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었으면 괜찮아
나에게는 비정기적으로 베이킹을 하는 모임이 있다. 만들고 싶은 특별한 메뉴가 생기거나 또는 보통 연말을 기해 메뉴를 정해 만난다. 올 겨울은 당근 케이크를 만들어보자 합심하고 모였다.
사실 베이킹을 굳이 꼭 만나서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바쁜 일정을 어떻게든 맞춰서든 만나려고 하는 까닭은 일단 함께 공유하는 순간의 즐거움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만들어 볼 엄두가 나지 않을 빵을 열심히 계량하며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는 일이 몽땅 즐거운 것이다. 오븐에서는 부지런히 빵이 구워지고, 시시껄렁한 일들도, 인생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테이블 위로 넘나드는 시간이 흐른다.
몇 번인가 베이킹 타임을 갖다 보니 이제는 약간 요령이랄 게 생겨서 이번엔 미리 당근도 채 썰어 준비하고, 레시피 동영상도 예습을 철저히 했다. 그렇게 순조롭게 반죽을 완성해서 우리는 뿌듯함을 만면에 드리웠다. 뭐 이렇게 쉽냐며 헤실헤실했다. 물론 막바지에 깜빡하고 소금을 안 넣은 걸 발견하긴 했지만, 반죽을 도로 옮겨 5g의 소금을 야무지게 챙겨 넣었으니 레시피와 다를 것은 하나도 없었고. 그야말로 완벽했다. 신난 우리는 감탄을 금치 못하며 설레발이란 설레발은 다 끌어 모아 말했다.
— 어떡하지, 벌써부터 냄새가 너무 좋아!
— 그러니까. 너무 맛있을 거 같아!
그렇게 전에 없이 우리는 순항을 하고 있었다. 오븐에서 솔솔 당근 케이크 고유의 맛있는 향기가 뿜어져 나올 즈음, 이제 크림치즈 프로스팅을 만들어볼까 하고 설탕을 계량을 하려던 때였다. 흰 설탕을 용기에 덜던 언니가 갑자기 날 쳐다보며 심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헉. 근데 이거 맛 좀 봐봐.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하얀 알갱이를 한 꼬집 집어서 맛을 봤다. 오묘했다. 끄트머리에 짭짤한 맛이 올라왔다. 미원인가? 다시 맛을 보았다. 아무래도 달진 않았다. 눈을 감고 혀 끝에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소금이었다.
— 이거… 소금인데?
명탐정 혓바닥은 추리를 마치고 혀를 나불거리며 범인은 바로 소금, 을 외치었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설탕을 제대로 넣으면 되지, 하고 영문을 모른 채 가슴을 쓸어내리는 내게 언니가 말했다.
— 헉. 어떡하지? 아까 갈색 설탕 반, 흰 설탕 반 넣는다고 이걸 넣은 거 같아 ㅠ.ㅠ
우리는 여분의 반죽을 그제야 부랴부랴 찍어 맛을 보았다. 짰다. 짜디 짰다. 이별 후 주룩주룩 흘러내리던 눈물도 이보다 짜진 않았을 것 같았다. 들어간 소금의 양만 해도 130g, 아니 5g 더해 135g이었으니 당연지사인 셈이다.
순간 우리 셋은 모두 얼음이 되었다. 헉. 어쩌면 좋지? 당근과 우유, 밀가루는 있던 재료를 모조리 썼으므로 없는 상태였다. 다만 시간만은 여유가 있었다. 아직 해는 지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멈출 것인가, 다시 시작할 것인가?
우선은 오븐 속에서 맛있는 냄새를 폴폴 풍기며 구워지고 있는 녀석은 녀석대로 두고 우리는 플랜 B를 강구하기로 했다. 일단 근처에 사는 친구 집에 들러 채칼을 챙기고, 친구 차를 타고 대형마트에 가서 피칸과 우유와 밀가루와 당근을 사서 다시 시작해보자. 혹시 모르니(?) 굽던 건 구워서 맛을 봐 보자. 구워지면 안 짤 수도 있다(???).
그렇게 우리는 알 수 없는 기동력으로 착착 움직였다. 모든 일은 일사천리였고, 모두들 내내 웃었다. 아니 베이킹을 한 나름의 경력이 있지, 어떻게 이런 허망한 실수를 할 수가 있느냐며 소금을 부은 언니가 미안해했다. 그러나 우리는 나중에 5년쯤 지나서 생각해보면 성공한 베이킹보다 소금을 설탕 대신 왕창 들이부은 오늘의 베이킹이 더 기억날 거라고 얘기했다. 실패함으로써 더 긴 생명력을 얻은 이야기는 어떤 차원에서는 결코 실패가 아니니까. 무엇보다 우리는 소금을 넣었기 때문에 순탄히 설탕을 넣었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이 웃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오히려 소금 베이킹은 성공적이었는지도 모른다.
한 차례의 시행착오 덕인지 두 번째 베이킹은 분담해서 척척이었다. 우리가 참고한 글래머러스 펭귄의 레시피는 산뜻하고 풍부한 맛이었으며, 넉넉한 피칸과 당근이 주는 풍요로움이 입안 가득 감도는 것도 과연 홈 베이킹의 묘미였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구워 내, 호기심에 맛보곤, 일심동체로 퉤퉤를 연발했던, 조금 짭짜름한 당근 케이크 앞에서의 깔깔거림이야말로 오늘의 참맛이 아니었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