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그날의 OST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L Nov 19. 2015

<이태리식 결혼>을 듣는 밤

이태리식 결혼, 1964

점점 더 시간이 걸린다. 멀티플렉스 박스오피스나 영화제 카탈로그를 곁눈질하며 한참을 망설이는 것처럼, 볼 것 많은 VOD 서비스를 헤매다 리모컨 버튼을 누르기까지. 담벼락 포스터로 일일이 상영관을 확인하거나 일주일을 기다려 '주말의 영화'를 챙겨보던 예전보다 몸은 덜 피곤해졌지만, 선택의 기로에 선 마음은 더 피로해진 탓에 텔레비전으로 영화를 본다는 설렘은 아무래도 줄어든 기분이다. 선호도와 자금력을 앞세운 각종 영화 채널에 밀려 공중파에 편성된 영화의 매력이 사라진 것도 한몫했을 터다. 그러나 비토리오 데 시카의 64년작 <이태리식 결혼 Matrimonio All'Italiana> 같이 대중의 취향을 슬쩍 벗어난 영화를 (정말 피곤한 중간 광고 없이) 편하게 볼 수 있는 채널은 여전히 흔치 않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금요일 밤, 훈훈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게 했던 EBS의 '고전 영화 극장'을 사랑하는 이유다.




요란스레 경적을 울리며 택시가 광장으로 진입한다. 실신한 채 자동차에서 끌려나오는 중년 여인을 알아본 동네 사람들이 법석을 떨며 그녀를 부축한다. 여인의 이름은 필루메나. 바람둥이 사업가 도미니코의 살림을 안팎으로 알뜰살뜰하게 꾸렸으나, 무정한 사내는 젊은 아가씨와 로마에 신접 살림을 차릴 생각에 부풀어있다. 필루메나가 위중하다는 전갈을 듣고 임종을 지키려 달려온 도미니코. 사내는 엉겁결에 그녀와 결혼식을 올린다. 여인의 마지막 소원이라도 이뤄주려고. 하지만 모든 소동은 필루메나가 벌인 자작극. 전쟁 통에 만난 도미니코에게 몸도, 마음도 준 열일곱 매춘부는 20년이 넘도록 그의 곁에서 뼈 빠지게 일했고 이제 내쳐질 처지가 되자 이런 일을 꾸민 것이다.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이야 워낙 유명하지만, 그 뒤를 이은 핑크 네오리얼리즘의 존재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궁핍한 사회상을 필름에 담아내는 것을 고깝게 바라보던 이탈리아 정부 시책에 따라 네오리얼리즘이 가볍고 유쾌한 할리우드 스타일을 흉내 내면서 탄생한 이태리식 코미디 영화(Commedia All'italiana)를 일컫는다. <이태리식 결혼>이라는 제목 역시 다분히 이 (하위) 장르를 패러디한 타이틀. <더 붐 Il Boom>으로 핑크 네오리얼리즘 대열에 가세한 비토리오 데 시카의 영화 중에서도 별로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다. 61년 피에트로 제르미가 선보인 <이태리식 이혼 Divorzio All'italiana>과도 짝패를 맞췄는데, 이 시기는 엔니오 모리꼬네를 필두로 이탈리아 영화음악의 황금기가 막 도래한 때이기도 하다. 브루노 니콜라이, 피에로 피초니, 카를로 사비나 같은 작곡가와 더불어. 이 영화에 음악을 선사한 아르만도 트로바졸리 Armano Trovajoli도 그중 한 사람. 멜로 드라마와 코미디 장르에 자주 이름을 올렸는데, 자극적이지 않은 담백하고 귀여운 멜로디를 곧잘 선보이곤 했다.


