덴마크와 독일을 거치면서 조금씩 진보된 이 기술이 '라디오의 아버지'라 불리는 미국 발명가 리 드 포레스트 Lee De Forest의 관심을 끈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진공관을 발명해 웨스턴 일렉트릭에 사용권을 판 그는 필름에 소리를 녹음하는 기술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킵니다. 그 결과물이 포노필름(Phonofilm)이었지요. 가진 돈을 다 쏟아부어 활동 사진들을 촬영한 포레스트의 포노필름은 1924년 뉴욕 리볼리 극장에서 상영됩니다. 보드빌이나 뮤지컬, 연설 장면들을 소리와 함께 촬영한 것이었지요. '이 활동사진은 음악과 말하는 장면이 동기화되어 보입니다'라는 설명이 덧붙여진 획기적인 영상이었습니다만, 할리우드 영화사들은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영화사들이 직접 배급하고 운영하는 체인 극장들을 섭외하기 어려웠던 포레스트는 몇몇 독립 사설 극장에서 겨우 상영회를 가질 수 있었고, 1926년 그의 회사는 파산하고 맙니다. 비록 그의 동기화 기술이 음반으로 소리를 재생하는 바이타폰(Vitaphone)보다 현대 유성 영화의 표준에 더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요.


공교롭게도 포레스트의 포노필름이 파산하던 그 해. 작은 영화사였던 워너브라더스와 바이타폰 회사가 의기 투합한 <돈 주앙 Don Juan>이 뉴욕 워너 극장에서 첫 선을 보입니다. '활동사진에 혁명을 일으킬 사건'이라는 휘황찬란한 광고 문구와 세금을 제외하고도 무려 10달러(2015년 기준으로 환산하면 125달러의 가치)라는 거액의 시사회 입장료를 제시하면서요. 대사 없이 동기화된 음악과 음향을 선보였을 뿐이지만, 일주일치 영화표가 모두 동이 날 정도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러니 <재즈 싱어>의 주인공 로빈이 십 수년만에 만난 어머니에게 '엄마, 이것 좀 들어봐요'라고 말한 다음, 쇼에서 부를 곡이라며 'Blue Skies'를 노래하는 장면을 확인하기 위해 사람들은 극장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 이전에 발명된 유성 영화들을 미처 볼 기회가 없었던 일반 관객들에게 앨 졸슨의 또렷한 말소리는 더더욱 그랬을 겁니다.


1926년 8월 개봉을 예고하는 영화 <돈 주앙>의 신문 광고


흥미로운 점은 당시 영화사는 음악을 녹음하는 것이 유일한 관심사였지, 대사는 그들의 관심 대상이 전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회의적이었지요. 애초 워너브라더스사가 바이타폰의 사운드 시스템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지방 소도시의 작은 극장에서도 오케스트라를 갖춘 대도시와 똑같은 음악을 들려주기 위해서 였습니다. 게다가 영화에 소리를 입히려 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오케스트라의 유지 비용 때문입니다. 해마다 극장에 소속된 오케스트라를 유지하는데 드는 비용이 20만 달러나 소요됐던 것에 반해 축음기를 활용하면 영화 한 편 당 구입비로 만 오천 달러를 지불하면 됐으니까요. 때문에 <재즈 싱어>의 주인공인 앨 졸슨이 촬영 도중 대사를 녹음하자고 제안했을 때 영화사 관계자들은 누구도 그의 아이디어에 선뜻 동의하지 못했습니다. 


바이타폰을 개발하기 위해 웨스턴 일렉트릭에게 돈을 지불하고 <돈 주앙>과 <재즈 싱어>를 차례로 제작하면서 불어난 예산 때문에 채권자들에게 시달려야 했던 워너브라더스사에게 앨 졸슨의 아이디어는 도박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영화사는 영화 전체가 아니라 극히 일부분만 대사를 소리로 대체합니다. 모종의 실험이었죠. 게다가 속사포나 다름없는 앨 졸슨의 대사는 시나리오 작가가 써준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배우가 즉흥적으로 만들어낸 것이었습니다. 원래 무성 영화였기에 그 장면을 위해 미리 써놓은 대사가 없었던 겁니다. 그러나 개봉한 영화가 중간쯤 지난 지점에서 돌연 무성 영화의 익숙한 자막 대신 배우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때 관객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그것은 곧 뜨거운 환호로 바뀝니다. 그리고 영화사는 재빨리 그것을 홍보의 수단으로 삼았지요.


이 영화에서 앨 졸슨은 노래하고 춤을 출 뿐 아니라
일상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똑같이 자연스러운 어투로 말을 합니다.


문득 아바의 노래가 떠오릅니다. 'Winner Takes It All'.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한다고 했던가요. 최초의 유성 영화도, 최초의 발성 영화도, 소리와 영상을 최초로 동기화한 영화도 아니었지만 <재즈 싱어>는 그때까지 나온 크고 작은 유성 영화의 업적을 모조리 날려버릴 수 있는 대대적인 흥행을 거둡니다. 워너브라더스의 바이타폰에 대항해 무비톤(Movietone)이라는 독자적인 사운드 시스템으로 경쟁하던 폭스사의 사장 윌리엄 폭스마저 돈을 벌어들이기 위해 자신이 소유한 뉴욕 록시 극장의 문을 활짝 열어줄 정도였으니 <재즈 싱어>의 흥행 파워는 그야말로 가공할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귀찮게 파고들어가지 않는다면 눈감아줄 수 있는 '최초의 (흥행한) 유성 영화' 타이틀도 거머쥐게 되었죠.


