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그로브 공유주방, 내가 기꺼이 수고로움을 선택한 이유

코리빙에 사는 배달앱 VIP가 투박한 진심으로 되살린 인간의 품격

by 임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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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러리가 20층이 아니라 지하2층에 머물던 초창기 시절, 우연히 서가에 비치되어 있던『혼자 사는 사람들을 위한 주거 실험』이라는 책을 읽었던 적이 있다.


홍익대학교 조성익 교수님이 쓴 책인데 당시만 하더라도 새로운 개념이었던 코리빙, 그중에서도 공유주방에 대한 연구내용이 매우 인상적이었고 당시 파일럿 프로젝트였던 맹그로브 숭인에서의 개인적인 경험과 관찰을 담고 있어서 참 재미있게 읽었다. 왜냐하면 맹그로브의 공유공간을 경험할때마다 항상 이 공간을 어떻게 쓰라는 누군가의 의도가 다분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스치며 서로에게 파동을 일으킨다는 이상향의 완벽한 시뮬레이션. 의도된 거실과 옥상 등의 공간 기획, 공용 냉장고를 통해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경계를 허물었던 특별한 주방과 냉장고 실험. 결국 좋은 주거 공간이란 단순히 잘 지어진 건물을 넘어, 그 안에서 사람들이 교류하며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받는 삶의 무대임을 강조하는 결론까지.


그때의 나는 그 이상적인 우아한 설계가 현실에 어떻게 질식당할지 알지 못한 채, 그 정교한 도면 위에서 장밋빛 미래를 꿈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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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그로브 신설점 공유주방의 공간은 목적에 따라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다. 따뜻한 질감의 우드 파티션을 경계로, 감각적인 블루 톤의 원형 테이블이 놓인 다이닝 존과 스테인리스 후드가 묵직하게 내려앉은 조리 존이 완벽한 대비를 이룬다.


갓 지은 밥의 온기를 책임질 쿠쿠 밥솥부터, 바삭한 식감을 살려낼 필립스 에어프라이어, 전자레인지와 착즙기, 정수기까지. 4층에는 오븐도 1대 있고, 벽면을 가득 채운 쇼케이스 냉장고안에는 입주민 각자의 식료품을 담고 있는 투명 바스켓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도열해 있다.


이곳은 내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결과물을 도출해 낼 수 있는 완벽한 조리 스튜디오다. 냉장고에 보관해 둔 질 좋은 식재료를 꺼내 도마 위에 펼쳐놓는 순간, 나는 단순한 거주자를 넘어 내 일상을 기획하는 리추얼의 실행자가 된다.


하지만 설계자가 닦아놓은 이 완벽한 무대 위에서, 정작 배우들은 대본을 잃어버린 채 서로를 지워가며 서성이고 있었다.




아쉽게도 이 좋은 공간의 가능성을 100% 끌어올리는 입주민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맹그로브의 철학은 파일럿 프로젝트인 숭인시절부터 끝없이 시뮬레이션을 거치며 완벽한 교류의 무대를 기획했지만 현실의 사람들은 그 거창한 의도를 감당할 삶의 밀도를 갖추지 못했다.


공유주방의 훌륭한 인프라는 그저 간편식을 데우는 대기열로 전락해 버렸다. 대부분의 입주민들은 전자레인지를 주로 사용하며, 이 공간에서 다른 누군가를 마주쳐도 그저 유령처럼 대할뿐 아무런 상호작용도 일어나지 않는다.


자연스러운 마주침이나 긍정적인 교류 따위는 누군가의 이상속에 잠든 허상에 불과했다. 좁은 동선이 겹쳐도 가벼운 목례조차 생략되며, 우연히 시선이 부딪혀도 기계적으로 고개를 돌린다. 타인의 존재 자체를 필사적으로 소거하는 이 기형적인 침묵은 단순한 개인주의나 낯가림이 아니다. 그것은 같은 공간의 인프라를 공유하면서도 곁에 선 사람을 철저히 지워버리는, 지독할 정도의 건조한 존재의 말살이다.


전자레인지가 돌아가는 3분 남짓한 시간 동안 각자의 스마트폰만 내려다보는 이 서늘한 풍경 속에서, 공간의 위대한 의도는 완벽하게 질식당했다.