어젯밤 영화의 훈훈한 엔딩을 떠올리며 트로바졸리의 앨범을 꺼내 듣는다. 이런 영화도 OST가 있을지 의심스럽겠지만 의외로(!) 있다. 이탈리아 영화음악을 아끼는 마니아층은 세계적으로 꽤 두터워 어지간한 고전 이탈리아 영화음악은 LP든, CD든 앨범으로 존재할 확률이 높다. 고향인 이탈리아에서 마에스트로로 대접받는 아르만도 트로바졸리 급이라면 소량 다품종을 오랫동안 고수해온 이탈리아 영화음악 레이블이 건드리지 않았을 리 없다. 


앨범엔 비토리오 데 시카가 메가폰을 잡은 세 편의 영화음악이 담겼다. 소피아 로렌에게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긴 <두 여인 La Ciociara>, 소피아 로렌이 1인 3역 연기를 펼친 <사랑의 변주곡 Ieri, Oggi, Domani> 그리고 오랫동안 궁금했으나 좀처럼 보기 어려웠던 이 영화 <이태리식 결혼>까지. 그러고 보니 세 편 모두 대배우 소피아 로렌, 작곡가 아르만도 트로바졸리가 비토리오 감독과 한 팀을 이뤘던 영화들. 앨범의 제목도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잊을 수 없는 3편의 영화음악(Colonne Sonore Originali 3 indimenticabili film di Vittoris De Sica)]. 고전 이탈리아 영화음악 레이블인 GDM 답지 않은 단아한 재킷이 눈길을 끈다. 



<두 여인>과 <사랑의 변주곡>에 비해 단출한 <이태리식 결혼>은 사실 음악이 돋보이는 영화가 아니다. 앨범에도 조곡(Suite) 스타일로 편곡한 6분 33초짜리 스코어 한 곡이 달랑 실려있는 데다가 그 멜로디마저 필름에서 방금 끄집어낸 듯 고색창연하기 그지없다. 리마스터링이 전혀 되지 않았다는 얘기. 오래된 한국 영화의 음악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을 법 한데, 관현악과 어우러진 만돌린 음색이 이탈리아 특유의 알싸한 향기를 풍긴다. 


중년 여인의 결혼 소동이 코믹하게 그려지지만, 이 영화에 깔린 정서는 그리 가볍지만은 않다. 영화가 중반으로 접어들 즈음 남 몰래 세 아들을 키워낸 여인의 사연이 눈물겹게 묘사되기 때문이다. 모종의 반전처럼. 트로바졸리의 영화음악이 공략하는 부분도 바로 그 지점. 도미니코의 박대와 모욕을 무릅쓰고 필루메나가 결혼을 감행하려 했던 까닭도 재산이 아니라 오직 자식들에게 사내의 번듯한 성씨를 물려주기 위한 선택이었음을 깨닫게 될 때 유쾌한 복수극은 짠한 모정으로 바뀐다. 핑크 네오리얼리즘이라고 해도 뼛속까지 박힌 네오리얼리즘을 모조리 털어내지 않은 데 시카의 영화들은, 그래서 감정의 진폭이 크다. 요조숙녀에서 억척스러운 중년 여인까지 소화하는 소피아 로렌의 폭넓은 연기처럼, 여인의 고단한 마음을 드러내는 선율 역시 같은 폭의 파고를 탄다. 겨우 한 곡일 뿐이지만, 비장한 멜로디로 시작해 여인의 과거를 들추는 신비로운 하프, 당차게 밀고 나가는 만돌린, 애틋한 기타음으로 이어지는 테마곡은 결혼을 암시하는 행복한 종소리로 마침표를 찍는다. 장성한 아들들의 축하를 받으며 도미니코와 두 번째 결혼식을 올리는 필루메나. "행복한데 왜 이리 눈물이 나는 걸까요?" 해피엔딩에 이르기까지 긴 세월 그녀가 훔쳐냈을 눈물이 트로바졸리의 마지막 선율을 타고 흐른다. 아름답지만 뭉클하게. 오늘밤도 좋은 꿈을 꿀 것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