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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 Oct 24. 2019

첫째 출산의 기억을 기록하다.

8년 전 아들과의 첫 만남을 추억하며...

제목 배경 사진: 아들이 태어났던 분만실 사진이다. 출산을 위한 병실들은 상당히 넓었고, 일부 병실은 진통 완화를 위한 욕조가 있기도 했다. 방은 아기를 씻길 수 있는 공간은 물론 짐볼을 사용하고도 남을 만큼 공간이 넉넉했다. 진통 때 여기저기 방방 떠다녀도 거침이 없던 공간으로 기억한다. 병실에 샤워실과 화장실도 딸려 있었다. 병원에 도착해서 아기가 태어나고 태반이 나올 때까지 4~5시간 정도 우리와 우리를 돕던 의료진에게만 허용되었던 공간이었다.



2019. 10. 23


8년 전 오늘, 나는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친구와 통화 중이었다. 언니는 조카를 예정일보다 조금 일찍 나았다던데, 나는 왜 예정일이 지났는데도, 아이가 배속 있을까? 오랜 시간 여기저기 산책을 다녀와도, 쭈그리고 앉아 방바닥을 닦아도, 아이는 평온하게 내 배속의 삶을 즐기느라 나오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아이가 제때 나오지 않는다는 하소연을 친구에게 늘어놓는데, 아래를 사악하고 적시는 액체의 흐름이 느껴졌다. '아, 이게 양수가 터지는 느낌이구나!' 난생처음 경험해본 일이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화장실로 달려가면서, 친구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아이 잘 낳으라는 응원을 들으며 통화를 마무리했다. 


일요일 오후 3시, 다행히도 그는 집에 있었다. 양수가 터졌으니 병원에 전화를 하라고 그에게 소리를 지르곤 화장실에 앉아서 양수에 대한 처리를 했다. 병원에 가져가야 할 짐을 단출하게 챙긴 나는 진통 덕에 매우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전화로 양수가 터졌으니 병원에 바로 와야 하긴 하지만, 초산이니 급할 게 없다는 조언을 들은 그는 느긋이 빨래를 널고 있었다. 엄청난 고통에 나는 그에게 F욕을 하며 택시를 부르라고 소리를 쳤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챈 그가 택시를 불렀다. 그리 멀지도 않은 병원 가는 길이 어찌나 멀게 느껴지던지, 뒷좌석에서 혼자 진통에 몸을 배배 꼬던 나를 그는 어떤 생각으로 바라봤을까? 


병원에 도착해서 출산 병동으로 올라간 우리는 나의 출산을 도와줄 조산사의 안내를 받으며, 출산실로 들어갔다. 당시 헬싱키는 출산 병동이 규모가 넉넉해서 Haikaranpesä (황새 둥지)라는 특별 병동이 있었다. Haikaranpesä는 자연주의 출산을 지원하는 병동으로, 의료진의 개입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건강한 산모만이 이용할 수 있었다. 특별 병동의 프로그램 일환으로, 우리는 출산 전에 병동을 방문하여 시설을 안내받고, 조산사와 출산에 대한 계획을 상의하며, 다른 예비 부모들과의 의견 교류는 물론, 태어난 지 하루 된 아기와 아기의 엄마를 만나기까지 했다.


