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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예 May 09. 2022

보편, 타당한 실체로서의 트루먼(true-man)

트루먼 쇼, 1998

이 영화를 보고 한 번쯤은 벽을 두드려 본 경험이 있지는 않은지. 아니면 내심 exit 버튼을 찾아 헤매진 않았는지. 

적어도 어려서의 나는 그랬다.


뭐야, 나도 쇼에 갇혀있는 거 아니야? 저기요? 들리세요? 허공에 혼잣말도 했는데 상대방은 내내 묵묵부답. 일관된 냉담함에 더는 말을 붙이기 지쳐버리긴 했지만. 트루먼 쇼처럼 버젓이 눈에 보이는 탈출구가 달리 있지는 않은데, 과연 정말 없는 걸까?


그런 물음이 빼꼼 고개를 들었다. 

트루먼쇼는 말하자면 ‘트루먼, 몰래카메라 대작전!’ 같은 문구로 간단명료하게 요약이 된다. 그렇다. 전 세계 인구가 짜고 치는 고스톱을, 무려 한 사람을 두고 치는 거다. 불공평하다는 사실을 느낄 여지조차 없으니 당사자는 뭐가 문제인지 자각할 수 있을 리 없다. 일상이 주는 적당한 수축과 이완에 그럭저럭 젖어들었으면 트루먼쇼가 종영되는 일도 없었을 텐데. 어느 날, 별의 추락을 시작으로 그의 세상도 조금씩 추락하기 시작한다. 


트루먼은 — 실험실의 생쥐처럼 인위적으로 소프트웨어에 세팅된 — 트라우마가 있고,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만 이어지지 못하는 등의 좌절을 맛보긴 하지만 대체로는 이른바 ‘정답’과도 같은 평화로운 일상을 영위해 간다. 겉보기에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별로 없는 그런 생활이 줄곧 펼쳐지는 셈이다. 모든 극이 그렇듯 내내 즐거워서도 안 되고, 내내 슬퍼서도 안 되므로 사건과 에피소드라는 조미료가 적절히 안배되어 있다고나 할까. 그럼에도 트루먼의 일생은 평이하고 안온한 종류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의 소리는 조금 다른 이야길 한다. 아마 모든 균열은 그가 그 목소리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며 현존하는 그 순간을 면밀히 관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좀 더 적절한지도 모르겠다. 


이런 트루먼의 이상한 행동을 — 당연히 — 알게 된 부인(역할) 메릴 — 과 제작진 — 은 트루먼에게 이제 아이를 낳고, 모기지 대출을 갚으며, 꼬박꼬박 저축도 하며 살 것을 은근히 종용한다. 그게 행복하고 올바른 삶의 형태라고. 하지만 트루먼 안에서 계속해서 꿈틀거리는 무언가와 주변에서 벌어지는 옥에 티 같은 사건들이 협력해서 트루먼의 일상을 조금씩, 조금씩 무너뜨리기에 이른다. 


무언가 확실히 이상하다는 것을 자각한 이후,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던 트루먼은 결국 안전한 자신의 보금자리를 버린 채 언제나 공포의 대상이던 바다로 떠난다. 그 공포마저도 그를 길러낸 세계가 주입하고 만들어 낸 산물이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트루먼 쇼의 종말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실종은 그만을 위해 설계된 세트장과 등장인물들의 역할, 그 모든 것 역시 붕괴시키는 파급력을 갖는다. 시련과 불안과 공포와 혼란 가운데 결국 세계의 끝을 찾아낸 트루먼, 그 앞에 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낸 크리스토프의 음성이 나린다.


그는 트루먼의 삶이야 말로 현실과는 다른 이상적인 이데아이며, 그 안의 풍요롭고 안정적이며 언제나 내일을 예상할 수 있는 삶이야 말로 자신이 트루먼에게 준 ‘특별한 인생’이라고 말한다. 한 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한다는 면에서, 말하자면 조물주 놀이를 하고 있달까. 완벽하게 설계된 작고 안전한 세계로 돌아가라는 은근한 크리스토프의 말에 트루먼은 그저 웃으며 따뜻한 안부 인사를 건넬 뿐. 자신은 영영 어둠 속으로, 미지 속으로 기꺼이 걸어 들어간다. 


