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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략가K Mar 13. 2017

#5. 인도 독립 신화의 간디를 영접한 이야기

마하트마 간디가 암살당한 간디 슴리띠를 방문하고...

  한 여행지에 도착하면 걷는거 만큼 그 여행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건 없다고 생각한다. 보통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닐 뿐만 아니라, 조금 거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보통사람들이라면 오토릭샤를 탈정도의 거리 역시 걸어서 다녔다.

  

   거리를 거닐다 보면 그 국가의 특유의 거리, 현지인의 삶을 자세히 볼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얻게 된다. 인도인들은 평소에 어떻게 살아가는지, 어떻게 비는 시간들을 보내게 되는지 볼 수 있게 된다. 또한 대한민국과는 조금 다른 이국적인 풍경 속에 내가 걸어 다니게 되면 내 가이 인도에 있구나라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게 된다. 걷는 것 보다 인도를 짧은 시간에 이해를 하고 느낄 수 있는 교통수단은 없다고 생각한다.


  걸어 다니는 또 다른 이유는 델리의 오토릭샤는 굉장히 비쌌다. 웬만한 거리 가는데도 150루피, 200루피 대한민국의 택시비의 기본요금과 비슷할 정도였으니, 차라리 웬만한 거리를 걸어가자고 결정했다. 칸마켓에서 간디 슴리띠를 다음 방문지로 결정하고 간디 슴리띠로 향해 걸아가고 있을 때 가는 길이 그렇게 멀 줄은 상상도 못했다. 지도에서 보이는데로 이렇게 저렇게 가면 되겠구나 라고 생각만 하고 가는데,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이요, 인도의 특색적인 풍경은 아닌 이건 무슨 대한민국의 용산구의 국방부의 옆길을 걷는 풍경과 비슷해야 될까? 아님 인도의 부유층이 사는 동네인 걸까? 벽은 높았으며 가로수길과 델리에 와서 걷는 좁은 골목과는 다른 느낌의 거리였다. 몇몇 개의 집은 외교관의 집으로 보이기도 했으며 도로에는 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비싼 차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1시간 반 정도 걸었을까? 정말 아까 점심에 먹은 탄두리 치킨을 다 쓴 기분이었다. 그렇게 조금 더 걷다가  멀리서 GanDi Smriti라는 표지판을 보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사실 인도에는 간디와 연관된 유적지가 많다. 국립 간디 박물관이 있고 간디를 산화시킨 라즈가트가 있다. 특히, 내가 가려는 간디 슴리띠는 간디가 암살당하기 전까지 머물렀던 집으로, 실제 암살이 벌어진 장소이기도 하다. 현재는 마하트마 간디를 기리는 기념관으로 조성되어 있다. 라즈가트와 함께 델리의 2대 간디 추모하는 장소로 유명하다.

 

  아쉽게도 나는 인도 독립운동사에 가장 큰 영향을 줬다고만 알고 있지, 더 많이 간디에 대해서 공부하고 오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적어도 간디 관한 영화 하나 정도 보고 왔으면이 여행지가 조금은 다르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이 저택을 한 바퀴 돌면서 간디가 인도인의 가슴속에 크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8억이나 된다고 하는 인도인구중에서 많은 지도자들이 넘쳐나고 이들을 존경하면서 매 시대의 암흑기를 극복해냈다고 생각한다. 오늘 다녀온 니자무딘의 무덤이며, 그리고 델리의 있는 간디, 그리고 많은 불가촉천민에게 자유를 주기 위한 암베르카 박사등 많은 지도자들이 인도의 국민을 위해 노력했으며 봉사했고, 후대에는 이들을 존경하는 인물이 유별나게 많은 거 같다.

 

 물론 위인들이 적은 나라가 어디 있겠냐 만은, 이런 정신적 지도자들이 지금의 인도를 만들어내고 그들의 삶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가끔 나는 이런 분들이 인도에 내려온 신이라고 생각한다. 3억 3천명이나 되는 힌두교의 신들은 이렇게 많은 대중들을 위해 노력하고 헌신했던 대표적 지도자들이 나중에는 많은 사람들의 존경의 대상으로 여겨지게 되고 이런 인물들이 구전의 구전으로 내려가 신으로 섬기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인도는 약 200년 동안이나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35년의 지배를 받은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영국 사람들로부터 많은 박해와 설움을 겪으며 살았고 이런 인도를 독립시키기 위한 지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간디이다. ‘인도 독립의 아버지’ 앞에 내가 서 있었다.

  간디는 영국에 유학하여 변호사가 된 후, 인도인의 정당한 권리를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몇 차례 단식과 옥에 갇힘. 1919년, 영국은 인도를 억압하기 위해 영국에 항거하는 사람은 재판 없이 처형할 수 없다는 법을 만들었고, 법도 수호하면서 자신의 저항의 식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 ‘비폭력 정신’이었던 것이었다. 원래 한 나라가 독립 운동을 할 때는 전쟁을 일으키거나 무력으로 맞서 싸우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비폭력 정신’을 토대로 한 그의 독립운동운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폭력을 쓰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계몽 운동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그의 정신을 전파하였다.