하지만 이 기형적인 단절을 오직 입주민들의 나태함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맹그로브의 잘못도 아니다. 이 무기력한 풍경의 진짜 배후에는, 맹그로브의 거창한 철학 따위는 가볍게 짓밟아버리는 대한민국의 초고속 소비 생태계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배민과 쿠팡이츠, 요기요가 구축해 낸 정교한 배달 물류망, 터치 몇 번이면 다음 날 새벽 문 앞까지 식재료를 꽂아 넣는 로켓프레시의 속도.


이 폭력적일 만큼 완벽한 편의성은 굳이 타인과 부대끼며 도마 앞에 설 최소한의 동력마저 거세해 버렸다. 지독한 피로를 안고 돌아온 현대인들에게는, 약간의 마찰력이라도 발생하는 주방에서의 교류보다 돈으로 시간을 사고 안전한 자기만의 방으로 도망쳐 1분이라도 더 쉬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고 생존에 유리한 선택일 뿐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무언가를 빡세게 요리해 보겠다는 낭만만 접어두면, 맹그로브의 공유주방은 그 자체로 꽤 훌륭한 소비적 라이프스타일의 정거장이 된다. 먹고 남은 피자를 다시 데워먹기에도 좋고, 쿠팡에서 대량으로 구매한 레토르트 식품을 냄비에 붓고 끓여서 햇반과 같이 먹어 치우기에도 완벽한 인프라였다.


나라고 배달 음식을 혐오하는 고상한 수도승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BBQ 황금올리브의 폭발적인 기름 맛, 교촌 레드의 혀를 찌르는 자극, 도미노피자와 버거킹이 선사하는 그 직관적이고 자본주의적인 타격감에 누구보다 환장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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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는 수비드로 정교하게 조리한 닭가슴살 샐러드와 밀크티만 고집할 정도로 내 입에 들어가는 모든 것에 진심이었지만, 늦은 밤 피로에 찌들어 맹그로브로 돌아온 나는 철저히 배달앱의 VIP고객으로 살았다.


치킨, 피자, 햄버거 외에도 라면, 컵라면, 냉동식품을 정말 사랑했고 어느덧 내 방 한구석에는 라면이 박스째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서울의 모든 힙한 배달 브랜드를 섭렵하며, 어떤 브랜드의 어떤 메뉴가 내 욕망을 가장 완벽하게 채워주는지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내 방의 안전한 고립 속에서 넷플릭스를 틀어놓고 혼자만의 소비를 즐겼다. 하지만 곧 좁은 방 안에서 음식 냄새를 남기고, 포장 용기가 쌓여가는 비효율을 굳이 견딜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철저히 휴식과 식사의 공간을 밖으로 분리해 냈다. 공유주방의 넓은 테이블을 나의 다이닝룸처럼 점유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기한 것은 공간이 바뀌자 내 소비의 방식도 진화했다.


배달을 기다리는 40분의 시간조차 비효율로 느껴질 무렵, 내 시선은 맹그로브 신설점 근처에 있는 이마트와 홈플러스로 향했다. 그곳의 델리 코너는 훌륭한 대안이자 만족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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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조리하는 수고로움 없이도, 집어 드는 것만으로 배달 음식보다 훨씬 다양한 선택지와 수준 높은 퀄리티를 즉각적으로 얻어낼 수 있었다. 맛있게 먹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음식물 쓰레기를 매번 밖에 들고가서 버릴 필요도 없고. 주방은 매일매일 관리해주시는 분이 깨끗하게 청소해주신다. 나에게 있어 맹그로브의 공유주방은 다양한 가능성을 품은 생산적인 공간이기에 앞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은 게으름을 부리기에 완벽한 시스템이었다.


덕분에, 나는 일말의 번거로움 없이 가장 효율적으로 코리빙의 혜택을 듬뿍 빨아들일 수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공유주방은 나에게 요리를 위한 곳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자극적인 음식을 가장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완벽한 소비지향적 인프라일뿐이었다.




일상의 관성을 끊어낸 건, 어느날 배달앱에서 주문한 탕수육 한 그릇 때문이었다.


"대체 이게 뭐지?"


포장 용기를 뜯는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지불한 비용을 의심케 하는 참담한 양과 질. 단순히 돈이 아까운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완벽한 기만이었다.


