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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 Sep 19. 2015

제리 골드스미스가 그려낸
비정한 도시의 표정

차이나타운, 1974

영화 <차이나타운 Chinatown>은 익히 들었던 소문대로 어두웠다. 기티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 여인의 운명은 불운했던 그의 기억처럼 끝내 자유로워지지 못했고, 배후에서 사건을 도모했던 범인은 자신의 죄를 은닉하는데 성공한다. 허무하고 냉소적이지만 좀처럼 잊기 어려운 매혹의 느와르. 때는 1937년, 장소는 로스 앤젤레스. 사립 탐정과 미망인, 살인과 치정 그리고 거액의 땅을 둘러싼 암투. 로만 폴란스키 Roman Polanski가 되살린 한 물간 시대의 유물과도 같은 이 느와르 영화는 데자뷰를 일으킬만한 낯익은 것들 투성이었지만, 그것들을 엮어낸 솜씨는 자메뷰처럼 신선했다. 


희미한 그림자 같았던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바람은 7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국 영화계에 새로운 활력을 가져다 주었다. 예술성과 상업성이라는 오래된 갈등 사이에서 고심하던 감독들은 시대와 작가 정신을 가슴에 품고 독립적으로 혹은 스튜디오 시스템을 통해 저마다 유니크한 스타일의 영화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로버트 알트만, 마틴 스콜세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에 이어 로만 폴란스키 역시 <차이나타운>으로 그 새로운 흐름을 탔다. 과거 유럽으로 건너간 할리우드 B급 갱 영화가 필름 느와르로 되살아났던 것처럼, 폴란스키는 잊혀가는 느와르로부터 아메리칸 느와르의 향기를 되새겨보려 했던 것이다.


로만 폴란스키는 <차이나타운>을 비교적 충분한 시간을 들여 제작했다. 반면에 영화의 오리지널 스코어를 작곡하기 위해 제리 골드스미스 Jerry Goldsmith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이미 필립 람브로Phillip Lambro에게 의뢰한 음악은 영화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려되었고, 그 대신 새로운 작곡가로 기용된 골드스미스는 열흘 안에 새로운 영화음악을 만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시간적인 제약에도 불구하고 제리 골드스미스는 의외의 결과물을 내놓는다. 2005년 미국 영화 연구소(AFI)가 선정한 '100대 미국 영화음악'에서 9위에 랭크 될 정도로 완성도 높은 스코어로 폴란스키의 느와르를 걸작의 반열에 올려놓는데 일조했기 때문이다.


<차이나타운>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l  Varese Sarabande(1995)


골드스미스의 열혈 팬은 물론, 전 세계 영화음악 팬들을 단숨에 매료시킨 <차이나타운>이 지닌 미덕은 결코 하나가 아니겠지만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영화가 가진 매력을 제대로 짚어내 그에 걸맞은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기존 영화음악의 정공법대로 제리 골드스미스가 영화의 시대적인 배경인 1930년대의 음감을 스코어의 기조로 삼거나 혹은 거기에 안주했다면, <차이나타운>은 결코 진부함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30년대의 음악 스타일을 생각했던 영화 관계자들의 마음을 돌리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 건 오히려 그였다.


영화음악의 콘셉트를 잡기 위해 화면을 보면서 작곡가는 가장 먼저 등장 인물에 주목했다. 냉소적이지만 집요한 사설 탐정 제이크 기티스와 불행하게 태어난 딸을 지키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에블린이라는 여인을. 그리고 두 사람 사이의 위태로운 로맨스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그들에게 조여드는 서늘한 긴장감을.


