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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 Sep 25. 2015

영화음악가, 찰리 채플린

찰스 스펜서 채플린 Charles Spencer Chaplin이라는 본명보다 찰리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한 채플린에 대해 많은 이들이 글을 썼습니다. 채플린 스스로도 자서전을 남겼습니다만, 그의 삶은 동시대 작가들의 눈에 더없이 흥미로워 보였기 때문이었을 테지요. 채플린의 생애를 다룬 수많은 판본 중 영화 비평가 데이비드 로빈슨이 쓴 전기가 있습니다. 꽤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사랑받은 베스트셀러죠. 채플린과의 인터뷰를 통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윤색될 수도 있는 사실을 검증하기 위해 상당한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한 그의 책이 유난히 사랑을 받은 것은 인간 채플린의 모습에 누구보다 가까이 다가갔기 때문일 겁니다. 


그 책을 바탕으로 리처드 아텐보로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채플린>에는 영화음악과 관련해 흥미로운 몇 장면이 등장합니다.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는 꼬마 채플린의 모습과 무성에서 유성 영화로 넘어가는 시절 그를 찾아온 어느 녹음 기술자와의 만남 그리고 중년의 채플린이 스튜디오에서 음악을 녹음하는 모습이 그것이죠. 배우와 감독으로서 채플린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가 악기를 연주하고 또 자신의 영화에 음악까지 작곡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채플린이 9살부터 활동했던 '요크셔의 여덟 소년들'의 신문 광고 사진

    

연예인으로서 채플린의 커리어가 시작된 것은 1898년 무렵입니다. 심신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어머니와 생이별을 해야 했던 그는 아홉 살 나이에 나막신 춤을 추는 공연단에 들어가죠. 생계를 스스로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람들 앞에서 공연하는 것을 즐겼던 소년의 끼도 거기에 한 몫 했을 겁니다. 극단에서 7년을 보내고 사춘기에 들어선  열여섯 살의 채플린. 그는 조금씩 모은 돈으로 첼로와 바이올린을 마련해 악단의 연주자로부터 교습을 받았고, 즉흥 연주가 가능할 만큼 솜씨가 좋아졌습니다. 채플린의 이모였던 케이트 힐은 그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본 사람 중 하나였죠.


만일 찰스 채플린이 영화 배우로 계속 남아 있게 된다면 음악계는 천재 하나를 잃는 셈이 될 것이다. 어렸을 때 그 아이는 어떤 음악이든 귀에 들리기만 하면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손길을 멈추고 음악이 멈출 때까지 그 조그만 손으로 박자를 치며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훗날에는 몇 시간씩 피아노 앞에 앉아서 즉흥적으로 작곡하곤 했다. 첼로는 그 아이가 가장 좋아했던 악기였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첼로가 너무도 슬프기 때문’이다. 나는 첼로를 연주하는 그 아이의 표정이 변하고 코드를 짚는 그 조그만 손이 떨리는 것을 바라보고 즐거웠다. 그것은 거의 애무와도 같았다.(데이비드 로빈슨, 『거장의 생애와 예술 채플린』, 한길아트에서 재인용) 


