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야사06]준다고 그냥 받네?

인턴이야기

by 일알

기차를 탔다

어느덧 인턴으로 일한지 5개월이 흘렀다.

일은 어느 정도 익숙해져있었고, 혼자서 외근을 다니는 것도 편했다.

혼자가면 왕복 교통편에서도 좀 편히 있을 수 있었고, 밥도 맘 편하게 골라 먹어도 되었다.

처음에는 수도권 지역에만 법인차량을 타고 다녔었는데, 점점 거리가 멀어지더니 나중엔 기차를 타고 지방까지도 갔다.

기차를 타는 날에는 괜히 설레었다.

다들 출근을 하는데 멀리 놀러가는 기분이었다.

운전을 하지 않아서 잠을 잘 수도 있었고 영화를 보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창밖을 구경하는 것이 좋았다.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은 나를 멀리 데려다줄 것만 같았다.

지금 내가 살고있는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 내 본심이었다.

문득 몇 일전 사수가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일알씨는 대학도 나보다 더 좋은데 나왔고 나이도 어린데 왜 여기다녀요?”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얼버무렸다.

내 사수는 다양한 활동을 하다가 졸업이 늦었고, 취업할 수 있는 기업이 적었다.

(당시만 해도 남자 나이 30이면 취업이 정말 힘들었다)

별다른 선택지가 많이 없어서 이 회사를 다니는 것 같았다.

그의 눈에 나는 더 좋은 회사에 갈 수 있어보였던 것 같다.

그 말이 고마우면서도 싫었다.

좋게 봐주고 용기를 준 것에 고마웠다.

비슷한 처지의 제 3자의 의견인지라 설득력이 있었고 힘도 되었다.

반면 뭔가 나는 포기했지만 너라도 나가야지…라는 느낌이 들어서 싫었다.

정을 쌓지는 않아 친하지는 않았지만 동료애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7년정도 뒤에 문득 회사 근처에 왔다가 궁금해져서 사무실 앞을 가봤다. 먼발치에서 잠긴 문을 열고 들어가는 사수의 뒷모습에 왜인지 뭉클한 마음이 들었었다. 결국 떠나지는 못했구나하는 복잡한 감정이었다.)



죄인이 되었다

기차 안은 시끌시끌했다.

엠티를 떠나는 대학생 무리들이 탄 탓이었다.

행복하고 순수한 냄새가 났다.

그들과 달리 정장에 구두를 신은 나는 서류가방을 들고 역에 내렸다.

내가 갈 곳은 즐거운 엠티가 아닌 업무의 현장이었다.

역에서 내려 연구단지로 들어가는 길은 꽤 멀었다.

무더운 날씨 탓에 택시를 타야했다.

오늘의 강의가 진행될 강당에 도착하여 셋팅을 하였다.

시작시간까지는 한시간 남짓 남았고 여유가 있었다.

옷을 단정히 하려 거울을 보았다.

잘생기지는 않았지만 당당했다.

그래도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있는 것 같아 스스로 뿌듯했다.

사진을 한장 찍어 어머니께 보내드렸다.

아들이 잘 커서 이렇게 사회에 나와있다고 보여드리고 싶었다.


산책을 하며 시간을 죽이던 중 전화기가 울렸다.

아직 강의시작은 족히 한시간은 남은 시점.

왠지 불안했다.

업체담당자였다.

그리고 나에게 다짜고짜 따졌다.

“지금 머하시는거에요, 대체?”

알고보니 오늘 강연의 주인공인 강사가 일찍 도착한 것이었다.

그리고 나처럼 산책을 하다가 담당자를 만난 것이었다.

사전에 연락을 하기에 문제없이 도착할 것이다라며 나에게 안심을 시켜줬던 까닭이 이렇게나 빨리 도착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교육시간보다 늦게 도착했다면야 심각한 일이었겠지만 오히려 먼저 도착한 것이 아닌가?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담당자는 그렇지 않았다.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더니만 교육이 끝나고 결국 나를 불렀다.

그가 문제 삼은 죄목은 ‘강사가 혼자있었다’, ‘왜 맞이하지 않고 연락도 안했는지’, ‘돈을 내고 부른건대 내가 하는 일은 무엇인지’ 등 여러가지였다.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여러차례 강사와 연락을 충분히 했었고, 그가 도착 후 연락도 없이 산책을 하는 것까지는 막을 방법이 없었다.

산책을 하고 강의를 하면 체력이 떨어져 전달력에 문제가 생기는 것일까?

