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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 Sep 24. 2015

영화음악 작곡가의 출현

영화음악에 관심이 없더라도 존 윌리엄스나 엔니오 모리꼬네 혹은 한스 짐머 같은 작곡가의 이름을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 겁니다. 모두 영화음악을 전문적으로 작곡하는 음악가들이지요. 그 옛날 오페라나 발레 음악을 작곡했던 고전 음악가들처럼 이들은 영화를 위해 곡을 씁니다. 그런데 이 영화음악가들은 언제부터 등장하기 시작했을까요? 때는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필름 다르의 폴 라피트가 꿈꾸었던 대로 영화는 관객의 저변을 확대시키지만, 반면 오페라와 연극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했습니다. 많은 관객을 빼앗겼기 때문이지요. 영화가 대중적인 인기를 끌면서 무대 상연을 위주로 돈을 벌어들인 극장주들은 가끔 오페라 대신 영화를 상영하거나 아예 극장을 상영관으로 개조하기 시작합니다. 상영을 위한 스크린이 설치되고, 무대 가장자리에는 영화를 상영하는 동안 음악을 연주하게 될 악단을 위한 공간도 마련됐죠. 음악과 관련된 사람들의 보수와 지위가 향상됐고, 개중엔 영화음악을 전문적으로 작곡하는 음악인까지 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한 편의 영화가 완성되면 극장에 오르기 전에 미리 영화를 보면서 곡을 작곡하거나 다양한 선곡 카탈로그를 참고해 어울릴만한 연주곡을 추려내곤 했지요. 전자가 영화음악 작곡가라면, 후자는 음악 감독, 요즘 말로 뮤직 슈퍼바이저라고 부르는 영화음악인이 등장한 겁니다.


1910년대 세계에서 가장 큰 영화관으로 꼽힌 프랑스의 고몽 팔레스와 1912년 문을 연 영국의 피닉스 시네마 극장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초기 영화음악을 담당했던 영국의 루이스 레비 Louis Levy도 그런 음악가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1910년 극장에 소속된 악단원으로 고용된 그는 1916년 런던 갤러리 시네마 극장의 음악 감독으로, 그리고 1921년에는 본격적으로 영화음악을 작곡하기 시작합니다. 레비는 회고록 『영화를 위한 음악 Music for the Movies』에서 전문 영화음악인들이 등장했던 당시의 모습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영화음악의 발전을 향한 첫 걸음은 상영이 예정된 영화에 음악을 맞추기 위해 악단 지휘자에게 영화 시사회를 열어줌으로써 가능해졌다. 영화와 음악을 규합하기 위한 노력에 힘이 실리면서 기술적인 진보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적합한 반주 음악을 작곡하기 위해 몇 번씩이나 영화를 보곤 했다. 이 무렵 영화 산업은 빠른 속도로 팽창하고 있었고, 궁전 같은 영화관들이 곳곳에 세워졌다. 영화에 대한 붐이 일어났고, 극장마다 제법 규모 있는 관현악단이 고용됐다. 전반적으로 영화는 이 당시 쇼 비즈니스에서 이미 놀라운 위치를 차지했다.


15분짜리 영화인 <기즈 공의 암살>을 위해 카미유 생상스가 음악을 작곡한 것이 1908년. 그가 쓴 영화음악은 곧 세계의 영화 제작사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심지어 영화와 경쟁하던 오페라까지 그의 스타일을 참고할 지경에 이릅니다. 그러나 카미유 생상스는 영화음악 전문 작곡가는 아니었지요.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도, 에릭 사티도 영화음악을 만들었지만 그들의 본업은 순수 음악 작곡가였습니다. 영화음악을 가르치는 학과가 대학에 신설되기 시작한 것이 1930년대 무렵이니, 1910년 전후로 제작된 무성영화에 고전 음악 작곡가들이 참여했던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순수 음악과 실용 음악에 대한 구분은 아직 없었고, 실용 음악의 통속성을 경시해 가벼운 음악, 즉 경음악(Light Music)이라는 꼬리표가 달리기도 전이었으니까요. 더구나 영화음악 작곡이 필요한 영화들은 많은 예산이 들어간 대작들이었고, 그런 작품일수록 생상스의 경우처럼 명망 있는 작곡가의 힘을 필요로 했습니다.  


