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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 Sep 19. 2015

우정과 배신,
사랑과 복수의 돌림노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1984

얼마 전 확장판으로 재개봉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Once Upon A Time In America>에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흥미로운 몇 장면들이 등장한다. 그중 하나가 데보라와 데이트하기 직전 누들스가 운전기사와 나누는 짧은 대화 장면이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신이지만, 그 사내가 없었다면 세르지오 레오네Sergio Leone는 결코 이 영화를 세상에 내놓지 못했을 것이다. 운전기사로 분한 그 단역 배우가 바로 이 영화의 제작자이자 조지 루카스 다음으로 세상에서 영화로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는 아논 밀천Arnon Milchan이기 때문이다. 


화학 공장을 경영하면서 이미 사업가로 크게 성공한 밀천이 프로듀서로 영화계에 발을 들인 것은 1977년. 3년 뒤 그는 자신이 제작한 영화를 팔기 위해 칸 영화제 기간 프랑스를 찾았다가 호텔 테라스에서 레오네와 조우한다. 이 이탈리아 감독이 연출한 스파게티 웨스턴의 열렬한 팬이었던 밀천은 반갑게 말을 걸었고, 레오네는 누구도 귀담아 들어주려 하지 않는 어떤 갱 영화에 대한 아이디어를 하나 둘 꺼내놓기 시작했다. 그것도 머릿속에 장면들을 그려놓은 듯 세세하게. 장장 네 시간에 걸쳐 레오네가 흥에 겨워 떠들어대는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뒤 젊은 제작자는 그렇게 말했다. "우리 한 번 그 영화를 만들어 봅시다."라고.    


아논 밀천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세르지오 레오네가 시나리오도 쓰지 않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 대해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을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만나기 전까지 약 12년 동안 영화를 만들기 위해 애썼기 때문이다. 스파게티 웨스턴의 붐을 일으킨 '달러 3부작'을 종결하고 다시 촬영장으로 돌아가 <옛날 옛적 서부에서Once Upon A Time In The West>를 연출할 무렵, 자서전에 가까운 해리 그레이Harry Grey의『불량배들 The Hoods』을 읽고 새로운 영화로 미국의 근대사를 다뤄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발단이었다. 전 재산을 건 밀천의 든든한 지원 아래, 영화화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레오네를 포함해 여섯 명의 작가가 달라붙어 시나리오 작업을 끝내고, 2년에 걸쳐 촬영과 편집까지 모두 마친 네 시간짜리 영화가 마침내 칸 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였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새로운 걸작이 등장했음을 예언했다.


그러나 이 영화의 미국 배급을 맡은 라드 영화사(The Ladd Company)는 그 러닝타임으로 도저히 미국에서 개봉할 수 없다고 맞선다. 바로 1년 전, 세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으로 개봉시켰다가 참담한 흥행 실패를 거뒀던 <필사의 도전The Right Stuff>의 쓰라린 기억 때문이었다. 레오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139분으로 편집된 미국판이 개봉됐지만, 영화제에서의 극찬이 무색하게 미국인을 위해 편집된 영화는 정작 미국에서 참패하고 만다. 짧은 러닝타임의 문제라기보다 정교한 편집을 통해 1921년과 1932년, 1968년이라는 세 개의 시간대를 넘나들며 관객과 퍼즐을 맞춰가야 했던 영화가 너무나 '친절하게(그래서 밋밋하게)' 연대기 순으로 배열된 것이 패착이었다. 


자연 엔니오 모리꼬네가 작곡한 음악 역시 생략되거나 새로이 편집된 버전에 따라 다르게 들렸음은 물론이다. 애초 모든 불협화음을 배제한 스코어를 주문해 영화 속에 배치했던 감독의 의도와 다르게 영화음악도 제자리를 잃어버렸던 셈이다. 영화 개봉 당시 발매한 사운드트랙 앨범엔 빠져있던 'Suite From Once Upon A Time In America'가 14년이 지나 스페셜 에디션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도 그 때문이다. 영화의 주요 테마곡들을 추려 마치  지난날을 회상하듯 모리꼬네가 섬세한 손길로 매만져 조곡(Suite)으로 만든 이 곡은 편집되어 잘려나간 필름 안에 봉인되어 있었기에. 온전한 영화를 미처 접하지 못했던 팬들이 장장 13분이 넘는 이 스코어를 팬 서비스 차원에서 작곡가가 선사한 보너스 트랙쯤으로 받아들였던 것도 무리는 아닐 터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l  BMG Korea(1999)

 

현재 우리가 듣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영화음악이 스튜디오에서 정식으로 녹음된 것은 1983년 12월의 일이지만, 촬영에 들어가기 약 1년 반 전에 모리꼬네는 영화에 사용될 테마곡들의 작업을 대부분 끝마쳤다. 그러나 몇몇 테마곡이 실제로 작곡된 시점은 그보다 훨씬 이전인 70년대 중반이다. 제작에 반짝 활기를 띄어 제라르 드파르디유와 장 가뱅이 누들스와 맥스 역으로 각각 물망에 올랐던 때였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모리꼬네의 명 테마곡 중 하나인 'Deborah's Theme' 역시 이미 이 무렵에 만들어졌다. 다른 영화를 위한 테마곡으로서.


