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익명 Oct 26. 2015

#007. 마션

왜 삶은 죽음보다 귀한가

Fuck you, Mars!

화성에 사람이 산다. 꼭 감자튀김 사서 봐라. 


개봉 이후 눈 감고 귀 닫으면서 어떠한 스포에도 노출되지 않으려고 노력한 결과, 딱 저 정도의 정보만 갖고 드디어 오늘 봤다. <마션>! <그래비티>와 <인터스텔라> 이후 '우주물'은 무조건 영화관에서 본다. 스크린 안에서 카메라가 공중에 붕 떠있는 외로운 우주선을 풀샷으로 잡으면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가 가장 좋고, 지구를 저 멀리서 작고 아름답게 담아냈을 때도 좋다. 그럴 때는 이 작은 행성 지구에서 계급 나누고, 편 먹으면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우리가 다 레고처럼 평등하게 느껴지고 내 속세의 고민 같은 것도 다 모래 알갱이만 한 것 같다.


어떤 정보도 없이 봤기 때문에 웃음이 터질 때마다 꽤 당황스러웠다. 화성에 표류해 언제 올 지 모르는 구조를 기다리는 한 남자. 우울 그 자체의 스토리를 이렇게 유쾌하게 풀어낼 줄이야. 주인공 마크는 '긍정의 힘'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다. 그는 "나는 이 곳에서 죽진 않을 거야"라고 결정했고, 행동한다. 그리고 나는 그 '행동'들을 보면서 자꾸만 이 생각이 맴돌았다.



왜 삶은 죽음보다 귀할까?


사람들은 어떤 극단의 상황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왜지? 추측해보면 나 같은 경우는 아픔 때문이다. 숨을 못 쉬는 게 괴로울 것 같고 죽으면서 흘릴 피가 두렵고 화성에서 내 몸이 펑 터져버릴까 봐 무섭다. 내 안에서 죽음은 아픔과 맞닿아있다. 


그렇다면 마크도 죽는 게 두려웠을까? 몸이 펑 터지는 게 두려워서 그 모든 고통과 고독을 감내했을까? 그게 아니라면 삶이라는 게 어떤 가치가 있길래 500일이 넘게 모래 먼지 안에서 홀로 '살아있음'을 유지하게 했을까. 


삶은 고통이다. '지구'에는 그 고통 속에서 어떻게든 살려고, 조금이라도 더 잘 살아보려고 애쓰는 사람이 많다. 나도  그중 하나다. 그게 지구 속 '대한민국'의 풍경이니 당연한 듯 익숙해져 있었는데 '화성'에서도 저러니까 문득 낯설어진  것뿐이다. 왜 그렇게까지 해서 살려고 해? 라고, 문득 의문이 든  것뿐이다. 


마크처럼 극단의 상황은 아닐지라도 우리도 '살아있음'을 유지한다. 당신은 왜 사나? 또 나는 왜 사나? <그래비티>를 보면서는 공기의 소중함과 삶에의 경이 같은 것들을 느꼈던 것 같은데 <마션>은 참 이상하다. 영화는 분명 재미있고 감동적이었는데, 계속 내 염세주의를 부추긴다. 


아, 이런. 내일이 월요일이라는 '고통' 속에서 벌써 자야 할 시간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006. 올드보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