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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 Sep 19. 2015

정교해진 영화
섬세해진 선곡

학자들마다 다소 차이는 있습니다만, 1913년을 기준으로 전 세계에 약 6만 개의 영화관이 있었던 것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괄목할만한 성장세를 보인 것은 단연 미국이었지요. 영화 관람료가 5센트짜리 니켈 동전 한 닢이면 충분했기에, 니켈로데온(Nickelodeon)이라 부르던 영화 상영관이 처음으로 문을 열고 3년이 지난 1908년, 그 수는 1만여 개로 불어났습니다. 


주로 도시의 빈민가와 영세한 상점가 부근에 자리 잡은 니켈로데온은 근사한 이름의 간판을 달고 있었음에도 말이 영화관이지, 대부분 왁자지껄한 시장 바닥과 다를 바 없었죠. 무성영화 시절에 발간된 미국의 영화 일간지 『모션 픽쳐 월드』에 1909년 3월 13일 자로 기고된 영화 감상평은 이 당시 니켈로데온의 풍경과 함께 반주로 사용됐던 당시 영화 음악에 대해서도 슬쩍 짐작하게 해줍니다.


요절복통 추격전과 박살 나는 도자기를 보면서 관객들은 뜨겁게 환호했다. 이어서 오늘의 메인 상영작인 <바보의 복수 A Fool’sRevenge>가 스크린에 오른다. [리골레토]를주제로 한 영화의 드라마틱한 전개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잃지 않았다. 이 작품은 관객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특히 피아니스트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던 래그타임 일변도의 반주가 아니라 고전 음악을 연주함으로써 갈채를 받았으며, 더구나 그 멜로디는 영상과 무척 잘  맞아떨어진다는 인상을 주었다. 극장에 슈만의 ‘트로이메라이’와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가 울려 퍼졌다. 그 곡은 내가 니켈로데온에서 들어본 최초의 슈만 그리고 베토벤이었을 것이다.


무성 영화가 갓 태어난 시기 흥을 돋우기 위해 피아니스트가 연주했던 클래식 음악은 그로부터 약 10년이 지난 미국의 영화관에서 거의 실종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럽인에 비해 당시 미국인이 문화적으로 여유로운 삶을 누리기 어려웠던 까닭도 있었고, 영국이나 프랑스와는 다른 미국인만의 독자적인 취향도 작용했겠지요. 그러나 무성 영화 상영 시에 자주 발생하는 기술적인 문제 역시 거기에 한 몫 했습니다. 낭만파 음악가들이 작곡한 피아노 곡은 당시 빠른 속도로 돌아가는 영사기가 쏟아내는 화면과 어딘가 어긋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죠. 


게다가 코미디 장르가 주류였던 이 무렵 영화들은 발레나 오페라만큼 고상한 볼거리로 여겨지지도 않았기에 부유한 지식층과 어색한 거리를 두고 있었고, 혹시라도 어느 집 자제가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 근처에 얼씬거리 기라도 하면 그들의 '교양 있는' 부모는 천박한 일이라며 못마땅하게 여기곤 했습니다. 비록 니켈로데온을 통해 영화는 대중에게 한걸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지만, 가벼운 오락 거리일 뿐 어느 누구도 그것이 예술이라고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1910년대 보드빌 극장 앞에 운집한 군중들. 활동사진과 보드빌이 결합된 쇼가 인기를 끌면서 보드빌 전용 극장은 대부분 영화상영관인 니켈로데온으로 바뀌었다.


헛간과 창고를 전전하며 서민들의 호주머니를 노리던 영화사와 극장주들은 영화가 하나의 산업이 된 20세기 초성이 찰 리 없었지요.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 폭발적으로 늘어난 영화관으로 인해 경쟁이 늘어난 만큼 수익 증대를 통해 파이를 키울 필요가 있었습니다.  서민뿐만 아니라 부유층과 지식인도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으로 끌어들여야만 했던 겁니다. 그리고 이런 자각은 당연하게도 영화에 대한 투자로 가장 먼저 이어졌습니다. 


