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환자가 보고 읽은 것들
영화 '스펜서'는 현 영국의 국왕인 찰스 3세의 전 부인이자,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웨일스 공비 다이에나 스펜서의 별거 전 막바지 3일간을 다룬 영화이다. 영국 왕실을 다루는 넷플릭스 드라마 '더 크라운'에서 다이애나비가 찰스 왕세자 및 영국 왕실과 겪는 외적인 갈등을 주로 묘사했다면 영화 '스펜서'는 비와 왕세자의 갈등이 절정에 치달아 있을 무렵 겪었던 다이애나의 내적인 갈등과 고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영화의 배경은 1991년, 왕실의 일원들이 별장에 모여 함께 보내는 크리스마스 연휴이다.
영국의 왕세자인 찰스와 결혼했던 다이애나비는 겉으로는 동화 속 왕자님을 만나서 결혼한 20세기의 신데렐라로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모두가 알고 있듯이 그녀의 결혼 생활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남편인 찰스는 결혼 전 연인이었던 카밀라 파커 보울스와의 관계를 지속해 나갔고, 영국 왕실은 왕세자를 제지하지 않고 오히려 다이애나에게 문제없는 결혼생활을 연기하도록 압박했다. 거짓된 결혼 생활에 지친 다이애나는 결국 우울증을 비롯한 다양한 정신적인 문제를 겪게 된다.
영화의 러닝타임 내내 다이애나는 극도로 불안정한 정신상태를 보인다. 특히 두드러지는 증상은 그녀의 편집증적인 의심의 시선이다. 왕실의 일원들 뿐만이 아니라 그녀에게 용무를 가지고 접근해 오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녀는 그들이 모두 자신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의심하는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모든 순간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이 자신을 감시하고 (비록 그것이 일부분 사실이었을지라도) 적대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그녀의 마음은 차츰 부서지고 망가져 갔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때론 가족이나 친구 혹은 때론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갈등을 겪을지언정 자신이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을 적대하는 환경에 놓여 있지는 않을 것이다.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혀서 통제감을 상실한 그녀는, 감옥의 열쇠가 자신의 손안에 놓여 있더라도 스스로는 결코 빠져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영화에서 (그리고 현실에서도) 다이애나는 중증의 우울증도 함께 앓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처해 있는 상황이나 시대적 배경 상 그녀의 우울한 내면을 지금과 같이 드러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우울증은 신체적인 양상, 폭식증과 제거행동(구토)으로 나타난다. 식사 시간에는 자신이 싫어하는 음식을 일부러 내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으로 인해 거의 식사를 하지 않다가, 밤에 몰래 주방으로 내려가 통제력을 상실하고 케이크를 자신의 입에 털어 넣고는 구토를 하기 위해 화장실로 향한다. 다이에나는 이렇게 심각한 증상들을 겪고 있었지만, 그것이 다이애나의 의심대로 감시였던 혹은 아니면 순수한 관찰이었든 간에, 항상 주변의 시선에 둘러싸인 그녀의 증상을 주변 사람들이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현대적인 관점에서의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했고 자세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수 차례의 자살 시도를 했다고 전해진다.
얼핏 보기에 다이애나가 겪었던 일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현실과는 차이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그녀는 셀럽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지켜보았으며, 극적인 결혼생활과 이혼을 겪었고, 비극적인 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약간은 다른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우울증에 걸리면 나타나는 증상 중 하나는 자신과 주변 환경을 조절할 수 있다는 통제감의 상실이다. 만약 직장 생활이 우울증의 원인이었다면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보면 그 직장을 그만두면 어느 정도 해결이 될 일이다. 하지만 우울증 환자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우울증에 걸려 직장 생활에 지장이 생긴 것도 모자라 직장을 그만두게 되면 나는 완전히 실패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닐까. 하지만 통제감의 상실과 실질적인 통제력의 상실은 다르다. 다이애나가 결국 찰스와 이혼을 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를 괴롭게 만드는 직장과, 사람과, 때로는 가족과의 인연조차도 끊을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특히나 우울증으로 통제감을 상실한 사람에게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환자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주변인, 혹은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