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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 Oct 03. 2015

소리를 담는 기술

주인님 겁내지 마십시오. 이곳은 얼어붙은 바다의 가장자리입니다. 지난 겨울이 시작될 무렵, 바로 이곳에서 아리매스피안족과 클라우드라이더족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있었지요. 남자들의 외침, 여자들의 울부짖음, 전투용 도끼로 내리 찍는 소리, 군함의 철 갑판과 갑옷이 부딪치는 소리, 말의 울음 소리 그리고 전쟁터에서 들려오는 모든 무서운 소리들이 저 공기 속에 얼어붙은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혹독한 겨울이 끝나면서 고요하고 부드러운 날씨와 함께 좋은 계절이 오고, 얼음이 녹자 주인님께서 지금 그 소리를 듣고 계신 것입니다. 


16세기 작가 프랑수아 라블레의 걸작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일부입니다. 추위에 얼어붙은 언어가 녹으면 공기에 소리가 퍼진다는 근사한 전설을 이야기하지요. 녹음 기술이 발명되기 전, 사람들은 소리를 이런 무한한 상상력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엉뚱한 아이디어도 냈지요. 이를테면 망원경을 발명한 이탈리아의 잠바티스타 델라 포르타는 한쪽이 막힌 금속관에 말을 하고 재빨리 마개를 닫으면 한동안 소리를 보존할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요. 소리를 담는다는 라블레의 상상이 현실에 근접하기까지는 약 350년이 걸렸습니다. 에두아르 레옹 스코트 Edouard-Leon Scott가 1855년에 발명한 포노토그래프(Phonoautograph)를 아마 그 시초로 꼽을 수 있을 겁니다.


에두아르 레옹 스코트의 포노토그래프


포노토그래프의 원리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나무를 깎아 만든 원뿔형 통(P) 끝에 얇은 막(M)을 씌우고, 뻣뻣한 돼지털(S)을 막의 한쪽 면에 고정한 다음, 롤러의 손잡이(A)를 돌려 태엽(B)을 미리 감아놓고, 원뿔에 대고 말합니다. 그러면 진동에 의해 막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검은 물감을 칠해놓은 롤(E)이 회전하면서 퇘지털에 긁힌 소리의 파동이 그 위에 그려지는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소리를 시각적으로 기록하는 것이죠. 하지만 이렇게 기록한 소리를 거꾸로 재생해내지는 못했습니다. 애초 음향 분석을 위해 고안된 장치였으니까요. 귓바퀴에서 고막을 거쳐 달팽이관으로 이어지는 인간의 귀를 본 딴 이 장치와 비슷한 기계는 약 20년 뒤 미국에서도 만들어집니다. 바로 토마스 에디슨 Thomas Edison이 고안해낸 포노그래프(Phonograph), 즉 축음기입니다.


토마스 에디슨과 포노그래프 초기 모델


무성 영화에게는 종말을, 유성 영화에게는 시작을 알린 축음기는 영화보다 더디게 발전했습니다. 영상을 녹화하는데 비해 소리를 녹음하는 것이 더 간단하고 수월했음에도 불구하고요. 원래 축음기는 작정하고 만든 발명품이 아니었습니다. 전화기를 발명하는 과정에서 따로 떨어져 나온 기술이었죠. 포노그래프를 발명한 에디슨조차 막상 이 기술을 어디에 써먹어야 할지 처음엔 막막해했습니다. 온갖 궁리 끝에 그가 1878년 『노스 아메리칸 리뷰 North American Review』에 기고한 포노그래프의 용도 제안서를 보면 그 고민이 느껴집니다.(마이클 채넌, 박기호 옮김, 『음악 녹음의 역사』, 동문선에서 재인용)


1. 속기사의 도움을 받지 않는 편지 쓰기 및 모든 종류의 받아 쓰기
2. 시각 장애인이 별도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내용을 들을 수 있는 오디오 북
3. 웅변 훈련
4. 음악 재생
5. 가족사의 기록: 가족 구성원 당사자의 목소리로 기록된 말, 회상 그리고 임종 시 유언의 기록
6. 뮤직 박스와 장난감
7. 귀가 및 식사 시간을 또렷한 발음으로 알려주는 시계
8. 발음법의 정확한 재생에 의한 언어의 보존
9. 교육적 목적: 교사의 설명을 저장함으로써 학생이 언제나 그 자료를 참고하고, 기억하는데 편의를 제공하는 포노그래프를 옆에 두고 철자법이나 다른 수업에 참고함
10. 전화기와 연결해 순간적이고 시시콜콜한 대화를 담아두는 것이 아니라 영속적이고 귀중한 기록을 전송하는 부가적인 기기로 활용 