무성영화사에서 <기즈 공의 암살>에 이어 커다란 획을 그은 야심 찬 영화는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집니다. 엔리코 과쪼니 Enrico Guazzoni 감독의 <쿠오 바디스 Quo Vadis?>지요. 네로 황제가 지배하던 로마 시대를 그린 이 영화는 5000명에 달하는 엑스트라가 동원된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대작이었습니다. 이 영화로 짭짤한 흥행 수익을 거둔 이탈리아는 2년 후인 1914년. 제1차 대전의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더 길고, 더 복잡하고, 더 큰 규모로 압도하는 초 대작 <카비리아 Cabiria>를 선보입니다. 러닝 타임이 200분이나 되는 워낙 긴 영화였기에 이탈리아의 음악 감독이었던 마닐로 마짜 Manilo Mazza는 수십 곡이나 되는 클래식을 발췌하는 것도 모자라 새로 음악을 작곡해야 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영화가 미국에서 상영됐을 때 미국인의 취향을 고려해 다시 편곡이 이루어졌는데, 그 작업을 맡은 음악가가 조셉 칼 브레일 Joseph Carl Breil입니다. 바로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 David Wark Griffith와 함께 <국가의 탄생 The Birth of a Nation>을 만든 작곡가이지요.


조셉 칼 브레일


이탈리아 영화로부터 자극과 영감을 동시에 받았음이 역력한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은 노예 해방을 주장하는 미국 북부의 스톤맨 가문과 남부의 부유한 농장주 카메론 가문의 가족들을 중심으로 남북전쟁에 휘말린 두 집안의 사연을 그립니다. 이 영화가 개봉했을 때 관객들은 그 장대한 이야기에 놀라움을 표했지만, 그 이후 사람들은 논란이 되는 인종차별적인 내용보다 정작 기술적인 측면에 더 주목했습니다. 요즘 영화에도 활용되는 기법들이 이 영화에서 대거 선보였기 때문이었죠. 그것은 영화음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무려 133분이라는 긴 러닝 타임 때문에 2부로 나누어진 이 영화 속에는 그리그, 바그너, 차이코프스키, 베토벤, 리스트, 베르디 등 고전 음악가의 작품에서 발췌된 음악과 함께 ‘딕실랜드 재즈(Dixieland Jazz)’나 미국 애국가인 ‘성조기여 영원하라(The Star Spangled Banner)’와 같은 민요까지 실로 방대한 음악이 나옵니다. 단순히 선곡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편곡의 힘까지 빌어서요. 게다가 <카비리아>처럼 선곡으로 도저히 커버할 수 없는 몇몇 장면들을 위해 조셉 칼 브레일은 특별히 음악을 작곡합니다. 할리우드 최초의 영화음악이 비로소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애초 이 영화가 로스 앤젤레스에서 처음 상영됐을 때는 선곡된 음악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피스 감독은 로스 앤젤레스보다 뉴욕 상영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고, 이때 브레일의 영화음악이 새로이 추가된 겁니다. 이 영화가 음악에 얼마나 공을 들였던지, 극장은 그를 영화 홍보에도 적극 활용했죠.


<국가의 탄생>를 위해 발췌된 음악들은 로스 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
그리고 뉴욕의 악보 도서관을 샅샅이 뒤져 찾아낸 곡들입니다.
12통이나 되는 필름 릴을 84번에 걸쳐 돌려보면서
저희 음악가는 영화 속 장면에 어울리는 곡들을 정성스럽게 선곡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완벽한 연주를 들려 드리기 위해 
풀 오케스트라를 동원해 6번의 리허설을 가졌습니다.  