사전 방문에서 조산사와 상의한 나의 출산 계획 중 하나였던, 욕조에 들어가서 진통을 완화시키는 방법은 안타깝게도 양수가 터져서 감염 위험으로 인해 실행할 수 없었다. 진통 완화를 위한 가벼운 샤워와 때마침 느껴지는 큰 일을 해결하는 것으로 욕조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했다. 이후 양수에 초록색 태변이 묻어 나왔기 때문에 만약을 대비해 아기의 심장 박동을 모니터해야 해서 출산하는 동안 내내 모니터와 연결된 선을 달고 있었어야 했다. 이 와중에 진통은 지속적으로 몰려왔다. 몸에 모니터를 달아놨기 때문에 진통 간격을 체크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epidural (무통)을 외쳐댔지만, 조산사와 수습생은 큰 공에 앉아서 진통을 참아보기, 웃음가스 마시기 등을 권하며 내 외침을 외면했다. 사전 병동 방문에서 조산사와 상의한 출산 계획에서 되도록이면 무통 주사를 피하고 싶다는 의견을 강하게 피력한 탓인 듯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줄 모르면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다니... 그러나, 이도 저도 안되니 그들은 결국 무통을 요청했다. 얼마 뒤 연락을 받고 온 마취과 의사가 진통으로 몸부림치고 있는 나를 보더니, 무통을 놓을 수 없다며 뒤돌아 나가 버렸다. 급진적인 진통을 결국 거의 생으로 경험해야 했다. 진통이 심할 때는 그의 목을 잡고 방방 뛰기도 하며 미친 사람처럼 난리를 쳤다. 그래도 진통을 조금이라도 줄여준다며 자궁 경부에 진통제를 놓아주었는데, 한쪽을 맞고 반대쪽을 놓아야 하는 순간 때는 이미 늦었다. 자궁이 다 열려서 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기를 낳기 위해 힘을 주다 보니, 진통이 덜 느껴졌다. 언니가 진통이 좀 심하다 싶으면 살짝 힘을 주면 진통이 조금 덜하게 느껴진다고 조언했었는데, 엄청난 고통에 그런 조언 따윈 생각나지 않았다. 또 한 번의 고비는 아기의 머리가 나오고 아기 입속을 청소하는 동안 잠시 힘주기를 멈출 때 찾아왔다. 미친 진통을 아이를 낳다 말고 고대로 느껴야 했던 것이다. 양수에 태변이 섞여 나왔기 때문에 아기가 태변을 먹었을 경우를 대비해 아기 입속 청소가 최우선이라는 조산사의 말은 일리가 있었으나, 가장 힘들었던 순간 중에 하나였다. 아이가 끼어있는 순간의 불쾌함을 뒤로하고 아이는 세상에 나왔다. 양수가 터진 지 4시간 만인 저녁 7시 즈음이었다. 머리카락이 많은 아기라는 조산사의 감탄과 함께 배경으로 존재하던 그가 조명을 받았다. 탯줄을 자르는 것은 아빠의 몫이었다. 그렇게 아들은 내 품에 안겼다. 그제야 그가 내 눈에 들어오면서, 사진 찍으라는 말을 하게 되었다. 진통으로 몸무림 치느라, 그 몸무림 치는 것을 옆에서 받아주느라, 둘 다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한동안 아기는 내 품에 안겨 젖을 빠는 시도를 좀 하다가, 조산사의 지시에 따라 아빠가 아기를 씻기고, 기저귀를 채워 아기 침대에 눕혔다. 이 와중에 조산사는 내가 흘린 피를 모아 양을 측정하며, 출혈양이 정상치임을 알려왔다. 아기가 잘 태어났다고 출산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태반이 나오질 않았다. 꽤 오랜 시간이 흘러 조산사와 수습 조산사가 내 배를 눌러 태반이 밀려 나오도록 애써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수술로 태반을 꺼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좁혀졌다.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의사가 분만실로 들어왔다. 나는 지쳐있어서 그 상황에 대한 기억이 없지만, 그에 따르면 아주 건장한 남자 의사가 뚜벅뚜벅 분만실로 들어와 내 배를 꾹 누르니 태반이 휙 하고 아주 손쉽게 나왔다고 한다. 너무 급속도로 진행된 출산으로 인해 태반도 조산사도 힘이 빠져 그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추측을 그가 더했다. 건장한 의사 덕택에 수술의 공포에서 벗어나 우리는 환호했다. 모두가 한 팀이라는 느낌이 잠깐 들었다. 그리고는 조산사가 출산으로 인해 찢어진 회음부를 꼬매 주었다. 지쳐서 그런지 그냥 살짝 건드리는 느낌만 있을 뿐 아프거나 하진 않았다. 


참고로 한국에서 출산을 위해 흔히 하는 관장, 제모, 회음부 절개는 없었다. 단 관장은 출산 전 샤워하면서 자연스레 되지 않았을까 싶다. 회음부는 출산이 급격하게 진행돼서 살짝 많이 찢어진 편이라고 조산사가 말해줬지만, 내가 따로 기준이 없어서 모르겠다. 출산에 관한 뒤처리가 끝나고 나는 샤워를 했다. 아들이 태어나서 내 품에 안겨있는 동안 똥을 열심히 싸놓아서 출산하고 절대 씻으면 안 된다는 엄마의 조언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샤워를 했다. 나중에 언니가 한국은 그러면 간호사 분들이 다 깨끗이 닦아주신다는데, 왜? 본인이 씻으면 안 되는 건가? 그렇게 폭풍 출산을 마치고, 아래층에 있는 입원실까지 걸어가기가 두려운 나는 휠체어를 타고 이동했다.


태반이 안 나온 엄마를 기다리며, 단잠 자는 아들, 2011년 10월 23일 19:01 출생, 3.65kg, 52.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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