영화 제작사는 상영 시간은 더 길고, 이야기는 더 재미있어야 경쟁력을 키울 수 있으리라 계산했고, 어디선가 신인 배우가 등장해 흥행을 거뒀다는 소식이라도 접하면 흥행술사와 감독들은 앞다투어 달려가 새로 제작하는 영화에 그들을 출연시켜 만인의 스타로 키워냈습니다. 한편 극장주들은 상류층의 취향을 고려한 쾌적하고 번듯한 건물로 관객들을 유혹했죠. 그리고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서야 영화사의 사장과 감독, 극장주들은 더 길어진 러닝 타임과 더 넓어진 극장에서 음악을 오직 한 대의 피아노 연주에 의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1915년에서 27년 사이 미국 콜로라도의 프린세스 극장 전속 악단으로 활동한 카발로 오케스트라. 다양한 금관과 현악기 뿐만 아니라 하프까지 갖춘 제법 규모있는 악단이었다.


극장마다 오케스트라가 꾸려지고, 그들이 연주하는 레퍼토리도 피아니스트의 즉흥 연주가 아니라 영화의 콘셉트에 맞춘 관현악곡으로 꾸며지기 시작했습니다. 좀 더 정교하고 섬세한 선곡을 통해서요. 그리고 이런 선곡 리스트는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지면, 하나의 매뉴얼처럼 극장끼리 정보를 공유하거나 아예 책자의 형태로 연주자와 지휘자에게 배포되기 시작합니다. 영국 왕립 음악원의 교수이자 <불은 시작되었다 Fires WereStarted>를 비롯해 100여 편의 영화음악을 작곡했던 영국의 윌리엄 알윈은 열한 살의 나이였던 1916년, 자신을 지도했던 음악 선생님과 영화관에서 플루트를 연주했던 기억을 이렇게 진술합니다.


악단에서 연주하는 사람들이 한 사람씩 들어왔다. 바이올리니스트에 이어 들어온 코넷과 첼로 연주자가 들어오면서 피아니스트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그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나에게 놀라움을 안겨준 이 피아니스트는 상당한 실력을 갖춘 사람이어서 시종일관 냉담하고 재치 있게 영화를 반주해 나갔다. 나의 정면에는 악보대가 있었고 그 위에는 두툼한 악보 뭉치가 놓여있었다.  그중에는 ‘시인과 농부(Poet & Peasant)’ 또는 ‘장파(Zampa)’와 같은 유명한 클래식 곡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벨라 켈레의 작품들이었다. 이 작곡가의 음악은 어린 내게도 상당히 방탕하고 평범하게 느껴졌다. 거기에는 감상적인 애창곡과 특정한 상황에 맞는 음악들을 짜 맞춘 흔적이 역력했다. 또한 악보대 위에는 ‘주제곡’이라고 표시된 악보 하나가 더 있었는데 선생님은 그 악보를 별도로 옆에 놓아두고 리더를 맡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신호를 보낼 때마다 연주하고 있던 곡을 바로 멈추고, 즉시 이 곡을 연주해야 한다고 일러주셨다. (로저 맨빌, 존 헌틀리, 『영화음악의 기법』, 영화진흥공사에서 재인용)


피아니스트를 중심으로 바이올린, 첼로와 같은 현악기,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발명된 금관악기인 코넷 그리고 목관악기 중 가장 높은 음역을 지닌 플루트로 구성된 이 실내악단은 교향곡을 연주하는 대규모 오케스트라 편성에 비해 단출했지만, 오직 피아노 한 대에 의지한 선율보다는 좀 더 자유롭고 풍부한 음색의 멜로디를 선보일 수 있었을 테죠. 연주되는 레퍼토리 역시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폰 주페(FranzeVon Suppe)와 프랑스의 오페라 작곡가인 페르디낭 에롤드(Ferdinand Hérold) 그리고 헝가리의 벨라 켈레(Béla Kéler)의 곡까지 국적도, 스타일도 무척 다양했습니다. 


윌리엄 알윈이 ‘악보 뭉치’로 표현한 이 선곡 모음은 영화의 상황에 맞춰 조합된 것이었음은 물론 영화음악의 기본적인 톤을 이루는 음악으로 벨라 켈레의 곡에 가장 무게를 두었음도 엿 볼 수 있죠. 현대 영화음악에 있어서 모종의 톤을 이루는 선율이 특정 음악가의 작품을 중심으로 선곡된 셈입니다. 여기서 흥미를 끄는 점 하나는 이런 선곡 리스트 이외에 ‘주제곡(Theme)’이라고 별도로 분류된 영화의 테마곡이 이 당시 이미 등장했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그것이 누구의 곡이었고, 곡명은 무엇인지 확인할 방도는 없지만, 영화가 절정에 이르면 악단은 연주하던 곡을 즉시 멈추고 이 테마곡을 연주해야 했을 만큼 이 미지의 주제곡은 영화 상영에서 가장 중요한 선율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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