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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예 Nov 17. 2024

도자기 만들기를 ‘말하기’

의사소통의 중요성


내 오랜 취미 활동 중 하나로 ‘도자기 만들기’가 있다.


어쩌다 시작한 활동이 했다가 관뒀다가 했다가 관뒀다가 하면서 근근이 그 명맥을 이어 오고 있다. 끈질기다고도 할 수 있겠다. 만일 취미 활동의 세계에도 패자 부활전이 있다면, ‘도자기 만들기’는 탈락할 듯 탈락하지 않는 참가자일 터이다.


‘이제 진짜 게임을 시작합니다…!‘

허수들이 대거 탈락하고 이제 막 고수들이 본판을 벌이려는 타이밍이다. 갑자기 모든 불이 탁 꺼졌다가 묵직하고 느린 음악과 함께 빨간 조명이 서서히 켜진다. 드라이아이스의 희끄무레한 연기 세례 속에서 등장하는 녀석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도자기 만들기! 같은 느낌이랄까. 어느 쪽인지 좀처럼 가늠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친구의 매력 포인트다. 사실 허수인지 고수인지 결정하려면 오직 한 가지만 있으면 된다. 그것은 바로 나의 의지이다. 이 녀석을 끝까지 데려가겠다는 그런 의지 말이다.


세상에는 딱 두 종류의 사람이 존재한다. 도자기를 잘 빚는 사람과 못 빚는 사람. 나로 말하자면 일단은 후자인데 전자가 되기 위해 저 ‘의지’라는 녀석을 부득불 가져다가 써야만 하는 결과적으로는 어쨌든 후자형 인간인 것이다. 살면서 나는 어떤 일에는 꽤나 능숙하고, 어떤 일에는 몹시 서툴렀는데 슬프게도 도자기 빚는 일은 후자의 것이었다. 흑흑.. 더욱이 의지라는 녀석만으로 ‘못하는 일’을 진척시키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의지는 차올랐다가도 희미해지고 희미해졌다가도 차오르는 보름달 같은 면모가 있었는데, 나의 도자기 만드는 기술(이라고 말해도 될는지..?) 역시 차오르는 듯하다가 원점으로 차오르는 듯하다가 원점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던 것이다.


이 구질구질한 굴레를 끊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존재한다. 하나는 기준치를 낮추어 나만의 작품활동에 충분히 만족하는 석가모니적 방법이고, 둘째는..


(아, 말을 하다가 말면 세상 궁금해진다길래 약은 수를 잠시 써 보았다…ㅎㅎ)


둘째는 안 되는 원인을 분석한 뒤 다른 방법을 시도해 보는 시행착오적 방법이다. 참고로 나의 경험에 따르자면 이 두 가지를 당근과 채찍처럼 적절히 마음에 심는 것이 효과가 좋았다. 못하면 못한다고 구박하지 말고 잘하면 잘한다고 교만하지 않는 것. 종합하자면 차은우에게 못생겼다 말하고 조세호에게 잘생겼다 말하는 유퀴즈적 방법론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물론 나도 차은우에게 잘생겼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만이 굴뚝이지만..


아무튼 그런 굴곡진 역사를 지나오면서 생긴 습관이 ‘되묻기’다. 도자기를 빚는 일은 어쨌든 몸으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아무리 언어로 들어도 몸에 붙지 않으면 다 까먹어 버린다. 더욱이 도자기는 역시 입체물이기 때문에 빚는 과정에서 오해가 생길 소지가 많다. 당장 ‘위, 아래’라는 표현만 해도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달리 해석할 상황이 빈번하다. 이런 오류를 예방하고자 동서남북 개념까지 도입해 보다 정확한 이해에 한 걸음 가까워지긴 했지만 여전히 쉽지 않다. 이럴 땐 이렇게, 저럴 땐 저렇게… 어떤 본능적 차원의 몸짓을 언어라는 수단에 얹어 다른 사람에게 전수하는 과정이니 언어의 중요성이 다른 어느 때보다도 커진다. 급기야는 말로는 도저히 그 ‘느낌’을 설명할 수가 없어 선생님과 나의 손을 포개어 중심점을 찾는다던지, 선생님이 작업을 먼저 보이고 내가 그 부분을 훑어본다던지 하는 식으로 직간접적으로 배우기도 한다. 그럼에도 모든 과정을 일일이 이렇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지시를 받으면 그걸 내 언어로 해석해서 도자기에 녹여내야 한다. 그리고 그 미묘한 감각을 몸으로 흡수하는 것까지가 내 역할이다. 분명히 같은 한국어를 쓰고 있는데도 해석은 꼭 필요하고, 내 해석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꼭 되묻는 일까지 해야만 한다.


그런데 생각을 해 보면 세상의 모든 일들이 그런 것 같다. 같은 것을 보고 모두 다른 생각을 한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괜히 나왔을까. 타인의 생각과 마음을 알고자 경청을 한다지만, 감정의 종류나 깊이, 미세한 흔들림이나 굳건함 따위를 파악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세심하게 단어를 골라 표현을 구체화하는 일의 중요성을 느낀다. 언어가 소통의 수단으로 기능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하지만 어느 나라 말을 할 줄 아는 것 이상으로, 어떤 미묘한 감각까지 마음속에서 캐내고 흙먼지를 털어내는 섬세한 작업을 해 내고 일이야말로 언어력인 거 같다. 언어로부터 세계가 확장한다는 말만큼은 참인가 보다. 수단을 잘 썼나요? 그렇다면 이제 다음 단계는 도자기를 다시 만들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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