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본 없는 테라스하우스, 그 이상의 맹그로브

창문 너머 벽만 보던 내가, 서울이라는 무대의 주인공이 되기까지

by 임서원

지인들이 초대한 모임, 낯선 이들과 인사를 나누다 내가 사는 곳의 이야기를 꺼내면 반응은 늘 한결같다. 스마트폰 속 사진을 들여다보는 그들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인다.


"와! 한국에 이런곳이 있어요?"


코리빙(Co-living)이라는 단어조차 낯설어하던 시기를 지나, 이제 세상은 이곳을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의 성지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화려한 인테리어와 라운지, 그곳에 모인 힙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늘어놓다 보면, 필연적으로 이런 질문이 날아온다.


"거기 하트시그널 같은 곳이에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일본판 원작 <테라스 하우스> 아세요? 제가 생각할때 코리빙 하우스는 테라스 하우스에 훨씬 더 가까워요. 낯선 타인들이 모여 함께 살아가며 각자의 꿈을 이야기하고 삶의 경험을 공유하는 공간, 제가 거주하는 맹그로브는 그런 곳입니다. 스스로에게 완전히 몰입할 수 있고 내가 추구하는 삶의 가능성을 무한히 발휘할 수 있는 무대"


그렇게 무대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낼 때마다, 나는 기억 속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어떤 시절을 떠올린다.


이제는 기억 속에서 희미해진.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사당, 선릉, 삼성동의 빽빽한 원룸촌을 전전하던 그 시절.


창문이 있어도 열면 바로 옆 건물 벽이 가로막던, 낮인지 밤인지조차 구별 할 수 없던 그 가짜 창문의 삶을.


맹그로브를 선택한 첫날 밤이 지나고 다음날 아침.


그건 마치, 거대한 통유리를 박살 내며 쏟아져 들어온 폭풍같은 아침이랄까.

대체 이건 뭔가 싶을 압도적인 광량.

그야말로 빛이 폭발했다.


스마트폰 알람 소리가 아니라 방안으로 쏟아진 따스한 햇살에 눈을 떳다.


그 순간 알았다.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를 수가 없었다.


왜 내가 그동안 아침에 일어나는게 그토록 힘들었는지.

왜 내가 해외여행을 가면 호텔을 그렇게 좋아하는지.


난 그동안 단 한번도 진짜 아침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명확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건 단순한 빛이 아니라 자유의 증명이었다. 내 삶의 방향이 이제는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는 명확한 변화의 신호.


맹그로브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건 경이로운 경험이다.


낯선 여행지, 최고급 호텔에서 알람 없이 눈을 떴을 때 마주하는 그 평온한 환희가 이곳에선 일상이 된다. 창밖의 빛은 단순히 방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내 존재 전체를 조명하며 호텔에 머무는 듯한 고양감을 선사한다.


아직도 기억한다. 내 영혼을 관통하듯 쏟아지던 그날의 첫 빛줄기를.


거칠 것 없이 달려와 내 침대 위로 몰아친 그 햇살은, 비로소 내 인생이라는 무대의 막을 올리는 화려한 조명이었다.


더 이상 옆 건물의 벽에 가로막혀 스마트폰 앱을 뒤적이며 내일의 날씨를 짐작하지 않아도 된다. 통유리 너머로 펼쳐진 넓은 하늘만큼이나, 내 안의 가능성도 경계 없이 뻗어 나갈 준비를 마쳤으니까.


맹그로브라는 이 거대한 무대 위에서, 나는 이제 내가 꿈꾸던 다음 장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슬리퍼를 신고 1층에 내려가 문을 나가면 바로 앞에 지하철역과 버스 정류장이 있다. 집을 나선지 1분만에 지하철을 탈 수 있고, 전통시장의 편리함과 현대적인 마트가 동시에 공존하는 편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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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뜨면 공유 주방으로 내려가 나만의 루틴을 시작한다.


싱싱한 과일들이 차가운 착즙기 안에서 기분 좋게 으깨지는 소리. 그 틈으로 배어 나오는 진한 색감의 원액. 오늘은 어떤 레시피로 어떤 주스를 만들어볼까 고민하며, 첨가물 하나 없는 100% 착즙주스를 들이키는 순간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과 함께 내 몸을 천천히 채우는 감각이 느껴진다.


갓 짜낸 주스를 텀블러에 담아 20층 라운지로 향한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거대한 통유리 벽을 투과한 아침 햇살이 온몸을 포근하게 감싸 안는다.