그로부터 7년이 흐른 뒤 영화 제작을 위해 프로덕션이 본격적으로 꾸려지면서 엔니오 모리꼬네는 피아노 앞에 앉아 감독의 주문에 따라 미리 장만해놓은 스코어들 중에서 테마곡을 골라내거나 곡의 길이를 수정하면서 하나하나 연주했고, 기본 멜로디만 완성된 그 곡들을 녹음기에 차례로 담았다(스페셜 앨범에 임시 버전으로 수록된 'Poverty'는 바로 이때 녹음한 것이다). 그리고 레오네는 녹음된 피아노 버전의 테마곡들을 틀어놓고 연기를 지도하고 영화를 촬영했다. 아직 풀 오케스트라의 깊고 풍성한 선율로 완성된 버전은 아니었지만, 카메라 앞에 선 배우들은 그 선율을 들으며 극의 분위기를 짐작했고, 또 감독이 요구하는 감정을 끄집어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영화음악을 바라보는 세르지오 레오네의 태도에서 기인한다. 자신의 영화 속 음악에 대해 레오네 감독이 남긴 말을 옮기면, 그의 영화에서 음악은 대사의  일부일뿐 아니라, 종종 대사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곤 했단다. 음악은 감정의 표현 그 자체이므로. 엔니오 모리꼬네와 호흡을 맞춘 다른 감독들보다 레오네의 영화에서 비교적 온전한 모습으로 모리꼬네의 음악을 만나고, 영상과 어우러진 그 선율이 관객에게 뚜렷한 인상을 남기는 비결도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레오네는 모리꼬네의 음악이 영화에 등장하는 타이밍과 그 음악이 흐르는 충분한 공간을 촬영할 때부터 이미 계산에 넣었기 때문이다. 


긴 러닝타임을 가졌지만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 흐르는 테마곡들은 의외로 단출한 편이다. 네 개의 테마곡이 중심이 되어 이 기나긴 영화를 끌고 가면서 멜로디의 골격을 마지막까지 거의 유지한다. 하나의 테마를 서너 가지 버전 이상으로 변주하는 기존 스타일과 퍽 다른데, 각각의 테마곡이 저마다 어떤 심상을 불러일으키고, 세 개의 시간대를 통과하면서 그 심상을 지속적으로 환기시킨다는 인상이 짙다. 복잡하게 구성된 영화에 맞춰 음악까지 다양한 버전으로 편곡하는 것이 아니라 모종의 접착제처럼 서로 다른 장면과 장면을 연결하고, 시간과 시간을 묶어주는 느낌이다. 젊은 누들스가 왜 도피해야 했고, 어린아이들이 어떻게 갱이 됐으며, 노년의 누들스를 감시하는 미스터리한 베일리 장관의 관계가 시간차를 둔 멜로디에 실려 한 꺼풀씩 정체를 드러낸다. 모종의 돌림노래처럼 우정과 배신, 사랑과 복수를 노래하면서. 


이 테마곡들의 멜로디가 엔딩에 이를 때까지 거의 바뀌지 않는다는 것도, 또 그 멜로디들이 모두 불협화음을 피해 비교적 각인되기 쉬운 화성으로 이루어졌다는 것도 감독 스스로 길고 복잡한 영화와의 균형을 고려한 결과였을 터다. 단적인 예로 불협화음이 하나도 없는 영화음악을 작곡해달라는 레오네의 주문을 받고도 모리꼬네는 갱들이 노조를 이끄는 사내에게 석유를 뿌리며 위협하는 장면에서 불협화음을 이용해 긴장감을 배가 시킨 유일한 스코어를 작곡했지만 편집 과정에서 그 곡을 발견한 감독은 과감히 뺐을 정도다.


이 영화의 메인 테마이자, 우정의 테마인 'Once Upon A Time In America'는 느린 호흡으로 1920년대의 뉴욕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누들스와 맥스, 팻시, 짝눈 그리고 도미니크의 어린 시절이 담긴 그 뭉클한 선율이 차오르는 밀물처럼 서서히 마음을 적신다. 철없는 아이들의 즐거운 한때를 예스러운 빅 밴드 재즈 스타일로 담아낸 'Friends'는 이 테마곡의 다른 이름. 금주법을 비웃으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찌감치 갱스터로 성장하는 소년들의 우정이 검은 돈으로 바뀌어 차곡차곡 가방에 담긴다. 


