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커피의 민족이었어
한동안 커피를 끊었었다. 기간으로 말하자면 한 달 정도. 대단한 이유가 있어 끊은 것은 아니다. 습관적으로 커피를 마시는 거 같아 줄여보잔 심산이었다. 마침 내가 즐겨보는 유튜브 건강 콘텐츠도 한몫했다. 숙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커피를 한 달만이라도 끊어보라는 거다. 그래서 어디 한 번 커피를 끊어보기로 했다. 사실 난 늦은 밤 커피를 마셔도 잘만 자는데… 커피는 하루에 한 잔, 많아야 두 잔 마시는데… 마실 핑계를 대자면 자잘한 것들을 밑도 끝도 없이 댈 수 있을 것 같으니 그냥 뚝 멈췄다.
고백하자면 커피를 끊는 일은 그렇게 어렵진 않았다. 가끔 아침에 생각이 나고, 점심 먹고 나면 생각이 나고, 친구를 만나 카페에 가면 풍겨오는 향에 조금 아찔한 적도 있었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금단현상이랄 것도 없었다. 커피를 끊었다고 해서 잠이 특출 나게 잘 오는 것도 아니었고, 만연한 피로감이 새로이 생겨나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이쯤 되니 내가 커피를 좋아하긴 했던가 하는 생각이 더러는 들기도 했다. 좋아하긴 하지만 없어도 되는 그 미묘한 경계 위에 ’커피‘가 있었던 것이다. 내 애호의 수준은 그 정도였다. 흠뻑 빠져든 정도로 깊지는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얼마든지 즐길 수 있는 정도의 마음가짐. 없으면 아쉽지만 아니라면 포기하기 쉬운.
그런데 시일이 거듭되며 지대한 문제가 하나 생겼다. 그건 바로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갈 곳이 영 없다는 사실이었다. 커피는 식품으로서 기능하는 것은 물론, 더 크게는 카페라는 공간을 매개하는 수단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거다. 술을 마시지 않는 내게는 그 위력이 더했다. 술집이라는 대안이 없는 사람은 밥을 먹고, 자연히 커피를 마신다. 만일 그 사람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 어떨까? 읽고, 쓰고, 생각하기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 모든 소음이 통제되는 독서실은 과하고, 야외의 공원은 지나치게 개방적인 감이 있다. 더욱이 공원에는 대체로 책상이 없으니 그건 그거대로 곤란하다.
카페의 대안으로 찻집을 찾으면 어떨까? 카페의 밀도에 비하자면 과장 조금 보태 찻집 찾기는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에 버금간다. 카페에 가서 차를 마실 수도 있지만, 그건 뭔가 중국집에 가서 탕수육이 아닌 김말이 튀김을 찾는 느낌이다. 찾아본 결과 요즘은 도서관이 카페와 흡사한 시설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괜찮은 선택지 중에 하나다. 하지만 낯선 동네에 갔을 때 도서관을 찾는 게 쉬울까, 길거리에 즐비한 적당한 카페를 하나 골라 잡는 게 쉬울까? 아무래도 후자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즉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는 것은 전국구에 놓인 수많은 공간을 반쯤은, 아니 구할은 포기해야 한다는 얘기가 되어 버린다.
사실 커피를 마시는 것 이상으로 새로운 공간을 탐방하는 일은 나의 작은 즐거움 가운데 하나였는데, 커피를 안 마시려고 작정을 하고 보니 한 달쯤 나는 의도한 것 이상의 집순이가 되어 있었다. 물론 집의 편안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집에서는 얼마든지 다양한 블렌드의 차를 즐길 수 있다. 몇 번이나 리필이 가능하다. 미지근한 물도, 차가운 물도, 따뜻한 물도 만사 오케이다. 조명도 내 마음에 쏙 드는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눈이 편안한…(광고 아닙니다) 과학적인 설계로 되어 있다. 화장실도 쾌적하고 깨끗하다. 기다릴 필요도 없다. 온도는 어떤가? 딱 좋다. 덥지도 춥지도 않다. 입이 심심하다고요? 냉장고 어드메에는 분명히 간식이 있다. 와이파이도 빵빵하고, 성질은 조금 지저분하지만 지나치게 귀여운 강아지도 한 마리 있어서 심심하면 만지기 딱 좋다. 유튜브를 보며 깔깔거리며 웃어도 남에게 민폐가 되지 않고, 마음에 쏙 드는 음악만을 흘려보내는 블루투스 스피커는 또 어떤가. 또 있다. 서가의 구성을 언급하지 않으면 섭섭하다. 오랜 시간을 거쳐 엄선한 책들만 놓여 있다. 어느 것을 골라도 실패란 없다. 하지만 적당히 집을 나서는 것이 몸과 정신에 이롭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언제까지고 집에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마음먹은 한 달이 훌쩍 지났다. 커피 단식을 마치고 처음으로 디카페인 라테를 마실 때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커피가 이렇게 맛이 좋았나.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다 느끼고 있는 기분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 이후로는 커피를 편안한 마음으로 종종 마신다. ‘줄여야지’하고 조금쯤은 생각하면서. 기실 커피를 끊는 일보다 어려운 일은 공간을 잃는 일이다. 나야 커피를 얼마든지 즐겁고 가벼운 마음으로 마실 수 있으니 카페라는 공간을 되찾음에 있어 대단한 어려움은 없었지만, 여러 이유로 커피를 마시지 않거나 마실 수 없는 경우라면 어디로 가야 좋을까. 내게는 언제나 가고 싶은 곳이 풍부하다 못해 넘쳐났는데 ‘커피’라는 두 글자를 지우면 세상이 허허벌판이 되기도 하더라. 방황을 허락하는 공간이 이렇게나 적다는 사실에 대한 체감, 동시에 작은 여유에 연결되고자 마시는 보편적인 커피 한 잔.
삼보일카페(三歩一咖)인 요즘 세상에서도 우후죽순 새로운 공간이 자꾸만 생겨나는 것은 온갖 쉴 수 없는 마음들의 숨구멍이 카페라는 실체로 형상화된 것은 아닌가. 달콤 씁쓸한 커피를 털어 넣으며 생각하게 된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커피의 민족이었어.