 

에디슨이 제안한 포노그래프의 용도는 수십 년의 시간차를 두고 포노그래프를 발전시킨 다른 기기들을 통해 실생활에서 대부분 활용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영화의 사운드 장비로서의 활용은 들어있지 않습니다. 영화라는 기술이 아직 등장하기 전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정작 축음기의 가장 큰 용도가 될 음악 재생은 흥미롭게도 받아쓰기보다 중요한 용도로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초기 포노그래프의 음질은 음악 감상을 권하기 어려울 정도로 음질이 형편없었거든요. 게다가 녹음된 소리를 증폭시키는 기술은 반세기가 지난 1920년대에 이르러서야 활용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사소한 이유 하나를 더하자면, 포노그래프보다 2년 뒤에 발명한 백열 전구가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었기에 들이는 공에 비해 성과가 별로 없었던 포노그래프 기술은 에디슨의 관심에서 살짝 멀어져 있었지요. 오히려 포노그래프라는 기계에 에디슨보다 더 큰 관심을 보인 건 경쟁자인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Alexander Graham Bell이었습니다.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에디슨의 특허 사용권을 획득한 벨이 기술을 개량해 야심 차게 선보인 기계는 그라포폰(Graphopone). 1886년 받아쓰기를 목적으로 시중에 내놨으나 실용성은 한참 떨어진 제품이었죠. 축음기의 용도를 잘못 선택했던 겁니다.


 1890년대 샌프란시스코에 설치된 주크박스 


음악 재생용으로 축음기를 사업적으로 활용할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뜻밖에도 샌프란시스코에서 포노그래프 대리점 직원으로 일하던 루이스 글래스 Louis Glass입니다. 그는 동전을 넣고 이어폰처럼 생긴 튜브를 귀에 꼽으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최초의 주크박스를 발명해냈죠. 1889년의 일입니다. 연주자 없이 스스로 작동되는 자동 피아노를 살롱과 카페에서 몰아내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글래스의 주크박스는 음반 산업에 단초를 제공합니다. 장차 콜럼비아 레코드라는 레이블로 성장할 콜럼비아 포노그래프는 재빨리 주크박스용으로 다양한 곡들을 녹음해 그 목록을 소개하는 10페이지짜리 카탈로그까지 발행했으니까요.


키네토폰 

포노그래프가 음악 감상으로 돈을 벌어들일 수 있음을 깨닫게 된 에디슨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습니다. 동전을 넣어 뭔가를 재생한다는 아이디어를 그는 개발 중인 활동사진기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에 적용하고 싶어 했고, 1895년 경 포노그래프와 결합한 키네토폰(Kinetophone)으로 선보였죠. 짤막한 활동 사진을 구멍으로 들여다보고 이어폰으로 배경음악을 듣는 기계였습니다. 극장에서 관객들을 앉혀놓고 상영하는 영화는 아니었지요. 에디슨은 이 기계가 주크박스처럼 수천 대나 팔릴 거라 예상했으나 실제로는 고작 45대만 판매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낸 형편없는 실적을 유럽에서 만회하고 싶어 했지만, 어이없게도 이 기계는 법원에 의해 해외 판매가 금지됩니다. 위에 에디슨이 언급했던 포노그래프의 용도 제안서에서 여섯 번째 항목(뮤직 박스와 장난감)과 관련된 특허를 다른 장난감 회사에게 판매했는데, 바로 그 회사에서 키네토폰이 장난감이라며 이 기계를 해외에 수출하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잠시 연도를 살펴보시죠. 1895년, 바로 뤼미에르 형제가 관객을 대상으로 최초의 영화를 상영한 해입니다. 발명왕이기도 했지만 특허권 분쟁으로 많은 사람을 괴롭혔던 에디슨이 오히려 특허에 발목을 잡힌 사례였지요. 그러나 에디슨은 영화산업의 미래를 정확히 꿰뚫어보는 안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비록 완벽한 포노그래프라는 환상을 달성하기 위해 사운드를 더욱 큰 소리로 재생해야 한다는 과제가 남아있지만, 연예계에서 활동사진의 미래는 활동사진과 포노그래프가 조합된 형태가 될 것이다. 입체 사진 역시 활동사진에 적용되어 더욱 두드러지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컬러 사진 기술이 도입되어 자연의 색감과 색조를 영상에 재현해낼 것이다. 따라서 활동사진의 미래는 사물 본연의 색깔과 그것이 내는 소리를 동시에 자연스럽게 재현해내는 기술이 될 것이다.