미국 순회공연 중의 찰리 채플린, 1912년 경

형 시드니의 소개로 1908년 프레드 카노가 운영하는 무언극 극단에 들어간 19살의 채플린은 인사불성이 된 주정뱅이 연기로 소위 ‘뜨는 코미디언’으로  주목받습니다. 그리고 몇 년 뒤에는 미국의 영화 제작자겸 감독이었던 맥 세넷의 눈에 띄면서 할리우드에 발을 들여놓게 되지요. 카노 극단이 미국 순회 공연을 했던 1912년 경이었습니다. 이 때도 채플린은 애지중지 아끼는 악기를 순회 공연 내내 가지고 다니면서 음악에 대한 열정을 멈추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1920년대에서 40년대 사이 슬랩스틱 코미디로 미국인의 커다란 사랑을 받은 <로렐과 하디>의 주인공 스탠 로렐은 채플린과 함께 카노 극단에 몸담았던 배우 중 하나였습니다. 존 맥케이브가 쓴 또 다른 채플린의 전기 『찰리 채플린』에는 로렐의 입을 빌어 순회 공연 당시 그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찰리는 바이올린을 가져가려고 애썼다. 그가 왼손을 썼기 때문에 악기를 왼손잡이용으로 조정했고 틈틈이 짬을 내 몇 시간씩 연습하려 했다. 한 번은 첼로를 가져왔는데 그것 역시 채플린이 손을 뻗으면 언제나 닿을만한 곳에 놓여있었다. 이 무렵에 그는 음악가처럼 차려 입었는데 녹색 벨벳 소매와 깃이 달린 황갈색 코트를 입고 챙이 달린 모자를 쓰고 다녔다. 게다가 길게 기른 머리카락은 어깨 뒤로 흘러 내릴 정도였다. 극단 사람들 중 누구도 찰리가 그 다음에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극단을 떠나 키스톤 영화사의 간판 배우로 활약했던 채플린은 계약이 만료되면서 1915년 시카고의 다른 영화사로 옮깁니다. 그러나 키스톤에서 활동했던 1년 사이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자신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는 것을 미처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그를 모델로 만화와 노래 그리고 각종 캐릭터 상품들이 곳곳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사실도요. 채플린의 이름을 딴 광고 회사와 음악회사를 설립한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찰리와 형 시드니는 억척스러울 정도로 돈을 모으려 했지요. 하지만 금방 만들어졌다가 또 금세 사라지는 저렴한 상품들을 일일이 찾아내 로열티를 물리는 일이 유지 비용에 비해 별로 효과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회사는 얼마 후 문을 닫습니다. 그러나 이 회사를 통해 채플린은 세 곡의 노래 ‘Oh! That Cello(오! 첼로)’와 ‘There Always Someone You Can’t Forget(언제나 그 사람을 잊을 수 없네)’, 그리고 뉴욕 히포드롬 극장 자선공연에서 선보인 ‘The Peace Patrol(평화 순찰대)’를 출판합니다. 그가 만든 최초의 음악들이었지요. 


<방랑자>, 1916

찰리 채플린이 영화음악에 관여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초반으로 보입니다. 아직 무성영화의 시대였죠. 자신이 출연할 영화에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까지 도맡았던 그는 또 다른 재능을 살려 영화에 사용할 음악까지 신경 썼던 것입니다. 정식으로 음악 교육을 받지 못했기에 늘 다른 음악가의 도움을 받아야 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제작하는 영화마다 악보로 옮겨지지 않은 멜로디가 불쑥 샘솟곤 했습니다.


영화음악이라고 말하기에는 어렵습니다만 <파리의 여인>이 개봉했던 1923년, 채플린은 관객을 위한 서비스로 영화 상영 전 영국의 뮤직 홀 혹은 미국의 보드빌에서 종종 활용됐던 음악 공연을 준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무렵 극장은 단순히 영화를 상영하는 것뿐만 아니라 관객을 끌어 모으고, 영화 상영을 기다리는 무료한 관객들에게 여흥을 제공하기 위해 이런 무대 공연이 이루어지곤 했지요. 무성 영화가 막 탄생했던 시절, 버라이어티 쇼인 보드빌의 한 꼭지로 활용됐던 영화가 이제 영화 상영에 더 무게를 두면서 주객이 전도되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내가 뉴욕에서 만든 영화 <파리의 여인>의 상영 전 행해졌던 서곡을 들 수 있다. 당시 모든 영화는 대략 30분 정도의 서곡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이 갑작스러운 공연에 대한 각본도 없었고, 줄거리도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에게 ‘베토벤 소나타’의 음률 속에서 감상적인 색조가 떠올랐다. 사람들은 예술가들이 모인 무대를 주시했으며, 어둑어둑한 곳에 숨어 바이올린 연주자 주위에 모인 집시들을 쳐다봤다. 이런 모습들을 나는 무대 위에서 거듭 반복했는데, 이것은 단 이틀 동안 준비한 것이었다. (한스 크리스찬 슈미트, 『영화음악의 실제』, 집문당에서 재인용)


<황금광 시대>를 한창 제작할 당시인 1925년. 채플린은 에이브 라이만의 오케스트라와 함께 ‘Sing A Song(노래하다)’와 ‘With You, Dear, In Bombay(당신과 함께, 내 사랑, 봄베이에서)’가 수록된 10인치 레코드를 취입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찰리 채플린이 이 음반을 녹음했을 때 작곡과 가사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객원 지휘자와 바이올린 솔로 연주자로도 참여했다는 것이죠. 훗날 그가 자신의 영화음악을 녹음하기 위해 지휘봉을 잡았던 것도 젊은 시절에 이런 경험을 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에이브 라이만 밴드와 호흡을 맞춰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채플린

 

찰리 채플린이 처음으로 영화음악 작곡가로 이름을 올린 작품은 <시티 라이트>입니다. 유성 영화의 시대가 도래하고 거의 4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무성 영화를 고집했던 그가 내놓은 영화였지요. 흥미로운 것은 유성 영화의 시작을 알린 <재즈 싱어>가 세상에 나오기 약 10년 전인 1918년, 채플린에게 유성 영화를 제작할 기회가 이미 있었다는 것입니다. 