프랑스에 비해 미국 최초의 영화음악이라 할만한 <국가의 탄생>은 10년쯤 늦었지만, 이 영화의 개봉을 전후로 미국 영화관의 규모가 커지기 시작합니다. 이탈리아의 대작 무성영화들을 미국 극장 중에서도 최고급으로 손꼽혔던 브로드웨이 오페라 극장을 빌려 상영할  수밖에 없었을 정도로 당시 미국의 영화관들은 싸구려 극장인 니켈로데온이 다수였죠. 특히 영국, 프랑스, 독일이라는 고도로 발전한 산업 국가들이 모조리 1차 세계 대전에 휘말리면서 미국은 유럽에 군수물자를 팔아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됩니다. 독일의 영화음악 연구가인 한스 크리스찬 슈미트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술합니다.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비로소 영화는 더욱 확대, 보급됐다. 어려운 생활 여건, 석탄의 부족, 배고픔,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이나 근심을 잊게 해주기 때문이었다. (중략) 휴가를 맞은 병사들, 어슬렁거리며 학교를 배회하는 청년들, 남편을 전쟁터에 보낸 외로운 부인들, 힘든 노동에서 벗어나 휴식을 갈구했던 노동자들. 이 모든 이들이 크고 작은 도시에 있는 영화관의 고객이었다. 전쟁이 끝난 이후 영화 제작사와 극장 소유주들에게 더욱 유리한 상황이 펼쳐졌다. 전쟁에 대한 좌절감이 사람들을 더욱 영화관으로 향하게 했으며, 거대한 은행들이 야심을 품고 영화사로 변신했던 것이다. 미국은 전쟁으로 인해 매우 부유해졌다. 영화는 더욱 대규모로, 매우 호화스럽게 변모하기 시작했다.(한스 크리스찬 슈미트,『영화음악의 실제』, 집문당에서 재인용)


1922년 샌프란시스코에 문을 연 카스트로 극장의 내부 


극장주와 제작사가 주도하는 영화 산업이 풍요로워지면서 영화음악 역시 상승세를 탑니다. 새로운 극장이 문을 열 때마다 오케스트라단이 축하 공연을 했고, 이들은 영화 상영 시 음악을 연주하게 됩니다. 특히 1920년대의 일류 영화관으로 손꼽혔던 극장들은 5-60명 내외의 단원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를 보유하고 있었죠. 유성영화가 탄생한 뒤에 영업을 시작한 뉴욕의 록시 극장은 관람석이 6200석이나 되는 대규모 극장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음악 연주에서도 110명의 악단원과 4명의 지휘자, 3대의 오르간 그리고 합창단까지 보유해 당대 최고의 규모를 자랑했지요.


<국가의 탄생>은 영화만 아니라 영화음악도 성공합니다. 조셉 칼 브레일이 작곡한 러브 테마는 가사까지 붙여져 'The Perfect Song'이는 제목을 달고 악보로 출판되어 날개 돋친 듯 팔렸고, 다른 스코어들은 피아노나 합주곡으로 편곡되어 활용됐습니다. 음악이 영화에서 떨어져나와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둔 첫 번째 사례였죠. 무성영화에서 영화음악, 그중에서도 잘 팔릴만한 테마곡이 중요해집니다. 무성영화 제작사들은 앞다투어 영화음악 작곡가들에게 인상적인 테마곡을 만들라고 종용하기 시작했죠. 또한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곡도 영화의 흥행을 등에 업고 판매하려는 시도까지 공공연하게 일어납니다. 찰리 채플린 같은 스타들의 사진을 악보의 표지로 활용해 소비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면서요. 특히 라울 월시 Raoul Walsh 감독의 무성영화 <영광이 무엇이길래 What Price Glory>에 삽입된 'Charmaine'은 미국에서 7주에 걸쳐 부동의 히트곡으로 자리 잡은 것도 모자라 백만 부가 넘는 악보와 레코드가 팔릴 정도로 큰 인기를 끕니다. 음악 관련 회사와 영화사들은 이제  영화뿐만 아니라 영화음악 역시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노다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죠. 이런 영화음악 전문 작곡가들이 활동하는 할리우드의 경향에 대해 버나드 허먼 Bernard Herrmann 조차 의아하게 생각했을 정도였지요.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깁니다. 


미국은 소위 영화음악가라고 부르는 직업이 있는 유일무이한 나라다.
다른 나라에서 작곡가들은 영화를 위해 음악을 가끔 작곡할 뿐이다.

    America is the only country in the world with so-called "film composers".

             Every other country has composers who sometimes do fil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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