1910년에 간행된 영화지 『니켈로데온』에 에디슨이 예언한 영화의 미래입니다. 컬러 영화와 3D 영화의 출현을 이미 내다보고 있지요. 그러나 에디슨은 무성 영화가 등장하기도 전에 이미지와 사운드가 결합된 영상을 이미 체험한 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딕슨의 실험적인 유성 영화(Dickson Experimental Sound Film)'라는 제목이 붙여진 유명한 영상이죠. 


딕슨의 실험적인 유성 영화(영상은 1분이 경과한 뒤에 나옵니다)


1894년에서 95년 사이에 이루어진 이 실험은 실로 놀라운 광경을 보여줍니다. 영상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딕슨이 바이올린으로 연주하는 곡이 영상과 함께 실시간으로 녹음됐던 것입니다. 영화는 아닙니다만 소리가 덧붙여진 이 활동사진은 유성 영화가 탄생하기 전 소리를 녹음하는 것 다음으로 두 번째 큰 난관이 될 동기화 기술을 거의 완벽에 가깝게 재현해냈죠. 딕슨이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돌아온 에디슨에게 이 영상을 보여주면서 만족하길 기대했던 것과 달리 동기화라는 기술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에디슨은  만족은커녕 이 활동사진을 실패한 실험으로 단정해 버립니다. 영상을 기록한 필름과 음원을 녹음한 원통형 레코드가 현재까지 남아있지만, 이 영상은 대중에게 전혀 공개되지 못한 채 수십 년 동안 어두운 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말았지요.


1897년 그라모폰에서 제작된 음반

1890년대에 이르러 소리를 기록하는 기술은 어느 정도 발전했지만, 그것을 담는 음반 기술은 미미했습니다. 지금은 음반이라고 부르지만, 당시 포노그래프는 음반이라는 표현이 무색한 긴 원통형 실린더에 음악을 녹음했지요. 가격도 비쌌고 짧은 곡 하나만 담을 수  있을뿐더러 몇 번 재생하면 더 이상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내구성까지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복제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죠. 쉽게 말해 음악가를 데려다 곡을 녹음하면 그 순간 하나의 음반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세계에서 그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음반이었던 셈입니다. 고전음악 마니아에게 친숙한 레이블일 도이체 그라모폰은 여기에서 등장합니다. 벨 연구소에서 근무하다가 독일로 돌아가 그라모폰(Gramophone)이라는 회사를 연 에밀 베를리너 Emile Berliner는 원통이 아니라 접시 형태의 디스크를 발명해 특허를 냅니다. 마침내 음반을 대량 복제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겁니다.


원통형 음반 대신 그라모폰의 디스크를 채택해 축음기로 음악을 재생하고, 동시에 영사기를 활용한 영상이 1900년 파리 박람회에서 선보입니다. 레옹 고몽 Leon Gaumont의 크로노폰(Chronophone)이었죠. 사실 상 에디슨의 키네토폰과 거의 동일한 방식입니다만, 한 가지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키네토폰이 구멍과 이어폰을 통해 혼자 즐길 수 있는 것이라면, 크로노폰은 영화처럼 관객 상영이 가능했다는 것이죠. 특히 멀리 있는 관객에게 사운드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던 고몽은 공압식 펌프를 이용해 여러 대의 확성기를 재생할 수 있는 크로노메가폰으로 극장 상영을 실현해냅니다. 더욱이 배경음악을 깐 단순한 활동사진이었던 키네토폰에 비해 크로노폰의 콘텐츠는 영화에 좀 더 가까웠죠.


1910년까지 카메라폰(Cameraphone)이니, 시네폰(Cinephone)이니 하는 유사한 장치들이 계속 등장합니다. 사실상 키네토폰과 크게 다르지 않은 기술이었지요. 15년 전 자신의 발명품을 장난감으로 대접받았던 에디슨에게는 꽤 억울한 일이었을 겁니다. 절치부심하는 마음으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그는 1913년 2월과 3월 사이 여러 도시의 보드빌 극장을 통해 뉴 키네토폰을 선보입니다.


