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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 Oct 19. 2015

#006. 올드보이

입단속을 잘해야 하는 이유

명심해요. 모래알이든 바윗덩어리든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예요.

하얀 얼굴에 쌍꺼풀 없이 길쭉한 눈과 빨간 입술. 나는 평소 이런 외모를 선호하는데, 내 친한 친구가 바로 이렇게 동양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친구가 쌍꺼풀 수술 이야기를 슬그머니 꺼냈다. 가족회의를 하던 중 자신의 '쌍수' 여부가 화두로 떠올랐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결사코 반대했다. 너는 지금 그 모습대로 예쁘고, 특히 네 눈이 너만의 매력 포인트라고 열변을 토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때 친구가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생각도 없던 자신이 수술을 고려하게 된 계기가 바로 내가 건넨 말 한마디 때문이라고.


상황은 우리가 함께 길을 걷고 있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간다. 때마침 세찬 바람이 불어왔고 내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우리는 잠시 멈춰 섰다. 그때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하던 내가 "너는 좋겠다. 눈에 먼지 들어갈 일이 없잖아"라고 했고, 그 말로 친구가 오랜 시간 꽁해 있었던 것이다. 노, 농담이었는데…. 하지만 내가 별생각 없이 던진 한마디를 누군가는 가슴에 담아두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영화 <올드보이>는 이러한 고민을 심화시킨다.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살자는 이름 풀이를 가진 남자, 오대수(최민식)는 어느 날 납치돼 15년 동안 감금된다. 의뢰인 이우진(유지태)에 따르면 감금 이유는 '말이 많아서'다. 더 자세히는 대수가 학창 시절에 아무 생각 없이 놀린 세치혀 때문에 연인이자 친누나인 수아(윤진서)를 잃고 평생을 불행 속에 살게 됐기 때문이다.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상대에게 그대로(+α) 전하고 싶은 복수의 기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진은 최면을 통해 자신이 과거에 처했던 상황과 가장 유사한 환경으로 대수를 밀어 넣는다.

 

최면으로 기억을 지우고 '왜' 감금했는지를 찾아내라는 것이 비겁했다고 비난하는 대수에게 우진은 말한다. 

"여태까지 최면 때문에 그날 일을 기억 못 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당신이 기억을 못 하는 진짜 이유가 뭔지 알아? 그건 말이야, 그냥 잊어버린 거야. 왜? 남의 일이니까!"

똑같은 일을 겪어도 보통 상처를 준 사람은 쉽게 잊어버리고, 받은 사람은 끝까지 기억한다. 일부러 기억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딱지가 졌다가 흉터가 되는 과정을 겪으며 잊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 더 맞겠다. 친한 친구끼리의 '쌍수' 에피소드 같은 건 사실 별일도 아니다. 둘 다 빵 터지고 하하 웃으며 "내가 그랬을 리가 없다", "네가 분명 그랬다" 티격태격 대다가 끝날 문제다. 상처를 받았어도 우리 사이에 사랑과 믿음이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속 두 남자의 사연은 너무나 복잡하고 안타깝다.


15년간 군만두만 주는 곳에 감금된 남자. 고독이 극에 달해 개미 환각과 마주하는 남자. 최면 때문에 자신의 친딸을 이성적으로 사랑하게 된 남자. 이처럼 대수는 징허게 불쌍한 남자다. 그와 동시에 복수만이 자신을 살게 하는 힘이었던 우진도 애달프다. 그들의 상황이 모두 절절히 이해된다는 것이 바로 이 영화가 가진 힘이다. 


진짜 무서운 것은 대수가 우진에게 잘못했다고 빌며 개처럼 짖고 스스로 혀를 자르는 장면이 아니다. 대수가 낸 소문이 퍼지고 와전되어 수아가 임신을 했다는 소문까지 돌게 됐을 때, 그녀는 실제로 상상임신을 한다. 우진과의 '관계'가 아니라 대수의 '혀'가 그녀를 임신시킨 것이다. 이는 말 한마디의 무게를 새삼 실감하게 하며 흥밋거리로 내뱉는 뒷담화가 징역 15년형에 처할 만큼 큰 벌임을 암시한다.


반면 말 한마디의 무게를 다른 쪽으로도 느낄 수 있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며 지루함과 사투를 벌일 때, 누군가 "눈동자가 맑으세요", "웃는 모습이 예쁘네요"라고 무심코 건넨 한마디는 그날 하루를 버티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심지어 그 말을 문득문득(=계속) 떠올리며 혼자 실실 웃기도 한다. 이처럼 말 한마디는 누군가의 하루를 햇살처럼 밝게 만들 수도, 평생을 암흑에서 살게 할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입단속을 잘해야 하는 이유다. 



2012-12-08

내 친구 결국 쌍수 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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