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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 Sep 21. 2015

영화음악의 탄생

무성영화에서 음악을 창작하려는 시도는 이미 1900년대 초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에즈라 리드가 조르주 멜리에스의 <달나라 여행>을 위해 음악을 작곡한  사례뿐만 아니라 1905년 이탈리아의 무성영화 개척자였던 필로테오 알베리니 Filoteo Alberini 감독의 <황금의 매력 La Malia dell'oro>을 위해 로몰로 바치니 Romolo Bacchini라는 작곡가가 그 음악을 만들었음을 지적하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지요. 


영화음악 역사의 한 페이지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음에도, 이 음악들이 최초의 영화음악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발견된 시점이 비교적 최근이거나 영화음악의 시초로서 근거를 뒷받침할만한 자료가 턱없이 모자라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이 음악들에게 의미 두는 것을 주저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는 간단합니다. 선곡과 작곡의 차이일 뿐 영상과 음악의 관계를 고려한 영화음악이라기보다 단순한 반주 음악에 가깝다는 의견이 지배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공식적’으로 최초의 영화음악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은 어떤 작품일까요?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았던 할리우드가 1910년 로스 앤젤레스에 흡수되면서 세계 영화 산업의 메카로 떠오르기 전까지 영화의 중심지는 뤼미에르 형제의 고향 프랑스였습니다. 미국으로 건너간 프랑스산 활동사진이 푼돈을 받고 니켈로데온에서 피곤에 찌든 피아니스트의 연주로 한창 상영되고 있었을 때 프랑스에서는 이제 관현악단이 음악을 연주했고, 한 대의 피아노와는 비교할 수 없는 오케스트라의 풍성하고 드라마틱한 선율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오페라나 발레 그리고 음악회의 무대로 활용되던 극장이 영화에도 문을 열었던 겁니다. 영화사가 극장주와 친분을 맺으면서 극장에 소속된 연주자들도 영화 상영 시 반주를 맡는 분위기가 자연스레 형성됐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산업혁명으로 문화를 소비할 수 있는 부르주아 시민계급이 늘어난 것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영국과 나란히 산업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뤄낸 프랑스는 자국 철강 산업의 수준을 보여주는 에펠탑을 건설할 만큼 뛰어난 기술력을 자랑했고, 또한 앞선 군사력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지에 식민지를 두고 더 부강한 나라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한창 애쓰고 있었죠. 프랑스 문예 영화의 물꼬를 튼 영화사 필름 다르(Film D’Art)가 문을 연 것은 그 즈음이었습니다.


판화가 루시앵 베일락이 묘사한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장의 모습


1907년 파리 일간지에는 국립 극장 코미디 프랑세즈(Comédie-Française)의 명망 있는 예술가들이 참여해 수준 높은 영화를 제작할 것이라는 캠페인성 광고 기사 하나가 실립니다. 이 기사를 의뢰한 사람은 예술을 사랑했던 금융인 폴 라피트 Paul Laffitte. 코미디 프랑세즈에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그가 영화 산업에 출사표를 던지면서 내건 기치는 두 가지였죠. 영화의 관객층을 더욱 폭넓게 확대시킨다는 것이 하나였고, 다른 하나는 영화가 사람들을 교육시킬 수 있는 ‘훌륭한 선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산업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불거진 노동자들의 불만을 잠 재우기 위해 정부는 높은 시민 의식과 애국심을 강조했고, 예술인은 그런 정부의 정책에 동조하는 문학과 연극 그리고 음악 작품을 쏟아냅니다. 필름 다르의 방향은 교육을 권력 유지의 중요한 근원으로 여겼던 프랑스 제3공화정의 정책과도 무관하지 않았던 셈이지요. 시민계급의 성장에 따라 역사 의식을 고취시키고 조국에 이바지할만한 시나리오가 제격이었을 겁니다. 16세기 기즈 공작의 죽음을 다룬 극작가 앙리 라브당 Henri Lavedan의 <기즈 공의 암살 L'Assassinat Du Duc De Guise>이 필름 다르의 첫 번째 작품으로 선정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죠.

 

필름 다르의 야심 찬 출발과 함께 각별히 공을 들여 제작하는 영화이니만큼 그 음악도 특별해야 한다는 의견이 모아졌음은 물론입니다. 당시 프랑스 정부 시책에 가장 적극적으로 동조했을 뿐만 아니라 가장 큰 수혜를 입었던 카미유 생상스 Camille Saint-Saëns가 그 작곡가로 낙점됐죠. 고전 음악가의 작품 세계를 그들의 경제 활동과 결부시켜 바라본 고규홍은 그의 책 『베토벤의 가계부』에서 생상스에 대해 이렇게 기술합니다.


