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진, 어렵고도 어이없게 쉬운...

쓰다 보니 분노하게 되는 이야기

by 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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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길을 돌아 돌아 회사를 다니게 되어서 그런지 난 의욕이 차고 넘쳤다. 진행 중이던 프로젝트에 뛰어든 나는 내가 전문가라는 맘으로 프로젝트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이건 왜 이래야 하지? 다른 방법이 더 나을 것 같은데?' 등 머릿속에 떠오르는 질문들은 망설임 없이 던졌다. 나를 뽑았던 비주얼 디자인 부분 매니저(내 직속 상사) H는 그런 나의 의문과 주장을 유심히 들어주고 이슈화시켜주었다. 게다가 내가 처음 디자인한 시안이 맘에 들었던지, H는 시안을 UX 책임자에게 들고 가 자랑까지 했다. 그때는 그런 매니저 H가 엄청 고마웠다. 나를 뽑아준대다가 계속 '잘한다 잘한다' 해주었으니까... 게다가 H는 얼마 후 내 업무 역량을 보니 시니어로 뽑았어야 했는데, 자기가 실수한 것 같다며 승진 이야기를 넌지시 꺼내기까지 했다. 그런데 매니저 H가 뜬금없이 퇴직을 했다. 10년 장기 근속자 퇴직 프로그램의 혜택으로 2년 연봉만큼의 금액을 보상으로 받고 미련 없이 회사를 떠났다. 훌훌 털고 떠나는 마당에 H는 남은 부하들은 안중에도 없었고 당연히 내 승진 이야기는 한 여름밤의 꿈처럼 사라졌다.


이래저래 조직이 바뀌고 있는 상황에 낙동강 오리알의 된 우리 팀은 다른 기준으로 조직을 변경하며 두 그룹으로 나뉘며 다른 팀과 합쳐지고 분리되었다. 이 혼란 속에서 막 승진한 매니저 L이 나의 매니저가 되었다. 햇병아리 매니저 L은 열정적이었지만 팀원들의 근태관리에 지나치게 집중했다. L은 매주마다 팀원 개개인과 거의 잡담 수준의 회의를 했다. 다른 할 일이 있을 텐데,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 같았다. 안타깝게도 나랑은 애매모호하게 부딪히는 사람이었다. 그 애매모호한 부딪힘은 나의 주 업무가 아니었기에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시간이 지나 회사에 어느 정도 적응한 내가 시야가 넓어지면서 동료들과 나의 업무 역량을 비교하게 되면서 내 직책에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나와 같은 직책의 디자이너 동료들은 경험이 부족한 게 간간히 느껴졌다. 내공이 느껴지는 시니어 디자이너들도 있었지만, 시니어 디자이너들 중 상당수는 나랑 비슷하거나 나보다 일적으로 모자란 느낌이었다. 게다가 나보다 경험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디자이너가 어느 날 문득 승진을 해서 시니어를 달고 있었다. 쟤가 승진했는데 나는? 그제야 나는 내 담당 매니저 L에게 승진에 대한 문의를 했다.


돌이켜보니, 나를 뽑았던 매니저 H가 승진 이야기 흘리고 그냥 흐지부지 튀고 나서, 햇병아리 매니저 L이 내 매니저가 되었을 당시, L에게 전 매니저 H의 승진 거론을 끌어다가 나의 승진을 집요하게 요청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내 잘못이었다. 뒤늦게나마 승진 이야기를 꺼냈을 때 전 매니저 H의 시니어로 뽑았어야 했다는 이야기를 했어야 했는데 나는 그 이야기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 같다. 그저 지금 내가 하는 일을 바탕으로 충분히 승진이 될 것이라 자만했던 것 같다. 그러나 매니저가 된 지 얼마 안 된 L은 내가 아직 회사에서 보낸 시간이 너무 짧다며 내 요청을 단칼에 거절했다. 멍청한 사람과는 싸우고 싶지도 않다는 나의 오만함은 L에게 왜 나의 이전 경력과 현재의 역량을 고려하지 않냐는 항의조차 하지 않게 했다. 그녀와 계속되었던 애매모호한 부딪힘에 나도 모르게 많이 지쳤었던 것 같다.


우리 팀의 프로젝트는 회사의 주력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우리는 큰 변화는 없었지만, 회사는 시시때때로 조직을 변경하고 재구성했으며 종종 정리해고도 진행을 했다. 이래저래 시간이 흐르고, 나와 애매모호한 부딪힘이 계속되던 매니저 L이 이직을 했다. 임시로 다른 팀의 매니저 S가 우리 팀의 매니저가 되는가 싶었는데, S는 곧 출산휴가를 떠날 예정이라 우리 부서에 남아 있는 마지막 매니저 K가 임시로 우리 부서 전원의 매니저가 되었다. 임시라고 했지만 풍전등화와 같았던 회사의 상황상 K는 50여 명이 넘는 우리 부서의 매니저로 꽤 오랫동안 있었다. 워낙 많은 팀원을 챙겨야 했던 데다가 본인의 일도 많았던 매니저라 K는 매니저 L처럼 근태라던지 자잘한 거로 시비를 걸지 않았다. 모든 커뮤니케이션이 필요시 용건만 간단히였다. 그래도 새로운 팀원들과의 개인 미팅은 챙겼는데, 그 미팅 때 나는 K에게 그간 꾹꾹 눌러놨던 질문을 던졌다.


내가 왜 시니어 디자이너가 아닌지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벼르고 별렀던 질문을 던졌는데 매니저 K의 반응은 참 어이가 없었다. "시니어 아니었어요? 하는 일이 시니어 레벨인데요? 이전 매니저는 머라 했어요?" 대답을 대신한 K의 질문이 반가웠지만, 한편으로는 매니저 L의 멍청함에 대한 분노로 마음이 복잡해졌다. 승진대상이 아니라고 잘라 말했던 L의 대응을 들려주자 K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K는 지금 당장 승진시켜도 부족함이 없지만 일반적인 승진을 처리하는 시기가 아니라 복잡해지니 다음 승진 시기까지 몇 달만 기다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약속대로 몇 달 뒤 내 직책에 시니어가 살포시 붙었다.


지나고 보니 승진에 대해 내가 너무 무른 태도를 취했다. 당시에 한없이 좋아 보였던 매니저 H는 자신이 괜찮은 직원을 뽑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나를 챙겼을 뿐이었다. 회사를 떠나기로 결정한 뒤의 H는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다. H가 팀원들을 조금만 챙겼어도 후에 우리가 덜 고생했을 텐데... H는 자기만 아는 사악한 매니저였다. 반면에 매니저 L은 새로운 직책이 버거웠던 사람이었을 뿐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많이 모자라긴 했지만 자신의 기준이 있었고, 공평하려 애썼다. L이 매니저로 몇 년 경험을 더 쌓았다면 좋은 매니저가 되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조금은 든다. K는 매니저로서 능수능란했다. 그러나 많은 팀원들을 관리했던 그와는 마주할 기회가 매우 제한적이었기에 매니저로서의 K를 평하기는 언제나 조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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