내게 탕수육은 단순한 배달 음식이 아니다. 맞벌이 부모님을 기다리며 동생과 함께 비워내던, 단돈 만원짜리 푸짐했던 위로의 기억이다. 세월이 흘러 인플레이션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쯤은 안다. 치킨 2만 원 시대도, 만 원이 넘는 햄버거도 그만한 퀄리티가 뒷받침된다면 기꺼이 지불해 왔다. 하지만 이 초라한 결과물은 내 추억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타협할 수 없는 선을 넘은 것이다.


나는 배달 용기를 밀어두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


답답한 마음에 분노를 토하며 밖에 나가 질 좋은 돼지고기 등심 한 근과 감자 전분을 사 들고 맹그로브의 공유주방으로 향했다. 조리 존의 조명을 켰다. 도마를 세팅하고, 묵직한 칼을 쥐었다. 분노한 칼날이 등심을 썰어내는 첫 도마질. 그 단호한 소음과 함께, 자본의 편의성에 길들여졌던 내 일상의 궤도가 완전히 뒤틀려버렸다.


나는 더 이상 피로에 찌든 무기력한 소비자가 아니었다.


핏물을 완벽하게 제거한 등심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정한 두께로 썰어낸다. 튀김의 본질은 결국 수분과의 전쟁이다. 전분과 물을 섞어 가라앉힌 뒤, 최적의 비율을 고기에 입힌다. 완벽한 겉바속촉을 구현하기 위한 타협 없는 계산이다.


물론 머릿속의 이론과 실전의 간극은 명확했다. 성난 기름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며 손등을 날카롭게 때렸다. 불 조절에 실패해 아까운 등심 몇 조각을 태워 먹기도 했다. 결제 버튼 하나로 완성되던 편의성에 비하면 미련할 정도로 소모적인 노동이었다.


하지만 나는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끓어오르는 기름이 고기를 집어삼키며 맹렬하게 기포를 뿜어낸다. 튀김옷이 기름과 충돌하며 수분을 날려 보내는 이 원초적인 소음. 그것은 내 삶이 다른 방향으로 접어들었음을 증명하는 가장 직관적이고 압도적인 타격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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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수육이 쏘아 올린 분노는 내 일상의 생태계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방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라면 박스와 냉장고 안의 만두와 냉동식품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대파와 붉은 토마토, 푸른 상추가 들어섰다. 포장지를 뜯는 대신, 나는 직접 썰고 굽고 튀기는 쪽을 택했다. 식탁에는 토마토와 감, 딸기 같은 제철 과일이 끊이지 않았고, 요리를 위해 대파와 버섯, 나물을 손질하는 것이 당연한 일상이 되었다.


두툼한 스테이크의 마이야르 반응을 직접 이끌어내고, 비 오는 날이면 감자를 강판에 갈아 전을 부쳤다. 배달 앱의 스크롤을 내리는 대신 시장에 가서 사온 날것의 식재료를 직접 다듬는 시간. 밤이 되면 야식을 찾던 습관도 사라졌다. 저녁식사로 고구마를 찌거나, 갓 구운 또띠아에 신선한 샐러드를 곁들이며 하루의 끝을 가볍게, 그러나 밀도 있게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만의 리추얼을 구축하며 주방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자, 그제야 공유주방을 스쳐 지나가는 다른 입주민들의 라이프스타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전자레인지에 냉동식품을 밀어 넣고 도망치듯 방으로 돌아갔지만, 아주 소수의 사람들은 직접 재료를 썰고 요리를 하면서 자신만의 시간을 구축하고 있었다. 흥미롭게도 그 소수는 대부분 낯선 타국에서 온 외국인들이었다.


나의 내면을 향하던 공유주방에서의 이 시간이, 낯선 도시에서 소소한 삶의 방식을 지켜가는 그 이방인들을 향해 방향을 틀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들 중 누군가와는 운명처럼, 때론 우연처럼 주방에서 식재료와 음식을 함께 나누며 자연스럽게 일상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다. 한국의 전통시장을 궁금해하던 그들과 함께 태어나 처음으로 청량리 시장에 방문해 그 비좁은 골목을 누비며 싱싱한 과일과 채소를 양손 무겁게 들고 오는 날도 있었다.


24시간이라는 똑같은 자원이 주어졌음에도, 기꺼이 발품을 팔아 낯선 도시의 식재료를 탐구하고 밥을 짓는 그 여유로운 태도는 내게 꽤 신선한 자극이었다.


물론 모든 외국인들이 주방의 문법에 능숙하지는 않았다. 어떤 날은 누군가의 위험한 저녁 식사 준비를 목격하고 기겁한 적도 있다.


