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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 Sep 20. 2015

영화에 묵직히 내려앉은
가벼운 노래들

처녀 자살 소동, 1999

언젠가 'Alone Again'의 가사를 처음 헤아려 봤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그렇게 나긋나긋한 멜로디가 품은 고독하고도 통렬한 노랫말이라니. 기껏해야 연인과 이별한 후 늘어놓은 넋두리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노래의 잔마디마디엔 부모를 여읜 이의 절망과 아픔이 절절히 담겨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지독하리만치 염세적인 어조로. 비록 길버트 오설리번 Gilbert O'Sullivan은 그 곡이 자신의 인생과 무관하다고 말했지만, 그가 털어놓은 사연 역시 그리 밝은 빛깔은 아니었던 것 같다.


럭스의 외박으로 집안에 감금되다시피 한 리스본가의 딸들이 자신들을 엿보는 이웃집 소년들과 전화로 연결되었을 때 그들은 말 대신 턴테이블에 올린 노래로 대화를 나눈다. 수화기 너머 오가는 그 눈부신 선곡 리스트가 궁금해질 즈음 소녀들이 소년들에게 건넨 노래 중에 길버트 오설리번의 곡이 들어 있었다. 불길했다. 그러나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아직 애띈 세실리아도 모자라 네 자매 모두 세상을 등졌음을 알아채는 순간, 'Alone Again'의 노랫말을 깨쳤을 때와 비슷한 통증 그리고 어떤 부조화가 영화에서 느껴졌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낱말들의 모서리가 부딪혀 일으키는 불안한 조화가.   


다시  보고픈 마음은 들지 않지만 한 번 보는 것만으로 망각하기 어려운 영화가 있다. 소피아 코폴라 Sofia Coppola의 <처녀 자살 소동 The Virgin Suicides>이 그렇다. 가벼운 차림으로 봄 날씨를 만끽하러 나갔다가 호되게 걸린 감기처럼 영화는 들뜬 마음에 서늘한 그늘을 드리운다. 불쾌해서가 아니라 불안해서, 씁쓸해서가 아니라 쓸쓸해서, 그리고 또 허탈해서가 아니라 허전해서 무심히 오르는 엔딩 크레딧만 멍하니 바라봤다. 영화 제목이 스포일러나 다름없는 소녀들의 사연은 일견 단순해 보이지만, 그 이야기의 속살 같은 정서는 섣불리 단정 짓기 어렵다. 엄연히 존재하지만 모양을 가늠하기 어려운 기체처럼. 이 영화의 스코어를 담당한 뮤지션이 에어(Air)라는 이름을 가진 프랑스 출신의 듀오라는 것을 보고 소피아 감독은 그들의 음악보다 그 의미심장한 그룹명에 더 끌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음악은 곧 이 영화에 스민 공기 같았기에.


전자 사운드를 통해 70년대의 아련한 음감을 그러모은 앨범 [Moon Safari]로 성공적인 데뷔식을 치른 에어는 처음으로 영화음악을 맡아 자신들의 빛깔을 되살린 스코어로 코폴라의 영화를 채운다. 별도의 스코어 앨범과 나란히 나온 컴필레이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에 재 수록된 그들의 음악은 두 곡. 연인의 따스한 입김 같은 'Ce Martin La'와 소슬한 바람 같은 'Playground Love'. 다소 온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깨의 힘을 뺀 나른하고 몽롱한 사운드가 귓가에 퍼진다.


<처녀자살소동>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ㅣ  V2 Records(2000)


