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단편소설-1
[픽션] (2008년 7월 4일에 쓴 글을 약간 다듬었습니다)
ㅇ은 혼자 묻고 답하길 좋아했다. 굳이 소리내 말하는 건 아니었지만 자문자답하며 혼자 있는 시간의 '자아 분열'을 조금은 즐기는 편이랄까.
"맛이... 어때?"
"어떨 거 같은데?"
"글쎄... 한 번도 안 먹어본 맛?"
ㅇ은 이런 의미없는 대화를 주워섬기며 북한산 표고를 물에 불리는 중이었다. 2008년 5월 13일에 포장된 이 버섯은 어느 때인가 분단선을 넘어와 6월의 어느날 마트에서 ㅇ의 카트 안에 담겨져 그의 옥탑방으로 왔다.
흔하디 흔한 혼밥이었지만 어쩌면 손에 꼽을 만큼 신기한 일이었다. 이제껏 표고가 들어간 요리를 한 기억은 드물었는데, 말린 표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 표고가 부드럽게 씹히면서 향긋하다면, 말린 녀석은 숫제 목구멍이 질식할 것만 같은 강렬한 기운을 내뿜는 것이었다.
물이 휘발된 재료는 원래부터 강한 향과 맛을 지니게 되는 걸까. 그렇다면 기억 또한 애초의 맛 혹은 향과 상관없이 탈색되고 바래지거나 혹은 부풀려지는지도 몰라, 라고 훗날 ㅇ은 생각했다.
포장지에 기재된 표고버섯 요리법은 세 가지였다. 양념구이, 표고전, 그리고 조림. 하지만 먼저 물에 불려 물기를 짜내야 한다는 점은 같았다. ㅇ은 무표정하게 이 조리법들과 '식품 위생법에 의한 품질표시'를 읽어내려간 후 '적당량'의 버섯을 꺼내 수돗물에 담갔다.
이미 표고의 용도는 정해져 있었다. 토마토, 그리고 신김치와 함께 볶아서 파스타를 해먹으려는 거였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쌀밥은 하루 한 끼면 족했고 비빔국수는 어제 이미 먹었다. 공교롭게도 어제 마늘이 다 떨어졌기 때문에 대파를 잘게 썰어 포도씨유에 볶아 향을 냈다. ㅇ은 대파 조각들이 뜨거운 팬 위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옅은 갈색으로 변하는 양을 잠시 지켜 보다 잘게 썬 김치를 넣었다. 볶은 재료에 다른 야채를 마저 넣고 소스 몇 가지를 섞어 간을 맞췄다. 마지막으로 슬라이스 치즈 한 조각을 넣고 뒤적여주었다.
ㅇ은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이 과정을 해냈다. 파스타 면을 삶는 동안 소스를 다 만들었고, 삶은 그것의 물기를 빼는 동안 접시와 식기 준비를 끝냈다. 완성된 파스타는 신김치 때문에 검붉은 색과 시큼한 맛을 냈다. (약 십년 후 한국에 유행할 '백종원 레시피'처럼 적당량의 설탕을 첨가하지 않아 그런 모양이었다. 인생의 단맛과는 무관하게, ㅇ은 단 맛을 그닥 즐기지 않았다.) 소스와 면을 뒤섞어 조금씩 접시를 비워가던 ㅇ은 스파게티가 혼자 먹기엔 만만치 않은 양이라는 걸 문득 깨달았다.
바로 그때였다. 이미 뱃속에 들어간 표고 조각들이 다시 불어나기 시작한 것은. 배가 부른 상태였기에 위장이 요동하면서 신트림이 났다. 김치향에 섞여 분간하지 못했던 표고향이 코를 찌를 듯 입에서 새나오고 있었다.
그 향 덕분에 ㅇ은 전에 표고 요리를 한 기억을 떠올렸다.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였다. ㅂ은 퇴근 후 ㅇ의 집에 들러 계란을 입힌 표고전과 비빔면을 대접받았다. 예상치 못한 맛이라는 듯 ㅂ은 면가락을 표고전에 싸서 연방 감탄하며 먹어댔다. 며칠 후 ㅇ은 난생 처음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했다. 대답 없이, ㅂ은 그닥 유쾌하지 않은 웃음을 웃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ㅇ은 ㅂ에게 이별을 고했다. ㅂ은 굳은 표정으로 ㅇ의 방을 나갔다. 그 후로 표고전을 하지 않은 터였다.
ㅇ은 한숨을 쉬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대체 왜, 아무 생각 없이 말린 표고버섯을 집어든 걸까. ㅇ의 기억력은 좋은 편이었지만 본질보다는 사소한 것을 지나치게 기억하는 쪽이었다. 이를테면 누군가 만났을 때 먹었던 음식이나 입고 나갔던 옷차림까지 세세하게 떠올릴 수가 있었다. 강렬한 향이나 체취는 두말할 것도 없이.
헤어진 이후 ㅂ을 본 것은 딱 한번이었다. ㅇ은 무엇엔가 북받쳐 울었고 ㅂ은 화를 내면서도 굳이 ㅇ을 데려다주겠다고 우겨댔다. 그날 함께 먹은 밥의 맛이나 옷차림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하늘과 바람은 분명 떠올릴 수 있었다. 그건 쌉싸름한 맛이었다, 어쩌면 어디선가 말린 표고향이 났었는지도. 훌찌럭, 콧물을 뒤로 넘기며 ㅇ은 다시 ㅂ을 볼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기억이고 자시고 어쨌거나 배가 불러서 더는 먹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들려온 커다란 모터 소리에 놀라 밖을 내다보니 방역을 하는지 하얀 연기가 몽글몽글 창밖을 메우고 있었다. 매캐한 냄새가 방을 채우기 전에 ㅇ은 서둘러 창문을 닫았다. 창문 옆에는 책장이 있었다. 그 중 두어 권은 ㅂ이 준 것이었다. 한 권은 이제껏 펼쳐본 적도 없었다는 걸 떠올린 ㅇ은 책을 집어들었다. 책장 틈에서 얇은 종이 하나가 툭 떨어졌다. 거기엔 ㅇ이 그간 듣지 못했던, "사랑한다"는 말이 쓰여 있었다.
ㅇ은 호탕하게 웃었다. ㅂ에게 전화를 걸어 웃음소리를 들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표고향이 섞인 구취도. 안색이 굳어진 ㅂ을 떠올리며 한참을 웃고 나니 표고의 지독한 향 따윈 아무래도 좋다, 고 생각했다. ㅇ은 다시 표고요리가 좋아질 거라는 걸 예감하며 부른 배를 매만졌다. 거울을 보니 아직도 입가에 웃음이 남았다. 입 한쪽 꼬리를 올리며 좀 더 웃으니 비로소 소화가 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