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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 Sep 20. 2015

이럴 땐 이런 음악

선곡을 위한 매뉴얼

1910년에 출판된 『영상을 위한 음악(Music for the Picture)』을 시작으로 영화 상영 시 선곡에 도움이 될만한 책자가 등장하기 시작했으나, 영화음악의 역사에서 가장 먼저 이것을 하나의 매뉴얼로 정리한 인물은 맥스 윈클러 Max Winkler라는 인물에 의해서 입니다. 칼 피셔 Carl Fischer가 경영하는 뉴욕의 악보 출판사에서 직원으로 근무했던 윈클러는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뒤에도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어떤 아이디어 때문이었죠.


회사에는  수백수천 타이틀의 악보들이 그야말로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습니다. 그때 제 머릿속에는 어떤 영화의 상황에 맞게 음악을 미리 골라놓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스쳤죠. 악단의 지휘자와 피아니스트 그리고 오르간 연주자들에게 그 선곡 리스트를 카탈로그의 형태로 알려줄 수 있으면 퍽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비록 나의 지식과 경험을 이용해 직접 음악을 연주하는 건 늦은 감이 있었습니다만, 대신 영화의 반주를 맡은 사람들에게는 영화가 상영되기 전에 음악을 미리 고를 수 있으니 무척 빠른 것이었죠. 나는 재고로 남아있는 악보를 판매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영화나 음악을 따로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연결시키는 카탈로그를 통해서 말이죠. 음악은 별로 문제가 안됐습니다. 우리 회사는 악보를 충분히 보유하고 있었으니까요. 문제는 홍보와 타이밍 그리고 배급망이었습니다. 그 생각에 초조해진 나는 잠을 청할 수 없었죠. 이불을 걷어차고 책상 앞에 앉아 불을 켰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선곡 리스트를 작성하기 시작했지요.


곧바로 이 아이디어는 수많은 고전 음악을 큐 시트(Cue Sheet)에 맞게 선곡하는 콘셉트로 바뀝니다. 유니버설 픽쳐스를 비롯해 할리우드의 수많은 영화사를 부지런히  찾아다녔던 윈클러는 자신이 고안한 음악 카탈로그만 있으면 어떤 영화라도 간편하게 음악을 고를 수 있다며 홍보하기 시작했지요.


영국 도서관에서 발견된 무성영화 악보들(이미지 출처: Bermingham City Council)


당시 영화에 사용할 음악을 선곡하는 일 때문에 골치를 앓았던 유니버설 영화사의 홍보 담당자는 윈클러가 내놓은 아이디어에 관심을 보입니다. 그리고 그가 제시한 음악들을 몇 편의 영화로 테스트해 본 뒤 그 결과에 매우 흡족해했죠. 맥스 윈클러는 곧바로 유니버설 픽쳐스에 고용됐고, 그의 선곡 카탈로그는 영화사에서 제작한 필름이 배급되는 극장에 배포되기 시작합니다. 윈클러의 예상대로 악보를 판매할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린 것이죠. 아래는 맥스 윈클러가 <매직 벨리>라는 미지의 무성영화를 위해 직접 곡을 고르고, 영화 상영 시 연주에 지침이 될만한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한 큐 시트의 일부입니다.(멜빈 쿡, 『할리우드 필름 뮤직 리더』, 옥스퍼드대학교 출판부에서 재인용)



유니버설 픽쳐스뿐만 아니라 70여 개의 크고 작은 영화사 그리고 극장들과도 제휴를 맺은 윈클러는 그때까지 제작된 무성 영화 속 장면과 상황, 인물, 행동, 감정, 국적, 위험, 폭풍, 무희, 악녀, 카우보이, 도둑, 매춘부, 에스키모, 아프리카 부족, 황제, 노동자, 벌새, 코끼리 등을 위해 음악을 골라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한계에 다다랐죠. 계속해서 제작되는 새로운 영화들을 위해 그들이 저작권을 가진 악보들의 목록 안에서 더 이상 선곡할 수 있는 음악이 부족해졌던 겁니다. 


결국 윈클러는 직접 작곡가들을 찾아가 새로운 영화에 필요한 반주곡을 의뢰하기 시작합니다. 설상가상으로 극장에 소속된 악단은 한 번 연주한 레퍼토리는 적어도 세 달이 지나기 전까지 다시 연주하지 않겠다는 조건까지 내걸었죠. 끊임없이 신선한 영화음악을 제공해야 했던 윈클러는 결국 범죄를 저지릅니다. 저작권을 확보하지 않은 다른 고전 음악가의 악보까지 손을 뻗고 만 것이죠. 바흐의 코랄이 슬픈 장면을 위한 멜로디로 인용됐고, 베토벤의 곡은 미스터리를, 차이코프스키는 기이한 아이러니를 묘사하기 위한 곡으로 활용됐습니다. 뿐만 아니라 상황에 맞춰 리듬과 템포를 원곡과 다르게 지시한 음악은 그야말로 난도질에 가까울 정도로 망가졌습니다. 결국 악보 판매로 재산을 모은 윈클러는 유성 영화가 선보일 즈음 파산하고 맙니다.


