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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꾸신발 Jun 02. 2023

감정의 저울

비정신과 의사의 우울증 투병기

 주말에 와이프와 아이를 차에 태우고 자주 나들이를 간다. 서로 다른 날 나들이를 가려고 운전을 하면서 완전히 상반된 두 가지 생각이 든 적이 있었다.


- 생각 1 : 나를 믿고 의지하는 가족들이 있어 행복하고, 또 주말에 내 힘으로 산 자동차를 타고 돈 걱정 없이 자주 나들이를 갈 수 있어서 좋다.

- 생각 2 : 오늘도 그저 하루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또 외출을 하는구나. 나는 쉬거나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또 몸을 움직여야 한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똑같은 상황에서 정 반대의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 나 스스로도 신기할 정도이다. 이 글의 제목은 감정의 저울이라고 했지만, 상황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태도에 관한 글이라고 하는 것이 조금은 더 정확한 표현이기도 하다.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오히려 이를 주관적으로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지가 마음의 상태에 기여하는 영향이 더 클 때도 있을 것이다.


 대학교를 다닐 때 여러 명이 공동으로 사는 빌라에서 하숙을 하다가 자취방으로 이사를 한 적이 있었다. 비록 방 하나에 방보다 작은 거실이 딸린 집이었지만 처음으로 생긴 내 공간에 들어가 행복했던 생각이 난다. 겨울에  화장실에 물을 틀어놓지 않으면 얼어버리고 또 여름에는 에어컨도 없이 폭염을 견뎌야 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가에 자리 잡고  있어서 밤에도 방이 조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집에 들어와 문을 잠그는 순간 그 안은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는 나만의 공간이었다. 지금은 그때의 자취방보다 넓고 조용하고 쾌적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지만 늘어난 공간만큼 행복해진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신혼 여행지에서 싸우고 올 수도 있고 누군가는 편의점 앞 벤치에서 캔맥주를 마시면서 행복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캐캐묵은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그것이 만인들이 아는 지혜임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먹는 일이 너무나 어럽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은 남이 아니라 내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특히 우울증에 걸리면 요동치는 나의 마음 상태에 따라서 상황을 인식하는 방향이 크게 바뀐다. 글의 서두에 적은  이야기처럼 며칠 사이에 똑같은 상황을 두고 전혀 다른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우울증에 걸리면 기본적으로 세상만물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 부정의 필터가 씌워진다. 일을 쉬고 있으면 마치 내가 세상살이에 실패한 것 같다. 일을 하고 있으면 나는 왜 이 일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하고 있나, 언제까지 일을 하며 살아야 하나 생각이 든다. 남들은 다 행복하고 잘 사는데 나만 불행한 것 같다. 나에게 좋은 일이란 없고 모조리 나쁜 일들만 일어나는 것 같다.


 때로는 내 마음속에 생각의 저울이라는 게 있다는 상상을 한다. 저울의 양 끝은 각각 부정과 긍정, 혹은 불행과 행복이라는 감정이다. 어떤 상황이 닥치면 내 마음의 해석에 따라 저울의 끝에 하나씩 추를 올려놓는다. 새로운 직장에 취직을 했다면? 하는 일은 마음에 들고 같이 일하는 동료들은 좋은 것 같다. 하지만 출퇴근 시간이 길고 직장상사는 어쩐지 나랑 맞이 않을 것만 같다. 하나씩 추를 올리다 보면 한쪽으로 감정이 기울어지게 된다. 그래 이 정도면 뭐 괜찮은 곳인 것 같아, 아니면 에이 괜히 직장 옮겼다. 이런 식으로 상황마다 마음의 저울은 마음의 상태를 정해 준다. 그런데 우울증에 걸리게 되면 부정이라는 저울의 접시가 이미 무거워져 있어서 아무리 긍정의 감정추를 올려놓는다고 해도 저울이 행복으로 넘어오지 않는다. 아무리 의식적으로 노력을 한다고 하더라도 저울은 한쪽으로만 기울어진다. 심지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순간에서도.


 우울증에서는 노력으로 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래도 이런 비유를 떠올리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바로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는 나 자신을 비난하지 않는 일이다. 내 마음속의 저울이 망가져서 나를 속이고 있기 때문에 지금 내가 이러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면 조금 더 나를 객관적으로 평가해 볼 수 있다. 지금 나의 감정과 고통이 뇌가 만들어낸 거짓이라고 생각하면 아주 약간이나마 마음이 편해지고 또 언젠가는 망가진 저울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작은 희망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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