1915년 한 담배 회사 카드에 그려진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


당시 비슷한 기술의 경쟁자들을 제압할 수 있을 만큼 에디슨은 자신의 발명품을 개량합니다. 그러나 원통형 음반을 고집했던 에디슨의 포노그래프는 음반 표면을 긁는 금속성 소음을 줄일 수는 있었지만, 큰 극장의 관객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볼륨을 내기에는 부족했지요. 기껏해야 500명 정도의 좌석을 갖춘 보드빌 극장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언론을 통해 '놀라운 장치'부터 '에디슨의 새로운 장난감'이라는 평가를 받은 뉴 키네토폰은 1914년 3월 '실패한 센세이션(The Sensation That Failed)'이라는 버라이어티지의 헤드라인으로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물론 에디슨은 이런 조롱을 극복하고 앞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었을 테지만, 그도 예상치 못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합니다. 20년 전 유럽에 키네토폰을 판매하려 했던 것처럼 뉴 키네토폰을 유럽에 판매하려 했던 판로가 또 다시 막혀버린 겁니다. 설상가상으로 같은 해 12월 뉴 저지에 자리한 에디슨의 활동사진 공장은 화마에 휩싸여 잿더미가 됐지요. 복구 계획에서도 제외된 키네토폰은 이로써 종말을 맞이했을 뿐 아니라 영상과 사운드를 결합하려는 에디슨의 노력도 심각한 피해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1차 세계 대전은 다른 기술의 진보도 함께 가져왔습니다. 진동하는 막으로 표면을 긁어 소리의 파동을 기록한다는 레옹 스코트의 포노토그래프처럼 한때 에디슨 연구소에서 근무했던 외젠 오귀스탱 로스트 Eugine Augustine Lauste 역시 소리의 파동을 사진으로 촬영할 수 있음을 증명합니다. 그리고 이 기술은 진공관을 개발한 리 드 포레스트 Lee De Forest에 의해 전기 신호를 소리로 증폭시키는 기술과 결합하게 되지요. 전화기를 개발하는 과정에 축음기가 나왔던 것처럼, 1차 대전 중 통신 장비를 개발하는 과정에 라디오가 탄생하게 된 겁니다. 진공관에 커다란 관심을 보였던 벨의 웨스턴 일렉트릭과 에디슨의 제네럴 일렉트릭은 전쟁 중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이를 실용화하는데 성공합니다. 


1919년 뉴욕에서 열린 1차 대전 승전 기념일에서 첫 선을 보인 라디오 통신 기술은 1921년에 선출된 워런 하딩 대통령이 무명 용사의 무덤에서 가진 취임 연설을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에 운집한 사람들에게 라디오로 생중계하면서 놀라움을 안겨주었죠. 그중엔 몇 년 뒤 뉴욕 최대의 유성 영화 상영관인 록시 극장을 열게 될 새뮤얼 록시 로타펠 Samuel Roxy Rothapfel도 있었습니다. 그는 웨스턴 일렉트릭사의 사운드 증폭 기술에 관심을 보이면서 영화 상영이 아니라 극장의 특별 이벤트로 실시간 중계 방송을 시도하고 싶어 했지요. 웨스턴 일렉트릭 사는 이제 유성 영화에 활용할 기술 연구에 본격적으로 착수합니다. 에디슨의 키네토폰처럼 축음기를 활용하는 방식과 포레스트가 제안한 필름에 직접 소리를 녹음하는 방식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운드를 증폭하는 기술까지요.


워너브라더스사의 바이타폰과 폭스사의 무비톤 로고


리 드 포레스트와 함께 유성 영화 기술을 연구하던 시어도어 케이스 Theodore Case는 웨스턴 일렉트릭의 마이크와 앰프 사용권을 얻어 필름에 직접 사운드를 녹음하는 기술을 가다듬습니다. 그리고 그의 기술은 폭스 영화사를 운영하던 윌리엄 폭스 William Fox에게 채택되어 무비톤(Movietone)이라는 이름으로 선보일 채비를 하지요. 반면 축음기를 활용한 유성 영화의 기술은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를 꿈꿨던 샘 워너 Sam Waner의 후원을 받아 바이타폰(Vitaphone)으로 완성됩니다. 유성 영화 시대의 양대 산맥이 될 바이타폰과 무비톤 그리고 워너브라더스와 폭스 영화사의 경쟁 구도가 이뤄진 것입니다. 그러나 최초의 유성 영화가 마침내 베일을 벗을 때까지 영상에 사운드를 담은 영화가 그토록 큰 반향을 일으키리라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코닥 카메라를 고안해 큰 돈을 벌어들인 조지 이스트먼조차 유성 영화 투자에 대해 이렇게 말할 정도 였으니까요.


나는 그 발명품에 한 푼도 줄 생각이 없다. 
대중은 결코 그 기술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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