  영국의 요구를 무시하고 영국 재판소에 가지 않도록 인도 사람끼리 타협하고 양보하기로 하며, 마치 영국 사람들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자 했다. 아무리 영국이 인도 사람들을 억지로 잡아가도 인도 사람들이 반항하지 않았다. 이렇듯 인도 사람들이 철저하게 비폭력주의에 따르자 영국 정보는 감옥에 갇힌 인도 사람들을 풀어 주고 세금을 크게 올리려 했던 것기했다. 그리고 영국에 대항하는 인도 사람들을 구속과 투옥이 유리한  ‘롤라트 법’도 폐지했다. 그의 사상과 철학이 국민을 움직였고, 지배자의 억압을 무시하고 고립시키는데에 성공하였다.

  영국이 전쟁자금이 바닥이 나서 그의 식민지 인도로 부터 자금을 모을 수 있는 방법인 ‘소금법’을 만들어 인도 국민이 소금을 영국에서 비싸게 수입된 소금만 쓸 수 있게 하는 법을 만들었지만, 간디는 직접 바닷가에 가서 소금을 만들었다. 그를 따라온 국민이 그를 따라 ‘소금 대행진’을 벌였고 많은 제자들이 간디의 뒤를 이었다. 간디는 체포되었다. 이 사실을 안 인도 국민들 은영 국인 소금 공장으로 달려가고 그렇게 우리에게 유명한 유혈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 때 간디는 감옥에 투옥되었고 그가 법정에서 한 변론은 많은 인도인에게 비폭력 정신의 뜻을 다시 한번 각인 시켰다.

저는 어떤 관용도 바라지 않습니다.
어떤 정상참작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 선 것은
법적용어로 말하자면
의도적 범죄에 해당하겠지요

그러나 저는 제가한행위에 대해
한 시민으로서마땅히해야 할 가장
고결한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 행위에 대한대가로
제게 부과될 수있는
가장 무거운 판결을기꺼이 받기 위해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 일은 인도 독립에 대한 의지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단식투쟁으로 인해 영국은 간디가 감옥에서 죽었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간디를 석방, 끝까지 영국 상품 불매운동/파업/납세거부 운동을 토대로 정복자에 대해서 비폭력 저항을 했다. 그러다 1947년 8월 15일 우리 보다 딱 2년 뒤에 인도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났게 되었다. 그러나  인도는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대립, 인도 연방과 파키스탄으로 갈려져 이를 막기 위해 끝까지 노력하기 위해 또 단식을 감행하고 양 측의 중재안이 수용된고 1년뒤 힌두교 신자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그는 공부할 때부터 지혜로왔다. 영국으로 유학을 갈 정도로 똑똑했지만 그중에서도 빛이 났다. 그와 관련된 몇 개의 일화가 있다.

영국에서 대학을 다니던 시절, 자신에게 고개를 절대 숙이지 않는 식민지 출신 피터스라는 교수가 있었고 대학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 피터스 교수 옆에서 다가가 앉았고, 교수는 간디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보게, 자네 아직 잘 모르는 모양인데, 돼지와 새가 함께 앉아 식사하는 경 우란 없다네.”
이에 간디 왈  
  “그럼 제가 다른 곳으로 날아갈게요.교수는 이런 간디에게 보이콧하고 시험에서 복수하려 했으나, 간디는 심지어 만점이었다. 교수는 간디에게 질문을 한다    
“한 자루에는 돈이 가득 들어있고, 다른 자루에는 지혜가 가득 들어있다. 둘 중 하나만 차지할 수 있다면, 자넨 어떤 쪽을 택하겠는가"
 “당연히 돈자루죠"
 “나라면 지혜를 택했을 거네"
 “뭐, 각자 자신이 부족한 것을 택하는 것 아니겠어요?"
감정적으로 통제가 불가능했던 교수는 간디 시험지에 ‘멍청이(Idiot)’라 적은 후 그에게 돌려준다. 채점지를 받은 간디가 결정적으로 한방을 날린다.
   “교수님, 제 시험지에 점수는 없고, 교수님의 서명(Idiot)만 있던데요.”

네이버."간디이야기" http://blog.naver.com/greendahn/220217306469, (2014,12,27)



  그의 독립운동은 한반도의 독립운동과 관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반도에서 들려온 3.1 만세 운동 소식에 인도가 처해 있는 환경에 눈을 뜨게 되었다. 한반도에서 많은 독립 저항운동과는 많은 다른 성격을 띠었던 비폭력 저항 운동이었지만은 우리나라 현실에 영감을 주는 정신이라고 생각이다.

  우리나라는 물리적으로 독립은 하였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독립에 다다르기엔 더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도와 유사하게 식민지의 역사, 분단의 역사를 갖고 있었고 더군다나 독립과 관련하여 아직도 미해결 된 이슈들을 많이 남긴 채 대한민국 국민들 은일상을 살고 있다. 오히려 간디의 폭력이 불가능한 민주적 사회에서 비폭력 저항의식은 우리에게 필요해 보인다. 소금법 시행 이후, 간디가 소금을 직접 만들려고 한 것과 같이 우리나라의 기업들과 산업들이 더 잘되어야 하는 이유를 말해주고 있으며, 롤라트 법을 폐지시킬 수 있었던 인도 국민의 조직화된 힘에서 우리는 ‘소녀상’을 바로 세워야 하는 근본적 이유가 되는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배워야 할 때라 생각하며 독립된 국가를 살아가는 현실에서도 간디의 한마디를 간직하며 살아야겠다.





“진정한 힘이란 물리적 수단 속에 있지 않다. 꺾을 수 없는 의지 속에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 네이버."간디이야기" http://blog.naver.com/greendahn/220217306469, (2014,12,27
EBS지식채널e - 지독한 싸움꾼 간디 1,2,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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