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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 Sep 21. 2015

인간적인 전자음악과
기계적인 오케스트라

로보캅, 1987

<로보캅 Robocop>의 시나리오를 두고 프로듀서는 관심보다 근심이 앞섰다. 초인적인 히어로에 대한 미국인의 견고한 애정은 대부분 그들의 성장기를 지배한 코믹스에 연원을 두었고, DC와 마블을 벗어나 영화가 새로이 창조하려 했던 어떤 캐릭터도 사랑받긴 좀처럼 어려웠기 때문이다. 비록 <터미네이터 Terminator>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그런 의외의 행운이 연달아 일어나리라는 보장은 없었고, 무엇보다 에드워드 뉴마이어 Edward Newmeier가 <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에서 영감을 받아 완성한 <로보캅>의 초기 시나리오는 좀 유치했고, 영웅과 악당의 대결을 그린 코믹스의 기존 세계관과도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시나리오를 보낸 할리우드 감독으로부터 모두 거절당하자 영화 제작자는 어쩔 수 없이 외국으로 눈을 돌렸고, 그중엔 네덜란드 감독 폴 버호벤 Paul Verhoeven의 주소도 끼어있었다. 시나리오를 받아 든 버호벤 역시 십대에게나 먹히는 황당하고 멍청한 이야기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시나리오를 꼼꼼히 살펴본 그의 아내는 오히려 그를 설득했다. 그가 내팽개친 시나리오에는 생각한 것보다 더 심오한 이야기가 담겨있다면서.


폴 버호벤이 <로보캅>의 감독을 맡으면서 가장 먼저 한 작업은 시나리오를 대폭 수정하는 것이었다. 애초 아무 생각 없이 피와 살점이 튀는 자극적인 액션 영화로 기획됐던 이야기는 소수의 컬트 팬들을 사로잡을만한 철학과 종교적인 시각으로 다듬어졌고, 거기에 다시 매스미디어와 사회문제 그리고 기업윤리에 대한 의식이 켜켜이 더해져 이전보다 깊고 넓어진 세계관으로 확장됐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곧 컬트 팬이 소수가 아닌 다수로 확대되는 기현상으로 이어졌고, <로보캅>은  버호벤뿐만 아니라 80년대 할리우드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영광을 누렸다.


 <로보캅>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비단 영화 자체에서 그치지 않았다. 평소 영화음악을 즐겨 듣지 않는 이들의 귀마저 사로잡은 베질 폴레두리스Basil Poledouris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은 이미 두 차례 앨범으로 제작됐음에도, 2010년 세 번째로 발매된 한정반이 출시와 함께 곧바로 품절 사태를 빚었을 정도로 세월이 무색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폴 버호벤이 시나리오 작가를 비롯해 다른 스태프와 번번이 의견 충돌을 일으켰던 것과는 달리, 처음부터 그의 지지를 받은 영화음악가 베질 폴레두리스는 자신의 스코어 중 가히 최고라 할 만한 음악으로 감독의 믿음에 화답했다. 늘어난 영화의 폭과 깊이 만큼 풍부하고 뚜렷한 색깔을 지닌 오리지널 스코어로.


폴레두리스를 만난 자리에서 버호벤이 원했던 영화음악의 콘셉트는 이렇다. 방송국에서 주로 사용하는 록 음악적인 요소가 가미된 전자음악. 인간과 기계의 결합으로 탄생한 사이보그가 겪는 고뇌는 영혼과 육체 사이를 서성거렸고, 베질 폴레두리스는 이질적인 두 가지 톤의 음악을 한데 조율하는 것으로 테마곡의 가닥을 잡는다. 머피의 선한 인간성을 반영하는 오케스트라와 기계화된 육체의 강력한 힘을 부각하는 신시사이저 음색으로. 그러나 폴레두리스는 단순히 음색으로만 이질적인 요소의 차이를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그는 테마곡의 뼈대를 이루는 두 개의 모티브를 통해 캐릭터에 좀 더 가까이 접근하려 했다. 메인 타이틀부터 희미한 멜로디로 드리워진 '소울 모티브'와 이후 영화의 상징 같은 선율로 자리 잡은 행진곡 풍의 모티브가 바로 그것. 두 가지 음색과 두 개의 모티브를 자유자재로 조합해 머피/로보캅은 영화에서 더욱 입체적인 캐릭터로 거듭난다. 


<로보캅>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ㅣ  Intrada(2010)

 

클레런스 일당의 무자비한 공격으로 초죽음이 된 머피가 로보캅으로 깨어나 도시를 처음 순찰하는 장면을 그린 'Drive Montage'는 인상적인 테마를 기다렸던 관객의 탄성을 자아냈던 곡. 파트너였던 루이스를 통해 머피의 기억이 소울 모티브로 짧게 되살려졌다 사라지고, 첨단 기술로 기계화된 로보캅의 위용은 금관악기가 쏟아내는 장엄한 행진곡으로 그려진다. 철의 심장이 힘차게 다시 박동하는 느낌을 주기 위해 베질 폴레두리스는 대장간에서 모루를 두드리는듯한 리듬을 연주 도중 더하고 싶었고, 사정이 여의치 않자 녹음실에 비치된 소화기를 쇠망치로 두드려 그와 비슷한 효과를 주었다. 폴레두리스의 기발한 재치가 빛나는 대목이다.