커피는 무제한, 반자동머신에서 갓 내린 커피의 향이 라운지를 채운다. 아무도 없는 20층 라운지의 공간, 이 압도적인 공간을 홀로 점유한 채 맞이하는 고요한 시작. 그것은 오직 나만을 위해 준비된 완벽한 세계의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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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러리에 꽂힌 누군가의 사유를 탐닉하거나, 내 방에서 신중하게 골라온 책을 들고 쏟아지는 햇살 아래 자리를 잡는다. 때로는 밀리의 서재 속 무한한 데이터의 세계를 탐구하고, 때로는 에버노트의 빈 화면 위로 파편화된 생각들을 정리한다.


하지만 가장 애정하는 순간은 묵직한 몰스킨 다이어리를 펼쳐 직접 노트에 펜으로 글을 써나가며 느껴지는 감각을 경험할 때다.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아날로그의 촉감.


그렇게 나만의 크리에이티브를 추구하는 일은 내게 습관을 넘어 삶 그 자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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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문장이라도 어떤 공기 속에서 읽느냐에 따라 심장에 남는 궤적은 완전히 다르다.


도서관의 정적인 공기, 서점의 분주한 소음, 스마트폰의 차가운 백라이트가 주는 감각. 혹은 프라이빗 비치의 파도 소리나 호텔 라운지의 우아한 조명 아래서 읽는 책들. 하지만 이곳, 맹그로브 20층 라운지에서 쏟아지는 아침 햇살을 정면으로 맞으며 니체를 읽는 순간은 단연 압도적이다.


그것은 단순히 책을 읽는 행위를 넘어, 내 안의 잠든 전사의 마음을 깨우고 영감의 에너지를 폭발시키는 일종의 의식, 리추얼이다.


상황은 모두 각각의 바이브를 갖고 있고, 매 순간 느낌이 다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르듯, 내가 통과해온 삶의 궤적에 따라 문장이 주는 울림의 총량도 달라진다. 텍스트 사이에서 파생된 영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드넓은 창밖 세상으로 뻗어 나갈 때, 나는 비로소 책과 내가 가장 깊게 연결되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한 줄의 문장이 내 안의 감각을 깨워 저자의 메시지를 넘어 세상과 공명하게 할 때, 나는 내가 비로소 뜨겁게 살아있음을 실감한다. 이곳에서의 아침은 나의 가능성을 최고도로 끌어올리고, 나를 둘러싼 모든 세계를 최상의 컨디션으로 움직이게 한다.


그렇게 나는, 매일 아침 나라는 존재의 가장 빛나는 버전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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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을 하기 위해 굳이 밖으로 나설 필요는 없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면 나만을 위해 준비된 헬스장이 있다.


피트니스 룸에서 나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며 땀 흘리는 시간, 역설적으로 가장 생생하게 타인과 연결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우연히 마주친 L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어린 동생이었지만 정말 좋은 마인드를 갖고 있는 친구였다. 짧은 인사가 심도 있는 대화로 번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비슷한 이름, 같은 고향이라는 사소한 접점은 금세 삶의 가치관과 미래의 방향성이라는 거대한 공통분모로 이어졌다.


비즈니스와 라이프스타일, 패션과 여행, 그리고 각자가 그리는 꿈의 지도까지.


L은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며 학회장으로서 학회활동을 정말 열심히 하는 친구였는데, 나 또한 학창시절 맨땅에서부터 독서모임을 만들고 정점에 올리기 까지 많은 일들을 경험했기에 정말 서로 통하는 이야기가 많았다.


난 L에게서 패션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들으며 트렌디함에 꽤 많이 놀랐고, 스마트한 당근 사용법과 일상의 기술들을 한 수 배웠다. 무엇보다도 함께 있으면 늘 즐거웠다.


피트니스 룸은 때때로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마주하는 거대한 살롱이 된다. 프랑스에서 온 유학생부터 서울의 스타트업을 누비는 외국인 친구, 닭한마리를 맛보기 위해 일본에서 건너온 여행자까지.


우리는 서울이라는 무대를 공유하는 동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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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러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0층 라운지 특성상 책을 읽는 사람은 거의 없고 대부분 노트북을 들고 개인 작업을 하거나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일본인 친구, 유럽친구 등 자신만의 세계를 살아가는 좋은 친구들을 매번 만날 수 있었다.


덴마크에서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방문한 A는 우연히 만나 꽤 긴 시간 함께 대화했고, 그 친구가 어떻게 한국을 여행하고 어떻게 외국인으로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저 우연히 새벽에 눈이 피곤해서 잠시 먼 하늘을 보러 올라간 라운지에서 이 친구를 만났다.


본인이 연구하는 주요 과제와 관심있어 하는 주제들을 자연스럽게 공유했고, 자신이 직접 개발해서 운영하고 있는 블로그와 프로토타입 서비스, 그외 자신의 사이드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을만한 것들을 만난지 1시간도 되지 않은 나에게 보여주었다.