일단은 나는 그저 죄송하다고 굽신거렸다.

그 말 이외에는 딱히 할 말이 없었기도 했다.

내가 서울에 닿기도 전에 소식이 먼저 회사에 닿았다.

구두로 해당업체로부터 계약해지 통보를 받았다고 했다.

사무실 분위기는 무거웠다.

사고를 쳤다는 느낌이었다.

내 마음도 무거웠다.


억울했다.

잘못을 떠나서 같은 상황이 또 벌어져도 다른 방법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할 수 있는 것을 충분히 했다.

그럼에도 계약해지를 통보받은 죄인이 되어 있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담당관은 원래 기분파로, 계약해지 이야기를 여러번 했었다고 했다.

그리고 어찌된 일인지 한 번도 계약해지를 당한 적은 없었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이번에도 계약해지는 없었다.

그저 죄목을 모르는 죄인만 있었다.




실장이 불렀다

수요일, 나와 내 동기를 함께 불렀다.

“느그, 이번 토요일에 머하노?”

하필 약속이 없기도 했지만, 있어도 없어야 할 분위기였다.

동기 역시 다른 처지는 아니었다.(둘 다 만날 여친 없는 솔로였다.)

실장은 우리를 토요일에 본인의 집으로 불렀다.

식사초대 하거나 한 건 아니었다.

‘손님’이 아니라 ‘인부’가 필요했다.

실장은 번화가에 있는 높고 넓은 오피스텔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마침 새로운 가구가 몇 개 왔는데 오래된 가구를 버려줄 손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정도 일은 업무의 연속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월급을 주니 내 주말까지도 이미 고용한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는 굳이 주말에 가구를 옮긴 이유는 우리가 평일엔 일 때문에 바빠서라는 말을 굳이 덧붙였다.


그렇게 우리는 목장갑을 끼고 여러 가구를 옮겼다.

실장의 어린 자녀들은 집에 방문한 '인부'들을 신기한 눈으로 보았다.

이 아이들이 커서 주말에 누군가의 집에서 가구를 옮긴다면 실장은 어떻게 생각할까?

두 세시간의 작업 끝에 미션은 끝났다.

열심히 오버페이스를 한 덕에 생각보다는 빨리 끝났다.

실장은 흡족했다.

인사를 하고 돌아가려는 우리를 불러세웠다.

주머니에서 지갑을 주섬주섬 꺼내어 만원 짜리 몇 장을 쥐어주었다.

“주말에 와서 일하느라 고생했다.”

사람의 마음은 참 이상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꼴도 보기 싫던 실장이 갑자기 우러러보였다.

그래, 돈이라도 주니, 보람은 있네.

주말 알바한 셈치고는 시급이 쎘다.

어른이 챙겨주는 돈은 거절하는거 아니라고 배웠다.

나는 감사의 인사를 하며 넙쭉 받았다.

그러나 이어진 실장의 한마디에 내 보람은 산산조각이 났고, 수치심만 남았다.


"준다고 그냥 받네?"




퇴사를 결심했다


인턴 종료까지는 한 달이 채 안남았다.

정규직이라고 불러놓고 계약직으로 서명했지만 회사는 내가 계속 다닐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미 나에게 많은 업무들이 배당이 되었고, 당장 누군가가 그 일을 대체하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정규직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나는 퇴사를 하기로 했다.

학군단 생활부터 꼬박 5년을 겪은 군대문화야 이미 익숙했다.

사이 안 좋은 팀장들 사이에서 처신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실장이 사적일 일을 시키던, 사무실에서 게임을 하던 그냥 월급을 받으면 그만이었다.

퇴사를 결심한 이유는 이 회사에 입사를 한 이유와 같았다.

내가 하고자 했던 일이 아니었다.

이것은 다른 모든 단점들을 참을 수 있는 이유이면서도 다른 모든 장점들을 버릴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결론을 내리니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백수가 되어 원점으로 돌아가더라도 괜찮았다.

우물쭈물하다가 시간이 흘러버려서 사수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왜 여기서 일하느냐고 묻고 싶지는 않았다.


시스템이 잡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큰 기업에 가고 싶었다.

사내메일이 있고, 인트라넷이 있으며, 승진도 평가도 있는 곳,

주말에 나와서 청소 하지 않아도 청소해주시는 분이 있는,

사적인 일을 시켜도 참을만한 연봉과 대우를 받을 수 있는

내 이력서에도 일관적으로 자신있게 쓸 수 있는 그런 곳을 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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