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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예 Dec 13. 2023

사람은 왜

이렇게 정교하게 만들어진 걸까

미술관에 다녀왔다. 사실 난 미술을 잘 모른다. 잘 알려는 노력도 크게 해 보질 않았다. 책을 몇 자 읽는다고 해서 그 방대한 세계를 잘 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는 말이 핑계는 되려나…


그래도 좋아하는 화가나 그림은 있다. 화풍도 있다. 그런데 그게 또 변했다는 것을 미술관에 가서 새삼 느끼게 됐다.


예전에는 마치 사진과 같은 초극사실주의 작품들이 좋았다. 이걸 어떻게 다 그림으로 그릴 생각을 했나 싶은 그런 그림들 말이다. 장엄한 풍광이 있고 그 순간을 예리하고 섬세하게 포착한 작품들에 깃든 멋이 좋았다. 반면 추상화에 대해서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런 건 애들 손 장난 같은 작품들도 많았으니까. 휘리릭 하는 단 한 번의 붓터치나, 연필로 한 줄을 죽 긋는다거나 하는 것에도 미학이 있다니… 한때는 알은체를 하려고도 했으나 그런 허풍은 오래 못 간다. 알맹이가 없으므로.




그러다 오랜만에 미술관에 갔다. 김환기 화백의 후기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딱히 대상을 구체적으로 특정할 수 없는 추상화들이 나열되어 있다. 마침 사람도 없고 해서 나는 전시관의 기다란 의자에 오래도록 앉아 하나의 그림만을 응시하였다.


왠지 서글펐다. 그리는 사람의 마음도 서글펐을 것 같다는 느낌이 불쑥 들었다. 파란빛이 파도처럼 일렁이는 것만 같았고 그게 어째서인가 쓸쓸했다.


내가 쓸쓸한 마음을 가지고 들어간 것도 아니었는데 쓸쓸한 마음이 난데없이 튀어나오기만 했다.


나중에 나오는 길에 그가 쓴 문장을 보았다. 시름으로 그리지만 보는 이의 마음에 기쁨으로 가 닿으면 좋겠다는 글귀였다. 본인은 시름으로 그리면서 타인은 기쁨으로 느끼길 원한다니, 어쩐지 욕심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다정한 마음씨로구나 했다.




그림은 아주 단순한 나열과 반복에 불과한 듯한데 그 안에 기쁨과 슬픔이 깃든다. 아울러 슬픔을 느끼는 기쁨도 있는 것이다. 기쁨을 느끼는 슬픔도 있고.


왜 사람은 이렇게나 정교하게 만들어진 걸까. 공연히. 나 같은 둔감한 사람조차도 이렇게 기민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하면, 산다는 것은 상당히 날카로운 문제인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슬픔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의 기쁨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조금은 덜 알아챌 수 있더라도 괜찮았을 것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사람이란 정교하고도 정교한 극치에 있는 예술품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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