똘마니에 지나지 않던 거리의 아이들이 범죄의 길로 접어드는 순간을 포착한 'Poverty'는 피아노와 만돌린 그리고 리코더가 자아내는 애달픈 선율로 가난과 폭력의 상관관계를 노래한다. 선물로 가져온 컵케이크의 맛만 살짝 보려 했던 팻시가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허겁지겁 그를 먹어치울 때, 우리는 가난이 탐욕으로, 그리고 다시 범죄로 이어지는 과정을 목도하게 된다. 굶주린 배를 든든히 채워줄 빵 대신 선물용 케이크를 고른 소년에게 생크림은 얼마나 달콤한 유혹이었을까. 경찰의 부정을 빌미로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낸 누들스 패거리에게 범죄의 유혹 역시 그처럼 달콤한 것이었으리라. 


엔니오 모리꼬네와 콤비를 이루면서 오로지 그의 스코어에만 의지했던 세르지오 레오네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을 통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변화를 보여준다. 시대 정서를 환기하기 위해 기존의 곡을 적극 활용한 것이다. 조아키노 로시니부터 콜 포터까지 시대를 풍미했던 뮤지션들의 곡이 때로는 원곡으로, 때로는 편곡으로 누들스가 숨 쉬던 시간과 공간의 기억을 들춘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두 곡을 고르자면, 우선 스페인 태생의 작곡가 조셉 라칼레 Joseph Lacalle가 20년대에 발표한 'Amapola(양귀비)'. 발레복을 입고 춤을 추는 데보라와 벽 틈으로 그녀를 훔쳐보는 어린 누들스의 시선이 교차하던 황홀하고 애틋한 추억이 담긴 이 곡은 레오네 감독이 시나리오를 작업하면서 미리 골라놓았던 곡. 양귀비꽃처럼 아름다운 데보라에 대한 기억과 그녀를 잊지 못해 (양귀비에서 얻은) 아편으로 시름을 달래는 젊은 누들스의 표정을 레오네는 그 사무치는 멜로디에 은유했다. 절묘하고도 의미심장하게. 영화 속에 아스라이 울려 퍼지는 그 곡의 속내를 눈치챈 이들에게 퍼즐 한 조각을 슬쩍 쥐어주듯이. 


전화벨 소리나 불빛 같은 일상의 이미지로 영화의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옮겨 다녔던 레오네는 음악으로도 종종 그런 멋진 장면을 연출해낸다. 화장실 벽 틈을 바라보던 노년의 누들스가 1921년의 기억으로 빠져드는 순간이 'Amapola'의 멜로디를 빌었다면, 친구들을 모두 잃고 쫓기던 누들스가 1932년에서 1968년으로 귀환하는 장면에는 비틀스The Beatles의 명곡 'Yesterday'가 흐른다. 영화에 사용하기 까다롭기로 유명한 그들의 노래를 가져오면서 레오네는 모리꼬네에게 일찌감치 편곡을 맡겼고, 모리꼬네는 기차역에 흐르는 뮤작 스타일로 원곡의 분위기를 바꾸면서 'Yesterday(어제)'와 'Suddenly(갑자기)'라는 노랫말의 두 단어만을 그대로 살린다. 의문의 편지를 받고 35년 만에 뉴욕으로 돌아온 사나이의 감회와 석연치 않은 낌새를 두 개의 단어에 함축시킨 것이다. 그 장면에 그 곡을 선택한 것이 레오네 감독의 혜안이었다면, 단순히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옮기는 재미없는 편곡임에도 불완전한 노랫말로 오히려 영화에 굵은 밑줄을 긋는 모리꼬네의 솜씨는 이 장면을 한결 더 잊기 어렵게 만든다. 비틀스의 노래를 삽입한 수많은 영화 중에 이토록 짧지만, 이토록 강한 임팩트를 남기는 장면이 있었던가. 스코어를 벗어나 삽입곡으로도 모리꼬네의 음악과 레오네의 영화는 그처럼 서로 단단히 껴안고 있다.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유작으로 몇 년 뒤 세상을 떠났지만, 모리꼬네와 함께 이 영화와 음악에 토해놓은 그의 숨결은 4K 리마스터링으로 복원된 필름이 걸린 21세기 극장에서도,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거친 앨범에서도 여전히 살아 숨 쉬는 것만 같다.




01  [02:16]  Once Upon a Time in America (02:16)  

02  [03:40]  Poverty  

03  [04:29]  Deborah's Theme

04  [03:26]  Childhood Memories  

05  [05:24]  Amapola  

06  [01:39]  Friends

07  [04:25]  Prohibition Dirge  

08  [04:25]  Cockeye's Song 

09  [03:11]  Amapola - part II

10  [01:44]  Childhood Poverty

11  [01:04]  Photographic Memories  

12  [01:28]  Friends  

13  [04:19]  Friendship and Love 

14  [02:27]  Speakeasy  

15  [06:19]  Deborah's Theme - Amapola  

16  [13:37]  Suite from "Once Upon a Time in America"

17  [03:30]  Poverty (temp version)  

18  [04:51]  Unused Theme  

19  [03:39]  Unused Theme (version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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