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도, 넘지 말아야할 금을 밟다.

기후위기, 탄소중립, 에너지전환 남의 나라 이아기가 아니다.

by 걱정쟁이 도비

전 세계적으로 기후 위기에 의한 재난에 허덕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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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고온현상, 가뭄, 북미대륙의 열돔현상, 토네이도, 대기의 강....

하지만,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이상하리만큼 고요하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느끼는 둔감함 일뿐이다.

엄청난 더위도, 무지막지한 집중호우도... 지나고 나면 관심에서 멀어진다. 무사히 지나왔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사회를 지탱하고 운영하는 시스템의 회복탄력성(Resilience)이 튼튼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한 발 더 나아가자면 우리나라의 극단적인 4계절이 우리에겐 기후 위기를 견뎌내는 예방접종과도 같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2024년 여름, 강원도 홍천의 온도계가 41.2도를 가리키고 서울의 아스팔트가 녹아내릴 때, 사람들은 비로소 기후라는 보이지 않는 괴물의 실체를 목격했다. 폭염 특보가 45일간 이어지는 기록적인 열기는

정말 기후위기가 우리 앞에 도착했음을 실감하게 했다.

그 기나긴 여름을 지내며 모두가 똑같은 조건에서 더위와 싸우진 않았다. 어떤 이들은 24시간 쾌적한 온도와 습도를 제어하는 에어컨이 가동되는 공간에서 지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지독한 더위와 습도 속에서 지옥같은 여름을 보냈다. 결국 기후위기는 공평하지 않다. 저소득층에게 더더욱 가혹하게 다가온다.


마지노선이 무너지다.

2015년 파리협약에서 전 세계가 합의한 1.5도라는 숫자는 인류가 현 상태를 유지하며 적응할 수 있는 마지막 마지노선이었다. 그런데 2024년, 그 선이 무너졌다.

세계기상기구(WMO)는 2024년 지구 평균기온이 산업화 이전 대비 1.55도 상승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175년 관측 역사상 가장 뜨거운 해이자, 인류가 스스로 설정한 마지노선을 처음으로 넘어선 해다.

2도를 넘어서는 순간, 산호초의 사멸과 해수면 상승, 그리고 10억 명에 달하는 기후 난민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연쇄 붕괴가 시작된다. 우리는 이미 경고의 선을 밟았다.


강바닥에서 솟아오른 경고, 기아석

이미 세계 곳곳에서는 시스템의 비명이 들려오고 있다. 2023년 여름, 유럽의 젖줄인 라인강이 말라붙자 강바닥에 잠겨 있던 거대한 바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른바 기아석(Hunger Stones)이라 불리는 이 바위들은 수백 년 전 극심한 가뭄을 겪은 선조들이 미래 세대에게 남긴 재난 타임캡슐이다.

바위에는 이런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내가 보이면 울어라(Wenn du mich siehst, dann weine)"

강물이 말라 바닥의 돌이 보일 정도면 곧 대기근과 죽음이 닥칠 것이라는 조상의 눈물 섞인 데이터였다. 수백 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기아석은, 우리가 누려온 풍요가 얼마나 얇은 수면 위에 떠 있었는지를 증명하는 서늘한 증거였다.



한국이라는 예외 없는 실험실

우리는 온대 기후니까 괜찮다는 안일함은 이미 통계 앞에서 무너졌다. 대구의 사과는 강원도로 북상했고, 동해의 명태는 이제 러시아산임을 확인해야 먹을 수 있는 수입종이 되었다. 아열대 어종이 제주 바다를 채우는 동안, 우리는 매년 역대 최장 열대야와 기록적인 집중호우를 겪어내고 있다.

더 무서운 사실은 지난 100년간 지구 평균 온도가 0.7도 오를 때, 한국의 평균 온도는 1.5도 올랐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구에서 가장 빠르게 달궈지는 지역 중 하나다. 행정의 말단에서 지켜본 바에 의하면, 시스템은 여전히 과거의 데이터에 기반해 미래를 설계하고 있다. 하지만 빙하가 녹고 해류 순환이 느려지는 티핑포인트는 과거의 경험치로는 계산할 수 없는 영역이다.



시작된 네 가지 위기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기후위기는 단독으로 오지 않는다.

첫째, 폭염과 홍수로 대변되는 기후 붕괴.

둘째, 이로 인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식량 위기.

셋째, 혼란을 틈타 일자리를 잠식하는 AI와 로봇의 충격.

넷째, 그 속에서 존재 이유를 상실해가는 인간의 위기.


이미 혹독한 한국의 기후환경에서 다져진 우리 특유의 적응력이 기후 위기를 TV 화면 저편의 이야기로 치부하며 무관심으로 일관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는 적응이라는 단어가 조용히 스며들고 있다. 막을 수 없다면 견디자는 그 말이 사실은 가장 위험한 포기의 언어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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