나 또한 내가 운영하는 블로그와 과거 운영했던 개인 프로젝트에 대해서, 그동안 시도했던 여러가지 다양한 실험적인 시도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최근 관심을 갖고 있는 AI 기반 생성형 콘텐츠로 어디까지 작업을 해봤고 어느정도 수준까지 만족하는 결과물을 얻었으며 어떠한 부분에서 아쉬움이 있었는지.


둘 다 생산성이라는 측면에서 이를 끌어올리기 위해 안해본게 없을 정도로 통하는 부분이 많았고 대화가 정말 즐거웠다.


나와 친한 일본인 S도 마침 라운지에 올라왔다가 내가 대화에 참여시키면서 덴마크인과 일본인과 한국인이 난데없이 새벽에 뭉쳤다.


잠들지 않는 열정들이 마주친 밤. 국적도 언어도 방향도 달랐지만, 무언가를 새로이 만들어내고 삶을 주도하려는 에너지만큼은 결이 같았다. 그날 밤 새벽의 라운지는 서로 다른 우주가 만나 스파크를 일으키는 거대한 변화의 공간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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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잘 맞는 친구들과는 가끔씩 산책과 등산, 식사를 함께 한다.


우연히 엘레베이터에서 알게된 유럽에서 온 E와 친해져서 함께 자주 시간을 보냈다. 맹그로브 근처의 작은 길을 산책하기도 하고, 청량리 시장, 청계천을 지나 낙산공원까지 발걸음을 옮겼다.


E와 나란히 걸으며 마주한 서울의 풍경은 맹그로브 20층 라운지에서 보던 것과는 또 다른 특별함이 있었다.


성곽길을 오르는 일은 예상보다 훨씬 힘들었다. 하지만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성벽 너머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서울의 풍경에 E는 연신 감탄을 터뜨렸다.


중간중간 거친 숨을 고르며 휴식하며 뒤를 돌아보며 서울의 풍경을 구경했고, 산책로 중간에서 마주친 외국인 등산객들과도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눴다.


내게는 익숙한 이 성곽이 E의 낯선 시선을 통과하는 순간, 마치 처음 보는 풍경처럼 입체적인 미학을 드러낸다. 타인의 감각을 빌려 내가 살던 세상을 다시 본다는 것. 그것은 작가의 관점에서 텍스트 너머의 세상을 넘나드는 감각과도 닮아 있었다. 누구와 함께 걷느냐에 따라 공기의 온도와 풍경의 해상도가 달라질 수 있음을, 나는 E와 나란히 걸으며 비로소 온전히 이해했다.


성곽 끝자락 카페의 아담한 분위기 속에 앉아 우리는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우리는 서울의 풍경을 함께 마시며, 각자의 세계가 겹쳐지는 가장 낭만적인 서울의 뷰를 함께 공유했다. 대화는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시간의 흐름은 의미를 잃었다.


나는 비로소 내 안의 가능성이 다시 한번 최고조로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세상 모든 박동이 나를 향해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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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한 지인들을 초대해 정성껏 대접하고 라운지의 시간을 나누는 일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다. 특히 삶의 고비마다 묵묵히 손을 내밀어 주었던 형들을 이곳 맹그로브로 초대했다.


직접 고기를 굽고 부족하지만 애써 만들어본 요리를 내놓으며, 지금 생각해보면 뭔가 하나같이 다 엉망이었지만 형들은 이 상황 자체를 대단히 즐거워했다. 미팅룸에서 이어진 깊은 대화는 20층 라운지의 찬란한 야경으로 이어졌다. 준비해온 와인과 맥주가 곁들여진 그 밤, 내 인생의 한 페이지가 비로소 가장 선명한 색채로 완성되고 있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던 시절, 세상의 이치조차 서툴렀던 나를 그저 나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껴주었던 분들. 밑바닥에서 헤메던 나를 언제나 대가 없는 호의로 지지해주었고, 때로는 오만함에 빠지지 않도록 따끔한 경계가 되어주었으며, 너무 힘들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형들 덕분에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내가 갇혀 있던 좁은 세계를 부수고 더 넓은 지평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이끌어주신 형들.


그분들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다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나를 벅차게 만들었다.

내 인생에, 나에게 내 온 마음을 다해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분들이 있다는게 감사했다.


여의도의 화려한 호캉스도, 대자연 속의 캠핑도 아니었지만 그 밤의 맹그로브에서 함께한 낭만은 그 어떤 것보다 압도적이었다. 텅 빈 가슴을 채웠던 것은 화려한 야경이 아니라, 밑바닥에서부터 나를 지지해준 이들에게 비로소 내보일 수 있게 된 나의 오늘이었다.




혼자만의 사유로 단단해지고, 낯선 이의 시선으로 확장되며, 소중한 이들의 지지로 완성된다.


가장 나다운 방식으로. 세상의 주인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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