편의점이나 배달 앱에서 대충 구한 듯한 정체불명의 음식을, 태연하게 전자레인지에 밀어 넣는 뒷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문제는 그 음식이 담긴 용기였다.


"Stop."


나는 반사적으로 전자레인지의 작동을 취소시켜버렸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


기겁하며 전자레인지 문을 열고 그 용기를 꺼냈다. 열을 가해선 안 되는 일반 플라스틱 용기. 그래. 이제 막 독립해서 뭐가 뭔지 잘 모르는 상황에서는 충분히 벌어질 만한 일이다. 나 또한 내열 용기와 일반 플라스틱의 차이에 대해 잘 모르던 시절이 있었고 편의점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며 무기력하게 밤을 보내던 때가 있었으니까.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다. 굳이 내 시간을 들여 타인의 라이프스타일에 개입할 의무는 없으니까. 하지만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무엇이 문제인지 정말 모르는 듯한 그 얼굴을 보고도, 모른 척 지나칠 만큼 무감각해지기는 어려웠다.


나는 전자레인지의 복잡한 작동 원리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대신, 내가 이용하는 내열 유리 용기를 꺼내 그 앞에 내려놓았다. 전자레인지를 이용할때는 반드시 내열용기를 이용해야 하며, 내 그릇과 달리 이 플라스틱 용기에는 전자레인지를 상징하는 세줄기 물결표시가 없다는 사실을 건조하게 짚어주었다.


쿠팡에서 주문하면 편하다는 이야기와 함께, 정 선택이 어렵다면 고민하지 말고 락앤락을 사라는 추천을 던졌다.


그 외에도 기억나는 일은 많았다. 대부분의 입주민들은 주방에서 요리하는 과정 자체에 익숙하지 않았다. 식재료를 어디서 사야 하는지부터 칼질하는 방법, 심지어 조리 시 후드를 열어 환풍기를 돌려야 한다는 기본적인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다들 코리빙에서 그림처럼 멋진 라이프스타일을 즐길 것이라 환상을 품지만, 정작 이 완벽한 조리 스튜디오에서 자기 입에 들어갈 한 끼를 스스로 이끌어내는 사람은 대체로 드물었다. 전자레인지 앞에서 생존의 기본기조차 없이 서성이는 그들의 뒷모습은 실수 투성이였던 내 젊은 날의 기억을 돌아보는것만 같았다.


힙한 라이프스타일이라는 화려한 포장지를 벗겨낸 자리에는, 스스로 끼니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날것의 무기력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그것이 내가 공유주방에서 매일같이 마주한 가장 직관적인 현실이었다.




맹그로브를 스쳐 가는 이방인들의 동선은 지루할 만큼 뻔했다. 명동의 길거리 음식, 성수동의 팝업스토어, 혹은 광장시장과 동대문. 그들은 가이드북 대신 등장한 인스타그램과 유튜브에서 정해준 얄팍한 관광지의 경험을 한국의 전부라 믿으며 부지런히 소비하고 있었다.


굳이 그 삶에 개입해서 진짜 한국인들의 삶을 설파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들이 알고 있는 그 관광지의 경험이 한국의 전부로 남는 것은 조금 아쉬웠다. 아마 나는 그게 한국이라는 나라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마음이었던것 같다.


국적이 한국이라고 해서 상황이 나은 것도 아니었다. 밖에서 무슨 번듯한 명함을 달고 살든, 이 코리빙이라는 생태계 안에서 그들은 왕초보나 다름없었다. 아련한 마음이 들 정도로.


나는 냉장고를 열고, 나를 위해 세팅해 두었던 식재료들을 꺼냈다. 그리고 팔자에도 없는 쉐프 역할을 자처하며 도마 앞에 섰다. 메뉴가 대단했던 것은 아니다. 김치를 넣어 부친 김치전, 오징어를 썰어 넣은 해물파전, 강판에 거칠게 갈아낸 감자전 정도였다.


하루는 광장시장에서 줄을 서서 먹은 빈대떡 이야기를 하는 새롭게 알게된 외국인 친구와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한국인 동생을 불러 서로를 소개시켜 주고 테이블 앞으로 갓 구워낸 따뜻한 감자전 한 접시를 무심하게 밀어 넣었다.


"이건 어디서 배달시킨 거예요?"


