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담집 : 이야기를 모으는 자 -1-

프롤로그 (1)

by 이사금

#001. 프롤로그 (1)






비가 드디어 그쳤다.

그동안 지루하게 내리던 비는 지난밤에 멎었다. 구름이 마지막으로 흩뿌리고 간 빗방울은 지금은 풀 위로 이슬이 되어 맺혔다. 수증기를 머금은 공기가 지상에 낮게 내려앉았고, 바람은 하늘을 뒤덮었던 미세먼지를 깨끗하게 걷어버렸다.


기운은 무겁지만 상쾌했고, 맑게 걷힌 하늘은 쾌청하였다.


정말이지 좋은 날씨였다. 아침 일찍 운동을 나서기엔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아침이 되자마자 날이 맑은지부터 확인한 여래는 환하게 갠 하늘을 보며 묵은 우울증과 무기력이 걷히는 느낌을 받았다.


한동안 뒤늦은 가을장마가 지독하게 근방을 맴돌았다. 감히 집 밖으로 나설 수도 없게 몰아치던 비바람은 사람의 발목에 족쇄를 채우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는 끝이라고 여래는 생각했다.


“글쎄, 지금은 땅이 젖어서 미끄러진다니까!”


아침 일찍 운동화를 챙겨 신는 여래의 뒤에서 엄마인 혜진이 잔소리를 했다. 그러나 여래는 결코 엄마의 말을 얌전히 듣는 딸이 아니었다.


그동안 집안에 묵히듯 너무 갇혀 있다고 생각한 여래는 엄마가 말리는 것도 무시한 채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왔다. 넘어지면 옷을 버릴 거라며 엄마가 뭐라고 하는 소리도 못 듣는 척하면서.


그렇게 밖으로 나온 여래는 내색은 하지 않았어도 마치 어딘가에 오래 갇혀있던 짐승처럼 해방감을 느꼈다.

여래는 정말이지 오랜만에 근처 공원으로 향할 수 있었다.


마을의 공원은 뒷산에 마련되어 있었고 그 산을 둘러싸듯 산책로가 정비되어 있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날이 좋으면 자주 그곳을 애용하기도 했다. 거기다 그 산책로는 짧지 않아서 만약 여래 정도의 체력을 가진 사람이 완주한다면 약 한 시간은 족히 걸릴 법한 거리이기도 했다.


오늘은 그 정도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여래는 산책로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약 이십여 분이 지나 여래가 중간에서 숨을 고를 무렵이었다.


그때 여래는 산책로 주변에서 조그맣고 뭉실뭉실한 짐승들이 얼씬거리는 것을 보았다. 여래는 그걸 보고 깜짝 놀라기는 하였지만 무서워하지는 않았다.


얼마 안 가 여래는 그것들의 정체를 알아챌 수 있었다.


‘…토끼다!’


눈앞에 모여 있는 그것들은 야생 토끼 한 무리였다.

여래는 이 공원 근방에 조그만 야생짐승들이 산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드문 일이긴 하지만 야생 토끼 몇 마리를 여기서 보았었다고 여래의 가족들도 몇 번 이야기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신기하게도 공원에 나타난 토끼들은 책이나 사진에 나오는 것처럼 마구 새하얗지는 않았다. 하얀 바탕에 점박이 무늬를 가진 놈도 있었고 시궁쥐 같은 잿빛 털을 자랑하는 녀석도 있었다. 거기다 크기는 어른에서 새끼까지 제각각이었다.


그런 녀석들이 지금 구경이라도 난 것처럼 여래가 있는 자리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설마 녀석들도 간만에 인간을 보고 신기하다고 느끼는 걸까?


그렇게 많은 토끼를 한꺼번에 본 것이 신기했던 여래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선 뒤 핸드폰을 꺼내어 녀석들의 사진을 찍어댔다. 자신들의 모습을 촬영하는 인간이 낯설지 않다는 것처럼 토끼들은 여래가 뭘 하는지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 토끼들의 덤덤한 태도를 보며 여래는 짐승의 심리가 갑작스레 궁금해졌다. 어딘가 정신이 팔린 것처럼 토끼들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고, 여래의 시선이 빤히 토끼 무리를 향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 케엑-! 키에엑! 께에엑!


그 순간 갑자기 공기를 찢는 것처럼 날카로운 소리가 주변에 울려 퍼졌다. 고요함을 깨뜨리는 그 기이한 소리에 여래는 토끼들에게서 시선을 돌려야만 했다.

이건 대체 무슨 소리일까?


케엑-거리며 공기를 찢는 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이건 사람의 비명은 결코 아니다. 여래는 자기 귀에 들려오는 소리가 꼭 짐승들이 싸우는 소리 같다고 느꼈다.


거기다 짐승들이 싸우는 소리가 너무 가까이서 들리는 게 이상하다.

여래는 의아해했다.


저렇게 날카롭고 사납게 울부짖는 소리라면 근처에 까마귀나 까치가 영역 싸움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묘하게 그 울음소리가 새들의 그것과는 달랐다. 그리고 그 소리가 여래와 너무 가깝게 울리고 있었다.

여래는 조금씩 몸을 움직였다.


평소와 같았다면 작은 짐승들의 영역 싸움 따위는 알 바 아니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가깝게 들리는 그 처절한 울부짖음이 여래의 관심을 끌었다.


- 케엑! 케에엑!


이윽고 숨이 넘어갈 듯한 짐승의 비명이 더 심해졌다. 이건 틀림없이 한 놈이 싸움에 밀린 탓이다. 신기하게도 그 소리는 더 가까워지는 것 같았고 여래는 소리가 들리는 아래로, 더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여래는 많이는 아니지만 조금은 얼어붙었다.


여래가 걸어 다니는 산책로는 나무판자를 엉성하게 이어 붙인 것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흙을 파내어 그 위로 나무다리를 연결한 것처럼 길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아래는 듬성듬성 안쪽이 파여 작은 짐승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 수 있을 정도의 통로가 이어져 있었다.


울부짖는 소리는 바로 그곳에서 들리고 있었다.

이윽고 여래는 보았다.


발밑에서 새하얀 털을 가진 조그마한 토끼와 갈색 털을 가진 기다란 짐승이 엉켜 있는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