저음의 관현악과 뒤얽힌 전자 사운드로 시작되는 'Murphy's Dream'은 미처 지워지지 않은 머피의 기억이 악몽 속에서 되살아나는 순간을 그린다. 키보드의 차가운 오스티나토로 자극된 신경이 한결 무거운 톤의 행진곡 모티브에 의해 각성되는 이 장면에서 음악은 다분히 종교적인 색채를 띤다. 폴 버호벤은 부활하는 로보캅의 이미지를 성경에서 따왔고, 이 아이디어는 이후 로보캅이 복수를 위해 폐쇄된 제철소의 물 위를 걷는 순간에도 재활용된다. 신체 훼손과 잔혹한 이미지를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태연하게 사용하지만 버호벤 감독은 사실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것이다. 


폴레두리스의 영화음악에서 공공연하게 드러나는 종교적인 색채는 그 코드와 교묘하게 연결되고, 이것은 다시 중세 시대의 갑옷을 입은 기사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로보캅은 고담시가 아닌 디트로이트에 사는 또 다른 다크 나이트였던 셈이다. 버호벤의 전작 <아그네스의 피 Flesh+Blood>에서 음악을 맡았던 베질 폴레두리스에게 <로보캅>을 재차 의뢰한 것은 그가 자신의 세계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작곡가일 뿐만 아니라 영화에 깔아놓은 다층적이고 복잡한 이미지의 결을 그의 음악이 세밀하게 묘사해낼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표적을 겨냥하는 사이보그의 정밀하고 파워풀한 사격 솜씨처럼.


기계화된 인간의 고뇌 그리고 차가운 복수와 함께 <로보캅>에서 다루는 또 하나의 주제는 미국 사회가 안고 있는 내부적인 모순을 들추는 것이다. 할리우드 감독이 아니라 오히려 외국인이었기에 가능했던 이 시각은 공적인 영역을 침범하려는 다국적 기업의 음모와 사양 산업으로 몰락한 디트로이트의 시대상을 광고와 뉴스로 재치 있게 반영하는 것으로 가능해졌다. 


머피/로보캅의 정체성이 깊이로 접근한 영화음악이었다면, (가까운) 미래의 흉흉한 사회상은 다양한 폭의 멜로디를 필요로 했다. 영화의 초반 인공 심장 광고의 훈훈한 배경음악으로 삽입된 'Have A Heart'는 신체가 기술로 대체될 수 있는 <로보캅>의 가능성을 암시하고, 단란한 가족이 즐기는 보드 게임 'Nukem'은 핵무기에 대한 의외의 불감증을 유머러스한 멜로디로 풍자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광고는 자동차 6000 SUX. 영화 속에서 크고 기름 많이 먹는 차로 공공연하게 자주 등장하는 이 고급 세단은 소형차보다 대형차를 선호하는 미국인의 취향을 꼬집는다. 흥미로운 건 이 자동차 광고에 사용된 멜로디가 맥스 스타이너 Max Steiner가 33년에 작곡한 <킹콩 King Kong>의 영화음악이라는 사실. 공룡처럼 거대한 몸집을 가진 대형 자동차와 그것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대기업과 미국인의 사이즈에 대한 집착을 모종의 전통으로 포장하는 클래시컬한 음악은 상품을 소개하는 성우의 중후한 보이스로 쐐기를 박는다. 'Big is back, because bigger is better than ever! 6000 SUX: An American Tradition!(큰 것이 돌아왔다, 클수록 좋으니까. 6000 SUX는 미국의 전통!)'  


<로보캅>을 영웅과 악당 사이의 원한보다 한 개인과 거대 시스템의 대결 구도로 확장시킨 버호벤은 다국적 기업 OCP의 이미지를 모호하게 그린다. 선과 악, 희망과 절망 그리고 파괴와 건설의 두 얼굴을 가진 세력으로. 기업의 야심과 치부를 동시에 드러내는 이사회 장면을 위해 베질 폴레두리스는 전통적인 영화음악의 코드를 이용한 'O.C.P Monitors'를 선보인다. 관현악의 보수적인 선율로 믿음과 엄격한 질서를 강조하면서 그 내부의 차가운 면모를 놓치지 않는. 전자음악을 최대한 절제했지만 저음부의 현악기를 통해 날카롭고 무거운 톤을 유지하는 오케스트라는 기계보다 더 차가운 온도를 지녔다. 머피의 죽음과 로보캅의 탄생이 역설적으로 OCP에 의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Rock Shop'의 액션 스코어가 전자음악과 오케스트라의 불꽃 튀는 충돌이었다면, 음모의 실체인 부회장을 만나는 자리에서 이어지는 일련의 선율은 더욱 교묘하고 대담해진다. 인간적인 전자음악과 기계적인 오케스트라의 만만치 않은 조합으로. 


다양한 코드의 단자와 소자를 배열해 폴 버호벤은 <로보캅>이라는 정밀하고 복잡한 기판을 창조해냈다. 그러나 그 부품 사이를 이어 가공할 힘을 전달하는 베질 폴레두리스의 음악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영화와 음악이 따로 존재하기 어려운 <로보캅>은 하나의 정교한 집적회로다.




01 [00:45] Main Title

02 [00:33] Have A Heart

03 [01:41] O.C.P Monitors

04 [00:25] Twirl

05 [04:56] Van Chase

06 [02:35] Murphy Dies In O.R.

07 [01:05] Robo Lives

08 [01:04] Drive Montage

09 [01:16] Helpless Woman

10 [00:26] Nukem

11 [03:05] Murphy's Dream

12 [01:44] Gas Station Blow-Up

13 [04:15] Murphy Goes Home

14 [01:45] Clarence Frags Bob

15 [03:42] Rock Shop

16 [01:47] Robo Drives To Jones

17 [01:04] Directive 4

18 [02:10] Robo & Ed 209 Fight

19 [02:43] Force Shoots Robo

20 [02:33] Big Is Better

21 [02:58] Care Package

22 [05:13] Looking For Me

23 [07:32] Across The Board(End Cred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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