"아니. 방금 저기서 감자 갈아서 구웠어요. 식기 전에 먹어요."


반신반의하며 포크로 전의 끝부분을 잘라 입에 넣던 얼굴이 이내 커다랗게 변한다. 바삭한 테두리가 부서지는 경쾌한 소리가 주방의 공기를 가르자,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쳐다보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직접 이걸 갈고 부쳤다구요?


방금 전까지 흥분해서 떠들던 광장시장의 무용담은 그 순간 조용히 잦아들었다.


누군가가 오직 자신들을 위해 정성껏 식재료를 손질하고 기름 앞에서의 수고로움을 감수하며 갓 구워낸 한 접시. 그 압도적인 환대의 경험은 그들에게 그 무엇보다도 특별한 순간이었다.


단순히 맛있는 음식을 먹었기 때문이 아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기성품의 맛이 아니라, 철저한 이방인에 불과했던 자신들을 이 낯선 도시의 진짜 일상으로 깊숙이 끌어당겨 준 최초의 온도였기 때문이다.




나는 왜 이들에게 기꺼이 호의를 베푸는 것일까?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의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나는 타인의 삶에 함부로 개입할 만큼 착한 사람도, 오지랖이 넓은 사람도, 조건 없는 인류애가 넘치는 성인군자도 아니다. 누구보다도 소비지향적인 라이프스타일로 살았던 내가 아닌가.


단순히 요리에 익숙해진 나의 여유를 보여주고 싶었던 과시욕이었을까?

아니면 낯선 타국에서 헤매는 이방인들과 뉴비들에 대한 고인물의 동정심인가?


그것도 아니었다. 바삭하게 구워진 감자전 한 조각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하던 그들의 얼굴. 자신들을 위해 기꺼이 수고로움을 감수했다는 사실에 무장해제되던 그 놀라움의 표정을 마주한 순간, 나는 비로소 내가 왜 도마 앞에 섰는지 깨달았다.


잊고 있던 과거의 기억이 서늘하게 떠올랐다.


지난 5년간, 나는 매년 100일 이상을 해외의 낯선 도시를 누볐다. 그 숨 막히는 일정 속에서 내게 허락된 보상은 늘 하이엔드였다. 도시의 화려한 스카이라인이 발밑으로 깔리는 초고층 루프탑 레스토랑과 자본주의의 정점을 보여주는 5성급 체인 호텔의 매끄러운 서비스. 무제한 칵테일의 클럽라운지. 멤버쉽 티어에 따라 달라지는 대우와 혜택. 국경너머 럭셔리의 세계를 나는 기꺼이 누렸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내 기억의 심연에 가장 선명하고 지독하게 남아있는 궤적은, 호텔에서 보냈던 올인클루시브적인 경험이 아니었다.


기꺼이 자신의 사적인 공간으로 나를 초대해 주었던 현지 친구들의 집. 그 나라의 낯선 식재료를 썰고 볶아내며, 오직 나라는 이방인 한 명을 위해 자신들의 시간과 정성을 기꺼이 불태웠던 그 식탁이었다. 미슐랭 셰프의 정교한 플레이팅보다, 현지에서 사귄 새로운 친구가 직접 날 위해 건네주던 그 투박한 접시가 내 삶을 훨씬 더 깊고 강렬하게 타격했다.


돈으로 산 완벽한 서비스는 기억에서 쉽게 사라졌다.

그러나, 대가 없이 내어준 누군가의 호의는 영혼에 문신처럼 새겨지는 법이다.


인간의 품격은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다. 시간이라는 가장 비싼 재화를 쪼개어 타인을 위해 기꺼이 베풀 수 있는가. 자신이 직접 그 진정성 넘치는 환대를 뼈저리게 받아보고 구원받아 본 적 없는 자는 결코 타인에게 베풀 수 없는 영역이다.


탕수육 한 그릇에 분노하여 다시 쥐게 된 주방의 칼자루. 그러나 그것은 결국, 이 거대한 코리빙이라는 실험실 안에서 내가 직접 목격하고 빚졌던 온기들에 대해, 내가 지불할 수 있는 가장 정중한 보답이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라면 물이나 끓이고 스쳐 지나가는 공유 주방의 인덕션 앞이, 나에게는 국경과 언어를 넘어 누군가의 삶에 가장 우아하고도 날카롭게 개입하는 나만의 무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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