영화 <채플린>에도 잠시 등장하는 녹음 기술자 외젠 오귀스탱 로스트 Eugene Augustin Lauste는 그에게 편지를 보내 축음기 없이 필름에 음악을 기록할 수 있는 획기적인 기술을 발명했음을 소개하죠. 하지만 채플린은 거절합니다. 그는 무성영화가 몸짓과 표정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무언의 영화이기에 영어를 모르는 다른 언어권에서도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말하는 영화’는 언어의 장벽에 부딪혀 머지않아 외면당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그러나 유성영화에 대한 채플린의 부정적인 생각은 언어에 관한 것일 뿐 오히려 음향과 음악에 관해서는 달랐습니다. 특히 음악은 그의 익살스러운 제스처만큼 어디서나 통하는 만국 공통의 힘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말을 포기한 대신 채플린은 영화음악에 더욱 집중합니다.


채플린의 머릿속에서 맴도는 멜로디를 연주할 수 있는 음악으로 옮기기 위해 작곡가 아서 존슨과 앨프레드 뉴먼이 기용됐습니다. 6주에 걸쳐 만든 <시티 라이트>의 영화음악은 채플린이 입으로 어떤 멜로디를 읊으면 아서 존슨은 그 선율을 재빨리 악보에 옮겨 적는 방식으로 진행됐죠. 멜로디가 연주곡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편곡과 오케스트레이션 작업이 더해졌고, 35명의 연주자가 동원되어 앨프레드 뉴먼의 감독 아래 녹음이 이루어졌습니다. 


찰리 채플린은 <시티 라이트>의 음악이 극장에서 실시간으로 연주되길 원했지만, 이제 유성영화가 대세가 된 30년대로 접어들면서 극장에 소속된 악단들이 거의 사라졌기에 어쩔 수 없이 영화음악을 녹음해 사용할  수밖에 없었지요. 아직 녹음 기술이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시대였으므로 음질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다양한 스코어와 삽입곡이 조화를 이루는 그 영화음악은 충분히 주목할만했습니다. 채플린이 작곡한 첫 번째 영화음악이라는 의미를 차치하고서라도 말입니다.


첼로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채플린, 1942년


<시티 라이트>가 개봉된 후 신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채플린은 그저 입으로 멜로디를 읊었을 뿐 그것을 온전한 음악으로 만든 것은 아서 존슨이라며 음악가에게 공을 돌립니다. 그러나 새로운 영화의 음악 작업을 할 때마다 음악가들과 심심치 않게 충돌하기도 했습니다. 이를 테면 ‘영화음악의 아버지’라 불렸던 데이비드 락신은 <모던 타임즈>에 편곡자로 참여했다가 1주일 만에 해고당하죠. 1983년 락신이 잡지 『계간 의회 도시 저널』 여름호에 기고한 회고에는 채플린에 대한 서운함이 느껴집니다. 


자수성가한 독재자들 대부분이 그렇듯 채플린도 직원들에게 무조건 복종을 요구했다.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견해에 대해 즉각 동의를 받기만 했던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뿐이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스튜디오를 마음대로 장악하는 일이 자신이 <모던 타임스>에서 개탄했던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모순을 이해할 수 없었거나 이해하려고 들지 않았던 것 같다. 반면에 나는 나를 고용한 사람의 생각을 되풀이하는 것을 내 직무로 여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필요할 때면 거침없이 그의 의견에 반대했다. 나는 그가 곁에 독자적인 견해를 가진 측근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충분히 알고 있을 줄 알았다.