제리 골드스미스는 그 자리에서 당장 뚜렷한 멜로디를 만들어낼 수는 없었지만, 어떤 음색을 가진 악기들을 조합해 어떤 사운드를 빚어내야 할 지에 대해서는 느끼고 있었다. 어두운 음모의 향기를 본능적으로 직감하는 노련한 사설 탐정 기티스처럼. 작곡을 마친 뒤 그에 알맞은 규모의 오케스트라가 꾸려지는 일반적인 경우와는 달리 <차이나타운>은 작곡하기 이전에 먼저 오케스트라의 색깔이 정해졌다. 네 대의 피아노, 네 대의 하프, 두 대의 타악기, 크고 작은 현악기들과 트럼펫. 그 악기들을 활용해 탁한 느낌의 오프닝과 텁텁한 여운을 주는 엔딩 타이틀에 사용한 'Love Theme'는 이 영화와 영화음악이 지닌 심장에 다름 아니다. 


배우와 스태프들의 이름이 적힌 자막이 느릿느릿한 속도로 스크린 위에 미끄러질 때 처음으로 등장하는 이 곡에는 지나간 느와르에 대한 회고와 이제 곧 눈 앞에 펼쳐질 비극적인 로맨스에 대한 예고가 정교하게 맞물려있다. 주선율을 연주하는 트럼펫의 멜랑콜리한 음색은 분명 전통적인 스타일이지만, 그 안에는 피아노와 현악기를 덧댄 현대적인 감각과 도시의 밤공기를 가르듯 짧게 울려 퍼지는 하프의 음색이 한편에 스며있다. 어떻게 들으면 다소 미니멀한 느낌. 꼭 필요한 사운드의 정량만 덜어내 멜로디를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고 할까. 넘치지도 그렇다고 모자라지도 않게 꼭 필요한 만큼만. 남모를 사연을 간직한 남자의 우울과 의지할 데 없는 여인의 고독이 골드스미스의 선율을 따라 담배 연기처럼 피어오른다.


필름 느와르의 전성기에서 비켜 서 있지만 그 이전에 만들어진 느와르도 미처 도달하지 못했던 경지에 <차이나타운>이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분위기의 힘이다. 시대를 반영하는 화려한 의상이나 꼼꼼한 고증이 재현하는 분위기가 아니라 밀도 높은 이야기 자체가 발산하는 미스터리한 분위기. 단순한 언더스코어를 거부하고 아방가르드한 사운드를 통해 전통적인 영화음악으로부터 변혁을 꾀했던 제리 골드스미스의 실험정신은 <차이나타운>의 곳곳에서 빛난다.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앨범에서 개인적으로 상당히 깊은 인상을 받았던 'The Last of Ida'는 그 백미. 기티스가 사건의 실마리를 쥔 여인의 집을 방문하는 장면에 사용된 이 곡은 메인 테마를 부분적으로 편곡한 것에 지나지않지만, 중국 악기 중 하나인 발(鈸)을 연상시키는 전반부의 타악 리듬이 무척이나 돋보인다. 퓨전이라 할 수도 없고 크로스오버라 하기도 어려운 짧은 연주에 불과하지만, 그 리듬은 도시 자체를 하나의 거대한 차이나타운으로 변모시키는 가공할 위력을 발휘한다. 둔탁한 피아노에 짓눌린 진실, 서스펜스를 자아내는 위협적인 현악기 그리고 서늘한 하프 뒤에 감춰진 계략. 실타래처럼 뒤엉켜 기티스의 진로를 교란했던 비열한 음모의 정체는 밝혀지지만, 중국인으로 가득 찬 거리에서 맞이하는 허망한 결말은 이내 모든 것을 다시 은폐해 버린다. 진실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어둠과 절망스러운 표정마저 가리는 자욱한 연기에 휩싸여. 쓰라린 여운이 감도는 제리 골드스미스의 마지막 선율은 그런 비정한 도시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01  [01:59]  Love Theme From Chinatown(Main Title)

02  [02:27]  Noah Cross

03  [01:49]  Easy Living

04  [02:41]  Jake and Evelyn

05  [03:35]  I Can't Get Started_ Bunny Berigan & His Orchestra

06  [02:59]  The Last of Ida

07  [03:05]  The Captive

08  [02:05]  The Boy On A Horse

09  [02:16]  The Way You Look Tonight

10  [02:32]  The Wrong Clue

11  [03:05]  J.J. Gitters

12  [02:03]  Love Theme From Chinatown(End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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