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이방인.
이 글에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 엄마가 돌아가셨다. 아니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가장 아름다운 첫 문장들'이라는 영상에서 이 문장을 처음 보았다. 보통은 엄마가 돌아가신 날짜를 헷갈리지는 않는다. 그날이 오늘, 혹은 어제였다면 더더욱 잊어버릴 수 없는 사건이기 마련이다. 그 화자가 어머니와 어떤 관계였는지와 별개로 우리에게 있어 어머니라는 존재와 그의 죽음은 적당히 기억 한편에 던져두었다가 뒤적이며 끄집어낼 만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이 문장은 기이하다. 기이하게 느껴진다. 저런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사람을 마주하게 된다면 여태까지의 사회적 경험이 나로 하여금 그와 거리를 두도록 강한 충동을 일으킬 것이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이 기이함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책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뫼르소'가 그 기이함의 근원이다. 뫼르소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건조하고 종종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감상을 주기까지 하는 담백한 서술로 이루어져 있다. 요양원에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여하기 위해 먼 길을 이동한 뫼르소가 여정에서 느끼는 감정은 피로와 지루함이다. '참석해야 하기 때문에 찾아간 장례식'에서 '굳이 봐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어머니의 시신을 보지 않은 채 관 뚜껑을 닫는다. 얼마 전부터 그녀의 죽음을 예상했기에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어머니의 죽음은 뫼르소에게 있어 삶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이벤트 중 하나 정도로 여겨진다.
장례식을 치르고 돌아온 뫼르소는 남은 휴일 하루를 해변에서 보내며 전부터 알고 지내던 여인과 코미디 영화를 본다. 집에 와서는 옆집에 사는 창고지기를 업으로 사는, 소위 질 나쁜 사람으로 생각되는 이웃과 대화를 나눈다. 그는 대화에 의미를 깊게 느끼지도, 그와의 친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반대로 그것들을 굳이 치워버릴 필요도 느끼지 않았기에 그와 교류한다. 그로 말미암아 일련의 사건에 연루된 뫼르소는 사람을 총으로 쏴 죽이게 된다. 이것으로 1부가 마무리된다.
2부에서는 감옥에 수감된 뫼르소가 재판을 겪는 과정이 그려진다. 검사는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며 장례식 바로 다음날 그의 정부와 코미디 영화를 보고 잠자리를 가졌다는 점을 근거로 들며 그의 살인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주장한다. 어머니의 장례식과 살인사건 사이에는 어떤 연관도 없지만 검사의 말은 배심원의 판단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독자가 보기에 뫼르소의 살인은 적어도 의도적이지 않았으며 정당방위처럼 생각되기까지 한다. 독자가 읽어나간 사건의 흐름은 재판에 참여한 사람들에게도 공유되었으나, 그와 동시에 재판장에 있던 모두는 뫼르소 특유의 냉소도 함께 보게 된다. 그리하여 뫼르소는 사형 선고를 받는다.
그는 거짓말하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거짓말은 단순히 아닌 것을 말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있는 것을 더 말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그것을 더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모두가, 매일, 삶을 단순화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나는 본 글에서 뫼르소의 태도를 냉소라고 표현하였다. 기이함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책 말미에서 알베르 카뮈가 미국판 출간을 기념하여 쓴 서문을 읽으며 그 표현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뫼르소는 본인이 느낀 것을 이야기하였고 느끼지 않은 것들을 애써 긍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모든 생각을 다 이야기하는 무분별한 사람이지도 않았다. 묻는 말에 대답하였을 뿐이나 그 대답이 사회가 생각하던 것과 달랐을 뿐이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은 대가로 사형당했다. 그에게 잘못이 있다면 사회적으로 좋다고 생각되는 행동양식이 그의 방식과 달랐다는 점과 그 다름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는 것 단 두 가지이다. 물론 이것이 진정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갈 만큼의 잘못인가 하는 점은 더욱 근본적인 물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생명, 종의 생존에 있어 다양성의 확보는 최우선 과제이다. 유전자 풀의 다양성이 확보되어야만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종의 지속성을 잃지 않을 수 있다. 개체는 사라지더라도 종은 이어지도록 하는 힘이 바로 다양성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방인 속 재판장의 배심원과 판사, 검사는 다양성을 죽이는 존재들이다. 살인범인 뫼르소에게 사형을 선고해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내린 점에서 그러하다. 뫼르소들의 죽음은 다양성을 줄여나가고 이윽고 이방인이 사라진 사회는 다양성의 종말로 그 스스로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게 될 것이다.
뫼르소는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 태양과 사랑에 빠졌던 이였습니다.
모든 감성을 상실한 것과는 거리가 먼, 어떤 깊은 열정과 완고함 때문에,
절대적인 것과 진실에 대한 열정으로, 생명이 불어넣어진 것입니다.
작가인 카뮈는 독자들을 곤란하게 만든다. 어찌 되었던 뫼르소가 사람을 죽인 것은 피할 수 없는 진실이다. 그 사건이 마냥 우연이지도 않다. 살인으로 마무리되는 일련의 사건에 뫼르소가 연루되는 과정 또한 뫼르소의 선택의 결과물이다. 그렇기에 뫼르소에게 내려진 사형선고를 마냥 부정하기는 어렵다. 뫼르소를 변호하러 나서면 도매급으로 묶여 냉혈한 살인범이 되지 않겠는가. 이 지점이 문제의 핵심이며 나아가기 위해 첫 발을 내디뎌야 할 발판이다. 우리는, 뫼르소가 그가 저지른 잘못으로 재판받도록 주장해야 한다, 그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삶의 궤적에서 읽어낸 그의 다름으로 그를 재판하지 않고 그의 잘못으로 그를 판단해야 한다. 책을 읽으며 내내 느꼈던 기이함을 근거로 삼아 그에게 내려진 사형선고를 긍정해서는 안된다. 이곳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