정식 음악 교육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자격지심 때문이었을까요? 채플린은 자신의 머리에서 나온 선율을 편곡하는 과정에서 음악가들이 오히려 영화음악을 가벼이 다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원했던 것은 우스꽝스러운 영화 캐릭터와 대조를 이루는 우아하고 로맨틱한 선율이었고, 그런 음악이 눈물겨운 코미디를 감정적으로 한 차원 더 끌어올릴 수 있으리라 여겼죠. 미소와 눈물 한 방울. 영화 <키드>의 운을 떼는 자막에 등장하는 이 대사처럼 채플린은 늘 심금을 울리는 코미디를 사랑했고, 비정한 사회와 삶의 어두운 그늘을 들여다봤습니다. 그의 말대로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 떨어져서 보면 희극인 우리네 인생을요. 오로지 웃음보를 자극하는 코미디 요소만을 부각해 단발적인 웃음을 터뜨리려는 단순한 배경음악을 그는 싫어하다 못해 혐오했습니다. 때로는 그런 음악이 꽤 효과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요.


채플린과 작곡가 데이비드 락신. 채플린은 이 사진을 촬영한 다음날 영국으로 떠났고, 미국은 그를 추방했다.


영화에 음악을 입히는 작업을 몇 차례 해보고 나서 채플린은 녹음이 이루어지는 스튜디오에 나가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혹시 음악을 과장해서 연주하는 것은 아닌지 일일이 지켜보곤 했습니다. 작곡가 메러디스 윌슨의 표현을 빌면, ‘먹이를 찾아 눈을 반짝거리는 날쌘 족제비’와도 같았지요. 음악을 작곡할 때도 머리에 떠오른 악상을 몇 소절 휘파람을 불거나 피아노 건반을 두드려 알려주고 난 뒤, 나머지 부분을 전적으로 음악가에게 일임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채플린은 완전히 만족할 때까지 수십 번씩 반복해 세부적으로 악보를 수정해가면서 작곡가들과 입씨름을 벌였습니다. 배우에게서 원하는 연기가 나오고, 촬영된 필름이 완벽한 리듬을 갖출 때까지 수 차례 반복해서 찍고 또 편집했던 것처럼 음악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던 것이지요. 


이런 고된 작업 과정을 지켜봤던 채플린의 어린 아들은 아버지의 완벽주의 때문에 음악가들이 거의 고문을 당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에드워드 파웰은 악보를 쓰는 데 너무 열중한 나머지 침침해진 시력으로 인해 안과를 찾아야 했으며, 하루 스무 시간씩 작업하면서 체중이 11 킬로그램이나 빠진 데이비드 락신은 집으로 돌아갈 기력이 없어 스튜디오 바닥에서 잠을 청했고, 또 앨프레드 뉴먼은 녹음실에서 몰래 눈물을 훔쳐야 했습니다. 


유성 영화가 탄생하면서 “유일하게 좋은 것이 음악을 마음대로 넣을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던 채플린은 자신이 제작한 영화만큼이나 음악에 대해서도 확고부동한 신념이 있었습니다. 또한 영화에서 음악이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음악이 영화 자체를 능가할 수는 없다는 사실도 인정했습니다. <위대한 독재자>의 개봉 후에 가진 언론 인터뷰에서 채플린은 영화음악이 연주회에서 듣는 음악과 전혀 다른 성격을 가졌다고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지요.


영화음악은 카메라가 실어나르는 것보다
청중에게 실제로 더 많은 소리를 전달할 수 있지만,
카메라가 내려는 목소리보다 더 커서는 안 된다


할리우드 영화음악의 황금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무렵인 40년대에 채플린은 지금도 영화음악의 전통처럼 전해지는 이런 사실을 스스로 체득했던 겁니다. 많은 작곡가와 편곡자들을 신경쇠약에 걸리게 했지만, 채플린과 호흡을 맞췄던 음악가들에게 그 경험이 마냥 고통의 연속이었다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채플린의 고약한 악담에 진저리를 치며 앨프레드 뉴먼과 떠났던 데이비드 락신은 채플린과의 음악 작업을 놀라운 경험으로 기억하고 있고, <위대한 독재자>의 음악을 작업했던 메러디스 윌슨은 적어도 영화음악에서 당시 채플린에 견줄만한 완벽주의자를 본 적이 없다고 회상하고 있으니까요. 이런 완벽주의는 스위스 망명 시절, 자신이 만든 과거 무성 영화에 새로운 멜로디를 스스로 입히려 노력했던 작업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52년 <라임라이트> 세트장에서 채플린에게 바이올린을 지도하는 버스터 키튼


다른 사람의 특징이나 행동을 포착해 절묘한 코믹 연기로 승화시킨 채플린의 재능은 배우로서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지만, 음악에 있어서도 이 흉내내기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그가 음악을 터득할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폴란드의 영화음악가 즈비그니에프 프라이즈너나 미국의 대표적인 영화음악가 중 한 사람인 대니 엘프먼 역시 정규적인 음악 수업을 받고 작곡가로 데뷔한 것이 아니라 다른 뮤지션의 곡을 따라 연주하거나 거장이 남긴 악보를 베껴가면서 스스로 음악을 터득한 케이스죠. 소년 시절의 존 윌리엄스 역시 그랬습니다. 