오직 윈클러만이 이런 형식의 선곡 매뉴얼을 제작한 사람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나폴리의 밤(Neapolitan Night)’이라는 곡으로 유명한 존 스테판 자메크닉 John Stephan Zamecnik도 있지요. 무성영화 시절 배우와 감독으로도 활동했던 자메크닉은 음악가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작곡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고, 1896년에는 프라하 음악학교로 유학을 떠나 안토닌 드보르작 Antonine Dvorak에게 지도까지 받은 인물이었습니다. 1901년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했고, 1907년 히포드롬 극장이 새로 문을 열면서 음악 감독을 맡아 활동하기 시작했지요.


샘 폭스 출판사에서 1914년 경에 출판한 자메크닉의 영화음악 악보집 


바로 이 무렵 악보 출판사를 연  스물다섯 살의 새뮤얼 폭스 Samuel Fox는 자연스럽게 자메크닉과 친분을 맺으면서 그의 이름으로 작곡한 영화음악을 출판하기 시작합니다. 미국 최초의 영화음악 악보 출판사인 샘 폭스 출판사(Sam Fox Publishing Company)가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윈클러의 매뉴얼이 선곡 중심이었다면, 자메크닉이 작곡한 오리지널 스코어를 중심으로 영화음악을 제안한 샘 폭스의 매뉴얼은 시기적으로도 윈클러의 것보다 약간 앞서 있을 뿐만 아니라 영화를 위해 창작된 음악이라는 점에서 좀 더 큰 의미를 지닙니다. 물론 오직 한 편의 영화를 위한 음악이 아니라 거의 모든 영화에 사용 가능한 음악이라는 점에서 오리지널리티는 떨어지는 편이었습니다만, 자메크닉은 할리우드에서 영화음악 전문 작곡가들이 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습니다.


이탈리아 음악가였지만 독일에서 활동했던 주세페 베체 Giuseppe Becce는 윈클러의 카탈로그보다 한 단계 더 진보한 기술을 선보입니다. 1913년 독일 감독 칼 프렐리히 CarlFroelich가 연출한 <리하르트 바그너 RichardWagner>에 배우로 출연한 베체는 그 영화를 위한 음악까지 작곡했죠. 그 이후에 제작된 무성 영화들을 위해서도 꾸준히 음악을 작곡했던 베체는 자신의 음악들을 차곡차곡 모아 1919년 영화음악 모음집이자 상영 시 반주를 위한 선곡 카탈로그인 『키노비블리오텍 Kinobibliothek(줄여서 키노텍 Kinothek)』을 출판합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스타일과 분위기에 따라 구체적인 음악을 제시하는 그의 카탈로그는 또 다른 선풍을 일으켰고, 선곡 위주가 아닌 대부분 창작 음악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저작권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죠. 특히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도래와 함께 유성 영화에서도 계속해서 창작 활동을 이어갔던 베체는 40년에 걸쳐 초기 영화음악의 선구자로서 커다란 영예를 누립니다. 비록 자신의 음악을 재활용한다거나 다른 음악가의 작품을 공공연하게 가져다 쓰긴 했지만, 그의 『키노텍』은 영상과 음악의 관계에 대해 가장 대중적이고 또 현대적인 시각으로 접근했음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주세페 베체가 바그너역으로 출연한 무성영화 <리하르트 바그너>


물론 이런 선곡 매뉴얼의 부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순수하게 연주를 위한 음악이 아닌 영화를 위한 음악으로 고전음악들이 추려지면서 전에 없던 새로운 리듬, 조, 형식 그리고 악기  구성뿐만 아니라 멜로디까지 부분적으로 수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편곡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진 셈인데, 원곡 자체의 느낌보다 선곡 카탈로그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편의에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었죠. 어떤 특정한 선율을 영화 속 상황과 자주 결부시키게 되면서 고전 음악이 지닌 본연의 감성에서 벗어나 음악이 모종의 전형성을 띄기 시작했던 겁니다. 쇼팽의 야상곡에서 서글픈 사랑의 눈물을, 바흐의 코랄에서 비장한 죽음의 그림자를 자동적으로 연상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죠. 전자가 원작의 물리적인 훼손이라면, 후자는 아마도 정서적인 훼손일 것입니다. 영화 감독이자 영화음악 작곡가로도 활약했던 인도의 사티야지트 레이 Satyajit Ray는 수십 년이 지나도록 바뀌지 않는 이런 선곡 음악의 관행에 대해 불만을 넘어 극도의 혐오감을 표시하기도 했지요.


오늘날 많은 영화음악이 내게는 너무나 분명하게 들린다. 나는 이것이 음반 산업과의 결탁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영화의 배경음악이 레코드로 발매되고 있는데, 영화를 위해 선곡된 음악이 영화 바깥에 그렇게 단단히 자리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위대하고 친숙한 음악이 영화에 사용되는 현상에 대해 분개한다. 대부분의 경우 영화를 음악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기보다 음악을 영화의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있고, 또한 감독이 아닌 제작자의 의도가 다분해 보이기 때문이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을 마치 <엘비라 Elvira>의 주제곡인 냥 ‘엘비라 마디간 콘체르토’ 쯤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역겨운 일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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