이 같은 생상스를 가리켜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청교도주의와 부르주아 윤리로 철저하게 무장한 음악가’라고까지 했다. 삶이 그러하듯, 음악에도 생상스는 부르주아 취향과 도덕관을 철저하게 드러냈다. 그는 프랑스 제3공화정의 정책에 적극 찬동했을 뿐 아니라, 프랑스의 식민지 확대 정책도 열렬히 환호했다. 이 같은 생각은 그의 음악 활동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고규홍,『베토벤의 가계부』, 마음산책에서 재인용)


카미유 생상스


이미 30대 중반에 국민 음악 협회를 설립하여 고전 음악을 하나의 문화 운동으로 끌어올린 생상스는 문학과 과학 분야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19세기 프랑스에서 유행했던 희가극 [동양의 공주 La princesse jaune]의 무대 상연을 위해 그가 음악을 작곡했던 것이 1872년. 당시 프랑스에 유입된 일본 문화에 매료된 생상스는 이 희가극을 위해 5 음계를 이용한 오리엔탈 풍의 선율을 만들어냈을 정도였죠. 연극을 위한 음악 작곡이 문학에 대한 관심의 발로였다면,  일흔세 살이라는 고령의 나이임에도 영화라는 신기술을 위한 음악 창작에 생상스가 선뜻 응할 수 있었던 것도 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에게 큰 무리는 아니었을 겁니다. 더욱이 고정된 카메라로 촬영한 <기즈 공의 암살>은 필름에 담긴 연극에 가까웠습니다. 희가극인 오페라 코미크(Opera Comique)가 대사와 독백을 가졌다면, 이 영화는 대사를 자막으로 처리했다는 것이 그 차이일 뿐이죠. 생상스가 <기즈공의 암살>을 작곡할 당시 어떻게 음악에 접근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으로 알려진 바가 거의 없습니다만, 그가 이 무성영화를 위한 음악을 작곡했을 때 단순한 반주 음악으로서가 아니라 희가극 음악을 썼던 경험을 살려 영화 속의 이미지와 이야기를 품어내기 위한 선율에 초점을 맞췄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18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진 15분의 러닝 타임 내내 생상스의 음악은 그치지 않습니다. 오페라를 연상시키는 배우들의 큰 동작과 연극 무대 같은 세트 그리고 베르디의 악풍을 떠올리게 하는 전주곡은 필름으로 촬영한 오페라를 보는 것과 비슷한 인상을 주지요. 음모를 경고하는 편지를 읽고 기즈 공작이 의연하게 방을 나서는 순간부터 앙리 3세와 부하들의 계략에 의해 살해된 뒤 벽난로의 불꽃으로 타오를 때까지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선율은 귀에 들리지 않는 대사 대신 극의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합니다. 


눈에 띄는 점은 무대에서 실시간으로 상연 되는 연극이나 오페라에 비해 음악의 호흡이 제법 빠르다는 것입니다. 기초적인 단계이긴 했지만 영화 편집으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었기에 영화의 리듬을 타는 음악 역시 선율을 급격하게 전환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죠. 살금살금 걷는 인물의 동작과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심리 묘사를 멜로디와 리듬에 차례로 반영하면서요. 당시에는 영화 상영과 동시에 반주로 진행된 음악이었습니다만, 멜로디나 악기의 구성이 요즘 영화음악과 비교해봐도 손색없을 만큼 정교할 뿐만 아니라 드라마틱하기까지 합니다.


생상스가 피아노 연주곡으로 편곡한 <기즈 공의 암살> 악보 

 

다른 무성영화들이 필름이나 악보 중 어느 하나가 제대로 남아있지 않은 것과 달리 <기즈 공의 암살>은 영화와 악보가 지금까지 온전히 전해지고 있습니다. 생상스가 작곡한 영화음악은 서곡을 포함해 총 여섯 곡의 연주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서곡이 오프닝 타이틀에 해당한다면 나머지 곡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다섯 장면을 중심으로 꾸며진 플롯을 세밀하게 묘사합니다. 나중에 생상스는 이 곡을 ‘현과 하모늄 그리고 피아노를 위한 작품 번호 128’이라는 제목을 붙입니다. 영화 상영에 필요한 음악으로서 뿐만 아니라 하나의 독립적인 연주 작품으로도 활용하기 위해서였지요. 또한 이 악보의 출판을 맡은 담당자는 오케스트라를 동원할 수 없는 소규모 극장을 위해 한 대의 피아노로 연주할 수 있는 버전을 부탁했고, 생상스는 이 곡을 피아노 솔로 버전으로 편곡하면서 악보 출판업자인 어귀스트 듀랑 Auguste Durand에게 특별히 헌정했습니다.


1908년 개봉 당시 이 영화를 관람했던 연극 비평가 아돌프 브레송 Adolphe Bresson은 영화 잡지 『시네 저널 Ciné-Journal』에 생상스가 작곡한 음악에 대해 상찬하는 글을 기고합니다. 카미유 생상스의 음악이 최초의 영화음악이라면, 브레송이 쓴 이 글은 아마도 최초의 영화음악 리뷰일 겁니다.


카미유 생상스가 <기즈 공의 암살>을 위해 쓴 곡은 분명 걸작이다.
그 음악을 찬미하지 않는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영화가 약간 머뭇거리고 불완전한 구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은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로울 뿐 아니라 재미를 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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