보드빌 가수였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음악적 재능에,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무대 경험을 통해 체득한 리듬감 그리고 바쁜 와중에서도 틈틈이 악기를 연주하며 익힌 표현력은 채플린에게 살아있는 음악 교육의 장이 되었던 셈입니다. 가령 <모던 타임스>에 등장했던 떠돌이의 테마곡에서 조지 거슈인의 흔적을, 냇 킹 콜의 보컬 버전으로 더욱 유명세를 탄 ‘Smile’에서 오페라의 희미한 향기를 느꼈다면 그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 음악들을 작곡할 때 채플린은 편곡자들에게 ‘거슈인처럼’ 혹은 ‘푸치니의 스타일로’라는 별도의 주문을 내려 그 곡들을 차례로 완성시켰기 때문이지요. 채플린의 생애 내내 이어진 수많은 송사 중 저작권 시비와 관련된 내용이 심심치 않았던 것은 그의 영화와 음악이 이 흉내내기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았기 때문일 겁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이기도 하니까요.

 

만년의 채플린은 과거 자신이 제작한 무성영화에 새로이 음악을 입혀 녹음했다


무성 영화음악을 전문으로 복원하는 음악가 티모시 브록은 채플린 사후 유족의 요청에 따라 그의 무성 영화 복원을 위해 오랫동안 수장고에 잠들어있던 악보들을 살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채플린이 음악 교육을 받지 못한 것이 결코 흠결이 되진 않는다고 평가합니다. 타고난 음악 감각이 채플린이 연출한 영화 속에서 조화를 이루었고, 침묵하는 영화에 담긴 목소리의 본질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가 창조해낸 캐릭터와 마찬가지로 그 음악 역시 코미디와 페이소스 그리고 기량이 균형을 이룬 결과라는 겁니다. 


베테랑 작곡가 칼 데이비스 역시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죠. 1989년 찰리 채플린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시티 라이트>를 상영하는 이벤트에서 오케스트라의 라이브 연주를 담당했던 그는 수많은 채플린의 작품들을 보면서 영상과 음악이 서로 단단히 껴안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채플린이 연기했던 떠돌이 캐릭터가 영화 속에서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르고 또 발레 동작 같은 우아한 모습으로 좇기거나 춤을 추는 모습이 공공연하게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요. 채플린 역시 음악을 작곡할 때마다 자신이 연기했던 동작을 녹음 직전 스튜디오에서 음악과 맞춰보려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에게 이미지와 사운드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화를 이루는 동일한 무게의 표현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일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음악은 늘 그와 함께했습니다. 거리의 악사가 연주하는 멜로디에 매혹되어 가난의 시름을 잠시 잊었던 아홉 살의 채플린은 배우로 성공하면서 난생 처음 본 오페라 [탄호이저]에 눈물을 흘렸고, 할리우드에 저택을 마련하자마자 몸에 밴 검소함에도 거액을 들여 파이프 오르간을 설치했죠. 그리고 미국에서 추방된 뒤 여생을 보냈던 스위스에서는 저녁 식사 후 희미한 촛불 아래에서 레코드를 듣는 것을 노년의 낙으로 삼았습니다. 채플린이 그의 영화에 끌어들인 선율들은 어쩌면 그의 영혼과 삶 깊숙이 이미 스며들어 있던 멜로디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이제 한 세기를 갓 넘긴 영화사에서 인생과 영화 그리고 음악이 한 인간의 삶 속에 이토록 끈끈하게 이어진 사례는 좀처럼 보기 어렵습니다. 


영화 역사 학자이자 유성 영화 시대 감독으로도 활동했던 시어도어 허프는 그의 영화음악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채플린이 영화음악가 맥스 스타이너 만큼 대단한 거장은 아니겠지만, 비극과 희극을 오가는 그의 영화 속 캐릭터를 위해 도대체 누가 채플린보다 음악을 더 잘 만들 수 있겠느냐”고요. 어쩔 수 없이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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