이것이 얼마나 용감한 일인지를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어릴 땐 트루먼 쇼는 잘 짜인 농담과 같다고 느꼈다. 가끔 인생이 시트콤처럼 느껴지는 순간은 누구에게든 있으니까. 지금은 어떤 에피소드쯤인가 싶을 때가 있으니까. 내 삶을 누군가 구경하고 관찰하고 있는 거 아닌지가 궁금한 때도 있었는데, 트루먼쇼는 이런 상상을 상당히 정교하게 구체화해서 만들어 둔 수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감상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러나 다시금 보게 된 트루먼 쇼는 결코 픽션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트루먼, 즉 진정한 true-man으로 거듭나는 순간은 그가 실제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세계에 종말을 고한 때부터다. 데미안의 유명한 문장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알을 깨야만 새는 생명을 얻고 진정으로 살아갈 수 있다. 마찬가지로 트루먼도 자신의 세계를 깨야만 제 본연을 찾을 수 있는 시험대 위에 놓여있던 셈이다. 그리고 사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인생에서 이러한 운명의 순간에 반드시 놓이고야 만다. 세트장으로 되돌아갈 것인지, 출구의 어둠 속으로 유유히 사라질 것인지만이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권한이라는 점에서 우리 모두는 트루먼의 얼굴을 지닌다. 


인생에 정답이 없다고 말은 하면서도 통념이 잘 세팅해 둔 궤도를 이탈할 때면 불안이라는 손님을 맞이한다. 그런 점에서 트루먼쇼의 트루먼이야 말로 보편타당한 오늘날의 실체가 아닐 수 없다. 트루먼쇼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급급한 마음가짐이 과연 아니라고 답할 수 있을까. 잘 짜인 질서 위에서, 전시하듯 행복을 꺼내고, 경주하듯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물음을 영화는 내내 던지고 있었다. 


당신은 정말로 genuine 한가요? 당신이 생각하는 특별함도, 어쩌면 크리스토프의 오만한 ‘특별함’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은 아닌가요? 


트루먼 쇼에서 오로지 진실이고자 했던 트루먼의 마음만이 진실이었고, 꺼지지 않는 지독한 깜부기 불이었다. 실비아에 대한 사랑과 스스로의 열망이라는 실타래가 그에게 없었다면 그는 미노타우로스의 궁을 영영 벗어나지 못하지 않았을까. 사실 잠깐 눈 감으면 찾아오는 일상의 안온함이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달콤함이 아니던가. 그러나 트루먼은 true-man으로 존재하기 위해 출구를 찾아냈고,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내일 속으로 스스로를 던지고야 만다. 이것이 얼마나 큰 용기인지. 정말 제대로 된 지구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내일은 필연적으로 불안하고 파란만장한 것인데… 하지만 그 고단함 덕분에 그는 이제 비로소 삶의 정수를 맛볼 수 있게 되리라. 트루먼 쇼는 트루먼의 부재로서 몰락하고, 그리고 트루먼의 생애는 모든 것의 붕괴에서 싹튼다. 참 아이러니하고 또 아름답다. 


인간은 누구나 저마다 고유한 하나의 세계라는 점에서 트루먼의 이야기는 에브리맨의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그러니 얼마든지 허공에 들려요?라는 외침을 해도 좋으리라. 적어도 자기 자신은 그 말을 듣고 있지 않은가. 나의 우주는 오직 나의 탄생과 더불어 탄생하고, 저묾과 동시에 소멸하는 것. 그것이 위선과 역할로 점철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고유한 빛을 발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역시 다름 아닌 지극한 스스로의 몫임을 느낀다. 그러니 용기가 필요하다. 작은, 나라는 세상의 전부를 살펴볼 용기. 그리고 그 작은 존재의 발걸음을 어둠 속으로 내딛을 용기.

 How’s it going to end? 


정답도 오답도 없는 듬성듬성한 문장이기에 비로소 무한한 아름다움이 꽃필 여백도 있다는 것을 오늘은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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