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tranger Jun 29. 2024

이방인이 되어보시렵니까?

1



이방인이 되기 위해서는


 도피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주제에 그냥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무언가 얻고 싶었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고 하던가, 그래서 나는 외면할 수 없는 내 불안감을 묻어버리고자 미국에서의 어학연수와 인턴십 기회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에 지원했다. 이방인으로써의 삶을 갈구하는 나의 본능과 차곡차곡 학습되어 온 삶에 공백을 두지 않으려는 마음의 이상한 콜라보레이션이 빚어낸 결과 었다. 두 가지 어학 성적과 한국어 자기소개서로 치른 서류 시험은 낮이 가장 긴 계절에 시작되었고, 이후에 줄줄이 이어진 한국어 인성 면접, 그리고 영어 에세이와 영어면접을 모두 치러냈다. 그리고 나는 한낮의 공기도 차갑게 가라앉았을 때가 되어서야 합격통보를 받았다. 그로 말미암아 나는 제법 그럴듯한 명분도 얻어냈던 것이다. 내 도피를 그럴싸하게 위장시켜 줄 수 있는.




 합격통보를 받고 난 후에는 모든 게 빠르게 진행되었다. 준비해야 할 일은 많았지만 누군가 나를 컨베이어벨트에 얹어놓고 해야 할 매뉴얼을 손에 쥐어준 느낌에 가까웠다. 나는 마치 모던 타임즈 속의 '등장인물 35'처럼 착실한 매뉴얼 수행자가 되어 기계적으로 비용들을 지불하고, 비자를 받고, 숙소를 알아보고, 항공편 가격을 매일같이 확인했다.







 나는 어학연수기간동안 D.C에 머무르게 될 거였고, 인턴십기간동안 머무를 지역은 미정이었다. 어학연수동안 뉴욕에 머무르기를 희망했는데, 아쉬운 마음이 컸다. 마침 출국해야하는 기간은 연말에서 연초 사이였고, 나는 뉴욕을 여행하고 D.C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일정이 확실해지고 나서야 비로소 뉴욕 여행동안 머무를 숙소와 일정 뿐만 아니라 D.C에서 생활할 집을 계약 할 수 있었다. 12월의 끝에 출국해서 일주일간 새해의  뉴욕을 여행한 후에 워싱턴으로, 두달간 나의 집이 될 곳으로, 떠나는 일정이었다.





 뉴욕, 워싱턴. 뉴스에서나 듣던 단어들의 나열에 나를 집어넣는 순간이었다. 수도없이 봐왔던 영화들이 만들어 진 곳에, 이방인이 되어 머무른다. 내가.






 너무나 오랫동안 꿈꾸어오던 일이 현실이 되어 다가오고 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설레이지가 않아'







 이제 와서 되돌아보면 준비과정은 지나치게 길었고, 합격여부는 너무나 불투명했으며 그에 반해 프로그램 합격에 걸고 있는 내 모든 것들은 너무나 무거웠다. 더하여 내가 착실히 도피를 준비하는 중에도 나의 '원래의' 삶 또한 바쁘게 지나가고 있었으므로, 학교생활과 아르바이트 같은 것들 사이사이에서 나는 프로그램 합격을 위한 준비를 해 내야 했던 것이다. -내가 내린 결정이었으니 불평할 것도 없지만,-다만 너무나 일상적인 것들 사이사이에 조금씩, 그리고 오랫동안 나의 일상에 존재했던 준비과정은 마지막에 가서는 기대감보다는 걱정과 지친 마음들이 더 커졌기 때문은 아니었을지.






어찌 되었건, 합격 이후에도 나는 떠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한동안 만나지 못할 친구들을 만나고, 준비할 물건 목록을 정리하고, 짐을 싸고, 교수님과 면담을 하고, 일하던 기관에 미국으로 떠난다는 이야기를 전하면서.






 마침내 마지막으로 작별인사를 하고, 홀로 인천공항 탑승장에 남겨져서 혼자 던킨도넛에서 산 무지막지하게 컸던 아메리카노를 들고 앉아있다가 비행기에 올라탔던 순간에도, 출국날 새벽에 갑자기 찾아온 폭설덕에 눈을 제거하느라 지연되었던 이륙을 기다리며 문자를 남겼던 순간에도, 나에게는 퇴근길이나 통학길에 있는 것 같은 기분만이 남아있었다. 다만 분명했던것은, 한참이나 작별인사를 나누고 홀로 출국장으로 들어섰을 때로부터 내가 완전히 혼자라는것만큼은 명확하게 느껴졌다는 사실이다.









어쨌거나, 비행은 시작되었다.









 멀미와는 아마도 반대의 작용으로 오랜 시간 배에서 생활하던 사람이 육지로 오면, 마치 땅이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마침내 떠날 수 있다는 목표에 착륙한 나는 아마도 너무나도 긴 불확실의 바다에서의 항해의 흔들림을 아직 지우지 못했을까.


 내가 느낀 비현실감들은 흔들림에 대한 방어기제로 내가 스스로에게 처방 내린 귀미테였을지도.


작가의 이전글 이방인이 되어보시렵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