에어의 스코어가 소녀의 방 어딘가에 꽂아둔 아로마 스틱의 은은한 향기를 지녔다면, 소피아 코폴라와 음악 슈퍼바이저 브라이언 레이젤 Brian Reitzell이 함께 고른 삽입곡들은 톡 쏘는 향수처럼 농밀한 향을 풍긴다. 누가, 왜 향수를 뿌렸는지 대번에 눈치채게 할 만큼 그 음악이 흐르는 곳에는 그만한 정황이 포착된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뮤지션은 여성 하드 록 밴드 하트(Heart). 앤 Ann과 낸시 윌슨 Nancy Wilson 자매가 주축이 되어 결성된 하트는 중세시대의 복장과 숲, 나비의 일러스트 등 소녀 취향적인 앨범 재킷으로 여성에게 유독 인기가 많았다. 그들로 하여금 '레드 제플린의 여성 버전'이라는 별명을 얻게 했던 76년 데뷔 앨범에서 가져온 노래는 'Magic Man'과 'Crazy On You' 모두 두 곡이다. 교내의 모든 여학생들이 흠모하는 꽃미남 트립의 등장을 알리는 'Magic Man'은 사랑에 빠진 소녀가 자신을 보호하려는 엄마와 그녀를 데리고 떠나고픈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그린다. 트립과 만난 럭스의 설레는 마음 그리고 험한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 곧 딸을 보호하는 것이라 믿는 엄마의 단호한 표정이 그 노랫말에 포개진다. 하트의 또 다른 노래 'Crazy On You'는 그야말로 돌직구 같은 선곡. 그 곡을 배경으로 사랑의 밀어에 눈이 먼 럭스가 트립과 입을 맞춘다. 어떤 일이 닥칠지 짐작도 못한 채. 리스본가의 딸들이 트립 일행과 댄스 파티로 향하는 차 안에서 라디오에 잡힌 슬로안 Sloan의 노래가 예사롭지 않게 들리는 건 왜일까. 'Everything You've Done Wrong', 네가 잘못했던 모든 것.


<처녀 자살소동>의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은 여자지만, 정작 그 이야기를 꺼내는 화자는 남자다. 아니 남자들이다. 리스본가의 자매들을 바라보며 남 몰래 연정을 키운 소년들은 2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녀들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마 그것은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을 것이다. 여자와 남자가 느끼는 사랑의 환상 사이엔 금성과 화성 만큼의 거리가 있음을 깨닫기 전까지.


폴이 세실리아의 자살 기도를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은 자매들이 샤워하는 모습을 훔쳐보기 위해서였고, 도미니크가 지붕에서 몸을 던진 건 이사 온 지 일주일 만에 빠진 사랑에 대한 맹세였으며, 저녁 식사에 초대받은 모범생 피터가 혼비백산했던 건 화장실에 쌓아둔 생리대 때문이었음을 소녀들 역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비록 의사의 권유와 소심한 아버지의 배려로 그 거리를 좁힐 기회가 소녀들에게 주어지지만, 가장 어리면서도 가장 조숙했던 세실리아는 이해와 사랑은커녕 질식할 것만 같은 파티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긴 잠을 청한다. 파티장에 틀어놓은 홀리스(Hollies)의 노래, 'The Air That I breathe'의 천사처럼.


안타깝게도 사랑의 환상에 대한 이 거리감은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좁혀지지 못한다. 하룻밤 사이에 천국과 지옥을 맛본 럭스가 참담하게 무너져내리는 순간에도 리스본가의 자매들을 흠모한다던 소년들은 그녀의 비행을 훔쳐보며 마른 침을 삼킬 뿐이다. 절망적이다. 그리고 등장하는 길버트 오설리번의 노래.


난 근처의 탑 꼭대기에 올라가

내 몸을 던져버릴 거야

산산이 부서져 내린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모든 사람들에게

확실히 알려주기 위해


아마도 그런 심정이었을까. 리스본가의 자매들이 마지막 순간 품었던 모진 마음은. 허나 어른이 된 소년들은 그녀들의 심정을 끝내 헤아리지 못한다. 맞추지 못한 퍼즐 조각을 추억으로 남긴 채 어두워지는 거리 위로 에어의 노래가 묵직하게 내려앉는다.




01 [04:20] Hello, It's Me_ Todd Rundgren

02 [03:27] Everything You've Done Wrong_ Sloan

03 [03:40] Ce Matin La_ Air

04 [06:04] I'm Not In Love_ 10cc

05 [02:23] A Dream Goes On Forever_ Todd Rundgren

06 [05:29] Magic Man_ Heart

07 [03:39] Alone Again (Naturally)_ Gilbert O'Sullivan

08 [06:24] How Can You Mend A Broken Heart_ Al Green

09 [04:55] Crazy On You_ Heart

10 [06:03] Come Sail Away_ STYX

11 [03:47] The Air That I breathe_ The Hollies

12 [03:49] Playground Love_ 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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