워너브라더스의 경쟁사인 폭스사가 소유한 록시 극장의 <재즈 싱어> 상영 광고


그렇다면 놀라운 기술을 보여준 이전의 유성 영화들은 왜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을까요? 거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유성 혹은 발성 영화로 부를 수는 있지만 동기화 기술이 서툴렀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볼만한 동기화를 보여주었다고 해도 영화적 재미가 떨어지는 오페라나 보드빌의 실황 공연 혹은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영상들은 관객의 구미를 별로 당기지 못했죠. 지금도 그렇지만 오페라나 보드빌은 오히려 라이브 공연이 더 재미있었던 겁니다. 또한 배우의 목소리를 녹음하기 위해(아직 후시 녹음의 개념이 없었습니다) 배우가 마이크 구실을 하는 확성기 앞에서만 연기를 해야 했기 때문에 무성 영화처럼 역동적인 액션을 연출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찰리 채플린의 요절복통 코미디 영화나 버스터 키튼의 아크로바틱한 몸 연기가 돋보이는 <제네럴 The General> 같은 작품은 유성으로 제작할 엄두를 내지 못했죠.  


이유는 또 있습니다.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주 기법으로 이미지의 편집은 어느 정도 가능해졌지만 소리의 편집은 아직 걸음마 단계였지요. 오히려 사운드의 편집은 기계적인 동기화보다 인간의 감각에 의지해야 하는 더 복잡하고도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선곡과 동기화를 너머 부딪히게 될 이 문제에 대한 시행착오는 과거가 아니라 앞으로 풀어가야 할 숙제였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채플린이 지적한 대로 유성 영화를 외국으로 수출할 경우, 외국어를 하는 배우들을 따로 고용해 순회 공연을 해야 했기에 수지가 맞지 않았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로 꼽을 수 있을 겁니다. 무성 영화를 상영할 때마다 오케스트라를 동원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유성 영화를 제작했는데, 통역을 위해 다시 상당한 비용을 들여야 하니 영화사로서는 내키지 않았던 거죠.


4분의 3이 무성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재즈 싱어>는 요즘 관객들이 본다고 해도 재미있을 영화입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하기 위해 전통을 고집하는 아버지와 갈등을 빚고, 결국 음악으로 화해한다는 줄거리는 근래 제작되는 영화와 드라마에도 공공연하게 사용되는 소재지요. 게다가 뮤지션이 주인공이자 이야기의 중심인 완벽한 음악 영화입니다. 물론 러브 테마로 사용된 차이코프스키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플롯과 전혀 상관없이 단지 당시 사람들이 좋아하는 곡이라는 이유만으로 삽입됐지만, 주인공의 갈등을 풀어주는 유대교 성가 'Kol Nidre'나 당시 재즈씬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노래들은 분명 이 영화의 또 다른 매력으로 작용했을 겁니다. 


<뉴욕의 불빛> 포스터, '최초 전체 발성 영화'라는 문구가 눈에 띤다. 


<재즈 싱어>의 성공에 힘입어 바이타폰과 제휴한 워너 브라더스는 이듬해 무성과 유성 영화의 하이브리드나 다름없는 어중간한 형식의 영화 두 편을 더 개봉한 뒤에야 '최초의 전체 발성 영화'라는 타이틀을 걸고 <뉴욕의 불빛 Lights of New York>을 마침내 선보입니다. 그러나 음악보다 대사가 중심인 이 영화는 예산보다 다섯 배나 높은 수익을 올리긴 했지만, 열 배에 가까운 이익을 안겨준 <재즈 싱어>의 인기에는 미치지 못했죠. 문자 그대로 처음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영화가 말을 한다는 것에 너무 의미를 둔 나머지 정작 영화적인 재미는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유성 영화가 나오고 몇 년 뒤에 만들어졌다면, 다섯 배의 수익은 언감생심 꿈도 꾸기 어려울 정도로 재미가 없었죠. 최초의 100% 발성 영화라는 명예로운 타이틀을 가졌으면서도 이 영화가 사람들에게 잊힌 이유입니다.


게다가 워너와 경쟁하던 폭스사는 무성 영화 <영광이 무엇이길래 What Price Glory>에 그들의 사운드 시스템인 무비톤으로 음악과 음향 효과를 다시 녹음해 1927년 재개봉합니다. <재즈 싱어>의 열기 속에서도 이 영화의 테마곡 'Charmaine'은 그해 따로 음반이 제작될 정도로 상당한 인기를 끌었지요. 그에 뒤질세라 워너브라더스 역시 앨 졸슨을 주연으로 다시 무성 영화와 유성 영화를 뒤섞은 <노래하는 바보 The Singing Fool>를 극장에 올리면서 팽팽한 라이벌 구도를 이룹니다. 물론 이 영화에 삽입된 'Sonny Boy' 역시 백만 부의 악보와 백만 장의 레코드 음반을 판매하면서 히트하는 영화음악의 가능성과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재확인시킵니다.


유성 영화가 도래하면서 극장에 소속된 오케스트라는 서서히 몰락의 길에 들어서지만, 이제 상영이 아니라 제작 단계로 영화에서 음악의 중심이 옮겨집니다. 1930년대를 화사하게 물들일 뮤지컬 영화는 바로 거기에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지요. MGM 영화사 사장 새뮤얼 골드윈의 아내 프랜시스 골드윈은 <재즈 싱어>를 관람한 뒤 잔뜩 상기되어 이렇게 외칩니다.


마틴 루터가 자신의 주장을 교회 문에 못 박은 이래
문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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